누구나 어떤 계기로 지금과는 전혀 무관한 분야에 꽂히는 상황을 맞이하는 순간이 오듯이 내게도 우연처럼 찾아온 미술, 미술관과의 만남이 있었다. 그러한 순간을 맞이하는 시기와 대상이 개인마다 다를 수 있다.

 

미술과 전혀 무관한 삶을 살아 온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정말 미술전시회를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가봤다. 핑계 아닌 핑계라면 일단 작품을 봐도 뭐가 뭔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게다가 쳇바퀴 도는 우리 인생이라고 시간대 별로 조각조각 나누어져 나름의 기능과 역할이 할당된 일상은 각각의 활동을 반복할 뿐이었다. 잘 짜인 각본과 같은 일상 속에서 그 규칙과 리듬에 자신을 내맡긴지도 시간이 꽤 흘렀다. 말하자면 공식에서 벗어난 일탈을 시도하기가 쉽지 상황인 것이다.

 

3년 전 일과 관련하여 며칠 간 뉴욕에 갈 일이 생겼다. 정말 오랜만의 미국 방문인데다 한동안 휴가다운 휴가를 즐기지 못한 터에 구체적인 계획도 세우지 않은 채 몇 달간 뉴욕에서 지내보기로 했다. 사실 난 여행을 그다지 즐기는 편이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종일 집에 시간을 보내기를 좋아하지도 않지만 집을 떠나 여행을 다니는 것 또한 내겐 아주 부담이 되는 일이다. 심지어 머릿속으로 여행 계획을 세우고도 실행에 옮기기까지 어떤 결심을 요하기도 한다. 막상 실행에 옮긴 여행길에서나 출장길에서도 일과 관련된 장소 이외에는 남들처럼 시간을 쪼개어 주변의 유적지나 명소를 찾아다니거나 맛 집을 순례하는 일은 거의 없다. 더 솔직히 말하면 쇼핑에도 관심이 없고 등산이나 산책과 같은 야외 활동이나 운동은 더구나 관심 밖이라 친지의 집에 머무는 경우는 현지인처럼 마트에서 장봐서 밥해 먹고 가벼운 외출을 하는 정도이고, 출장 중에도 일만 마치면 호텔방으로 돌아와 여유롭게 쉬는 시간을 갖는 것이 온전한 휴식이라는 생각에 방콕하기 일쑤였다.

 

그런 지금까지의 나의 여행 패턴이 지난 뉴욕 방문 때 완전히 탈바꿈되었다. 새로운 문화예술향유에 대한 갈증으로 일주일에 2-3번 맨해튼을 찾는 친구 덕이다. 그는 오랜 직장생활(대학병원)을 마치고 수년 전 조기 정년퇴직을 한 이후 직장생활과 살림에 얽매여 지금까지 누리지 못한 문화예술 향유에 여념이 없다. 우리는 일반관람자로 공연을 보거나 연주회를 갈 경우 차림새에 더 신경을 쓸망정 그냥 아무런 준비 없이 가는 경우가 흔하다. 그런데 그 친구는 작정을 하고 새로운 문화예술의 트랜드를 익히고 정보를 수집하고 지식을 쌓는데 게으름이 없었다. 신문과 잡지, 집에 배달되는 각종의 안내 책자를 뒤져서 새로운 이슈가 되거나 자신이 관심이 가는 공연, 전시, 연주회, 식당관련 정보를 수집한다. 때로는 각종 할인정보에서 무료기부 전시 정보도 잘 챙겨 그야말로 가성비 갑의 문화예술을 맘껏 향유하는 실속파이다.

아주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문화예술을 즐기기 위해 작정을 하고 사전 정보를 입수하고 지식을 습득하고 하는 친구의 모습이 남달라 보였다. 노후를 위한 자신의 꿈은 미술관 자원봉사 전시해설사(도슨트)이며 이 분야는 많은 중장년의 뉴욕시민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전문자원봉사 분야로 상당히 경쟁이 치열하다고 한다. 일단 선정이 되면 자타가 공인하는 명예직으로 자신이 좋아하고 잘하는 재능을 살려 보람과 의미 있는 노후의 여가를 보내게 된다고 한다. 전문자원봉사해설사가 되기 위해 미술관을 직접 찾아 많은 작품을 접하기도 하지만 틈틈이 자료를 수집하여 관련 공부를 하고 있다고 하였다.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계획을 밝히는 친구의 말에 나도 자신의 노후의 삶과 보람되게 인생 후반을 보내는 것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된 순간이다.

 

아무튼 그 친구의 도움으로 맨해튼 곳곳에 산재된 수많은 갤러리와 공공미술관 및 시립미술관, 뮤지컬공연장과 셀럽들의 단골 식당으로 유명세를 탄 여러 레스토랑 탐방으로 나의 일정은 나날이 풍요로운 문화 탐방과 체험으로 채워졌다. 철저하게 실력으로 승부가 가려지는 곳, 다양한 이민족/이민자들로 가득한 세계 문화예술의 중심지, 맨해튼에서 몇 달을 보낸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로망이기도 하지만 예상보다 상당한 비용이 든다는 점에서 선뜻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뉴욕이나 뉴저지에 사는 현지인이라 하더라도 직장이 맨해튼에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주 2-3회씩 맨해튼 나들이를 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시간, 거리, 비용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그야말로 학습과 교육을 위해 주말에 일부러 시간을 내어 맨해튼 곳곳의 문화시설을 찾는 것이 일반적인 뉴욕 시민의 생활 패턴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나이의 중장년의 연배의 경우로 치면 뉴욕에 거주한다 하여도 이십년 아니 그 이상 맨해튼을 찾을 일이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물론 맨해튼의 고가의 아파트 거주민은 예외이다. 이들은 가벼운 티셔츠와 반바지차림으로 슬리퍼를 신고 맨해튼의 거리를 여유롭게 활보한다.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주차할 장소도 마땅치 않고 주차비도 비싸며 시도 때도 없이 교통이 막히는데다 맨해튼에 진입하는 승용차의 통행료가 20불인, 차 마시고 식사하는데 비용(맨해튼은 대부분의 식당의 봉사료도 거의 20%에 육박한다)을 감안한다면 맨해튼 나들이는 서울에서 우리가 명동 드나들 듯 쉽게 할 수 있는 일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일례로 개인차는 있겠지만, 뉴욕에 거주하는 친척오빠 부부에게 카네기 홀 연주회 초대티켓을 건네며 함께 맨해튼에서 식사도 하고 연주회에 가자고 권하니 이 나이에 그곳에 가서 뭐하냐며 반문하여 황당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 맨해튼을 나는 마치 뉴요커가 된 듯 거의 매일 친구와 때로는 혼자서 맨해튼의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온 종일 걸어(맨해튼은 자동차로는 도저히 이동할 수 없는 구조이다) 목과 발이 붓고 물집은 기본에, 허리는 물론 다리 근육에도 통증이 느껴졌다. 급기야 온몸 이곳저곳에 극심한 통증으로 현지에서 거금을 들여 특수 물리치료를 받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하루하루 새롭고 신기한 것을 알아가는 것에 대한 충만함은 많은 신체적 고통과 비용에도 불구하고 오랜 동안 누리지 못한 휴식을 한꺼번에 보상해 주었다. 나만의 맨해튼 즐기기로 모든 경비가 소진되어 쇼핑은커녕 흔히 귀국 신고의 의미로 주변에 돌리는 소소한 선물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평생에 잊을 수 없는 문화체험을 한 것에 대만족했다. 오랜만의 진정한 휴식이었으며 충분한 재충전의 시간이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