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울 수 있다면 앉지 않는다. 앉을 수 있다면 서 있지 않는다. 탈 것이 있으면 걷지 않는다. 직립보행을 할 수 있는 인간이면서도 오래, 게으름 삼종 세트로 지내는 중이었다. 그러다가도 간혹 마음이 내키면 물집이 잡힐 정도로 걸었다. 거의 안 먹다가 ‘폭식’하는 버릇처럼 걸음도 ‘폭보’를 했다. 어느 날, 꿈틀거리는 정도로만 움직이는 모양새가 걱정스러웠던지 딸아이가 휴대폰을 가져가더니 애플리케이션 하나를 깔아주었다. 만보기. 한걸음이 1원이 되고 만보를 걸으면 100원이 적립되는 거였다. 더 벌겠다고 이 만보를 걷는다 해도 200원이 되진 않으니 하루 만보가 최대 벌이인 셈. 한걸음씩 걸어 돈이 모이면 현금처럼 쓸 수 있다. 걷기만 하면 돈이 된다지만 어느 세월에 100원씩 모아 5000원짜리 커피 한 잔 사마실 수 있으랴 싶었는데 기적처럼 몇 달 지나 쿠폰으로 바꿀 수 있게 되었다. 커피 한 잔을 딸에게 선물했다. 뿌듯했다. 땅 파도 한 푼 안 나오는데 내가 걸어서 번 돈이니. 사실 걸음 숫자가 오십 보 백 보도 안 되는 날이면 12시가 되기 전에 밤 산책을 나갔다. 최소 삼천 보를 걸어 삼십 원이라도 벌어야 앱 깔아준 딸에게 ‘면’이 서는 느낌이었고 그런 날이면 정말 걸을 수 있는 튼튼한 다리를 가진 것에 감사했다.
서울은 걸을 데가 참으로 많아
오래 전 서울성곽길이 열려 북악산, 인왕산, 남산까지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며 숲길을 걸을 때 참으로 벅찼다. 겨울에는 차가운 바람과 눈을 밟으며 성곽 길을 걸었고 연두색 분홍색 신록의 꽃들이 오는 봄날에는 꽃향기를 마시며 걷곤 했다. 이어 북한산 둘레길이 열리고 그 숲길의 계곡에 사는 맑은 물고기를 만났고 찬물에 눈을 씻었다. 서울 시내에 걸을 데가 이렇게 많았다니. 인왕산 자락길, 안산 자락길을 천천히 걷고 내려와 전통시장 조그만 식당에 다다라 막걸리 한 잔을 마실 때나 뜨거운 국물을 먹을 때는 진심 서울 찬가를 부를 정도가 되었다. 서울, 서울, 서울 아름다운 이 거리, 사랑으로 남으리... 네버 포겟 서울... 같은 조용필 노래. 봄이면 봄으로, 겨울에는 겨울로 서울의 고고 샅샅. 걸을 수 있을 때까지 걸으리라, 마음을 다져먹었다.
“생산 지향적 문화에서 생각하는 것은 대개 아무것도 안 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아무것도 안 하기는 어렵다. 아무것도 안 하는 제일 좋은 방법은 뭔가를 하는 척하는 것이고 아무것도 안 하는 것에 가장 가까운 일은 걷는 것이다.” 레베카 솔닛의 <걷기의 역사> 첫머리에 나오는 글이다. 걷기나 산책, 여행에 대한 여러 이야기가 유장하게 펼쳐지는 이 책에는 이런 말도 있다.
“이상적인 걷기란 몸과 마음과 세상이 조화를 이룬 상태이다. 애써서 대화에 성공한 세 사람처럼. 불현 듯 화음을 이루는 세 음표처럼 삼위일체가 구현된 상태다. 걷기를 통해서 우리는 생각에 완전히 빠지지 않으면서 생각할 수 있다.”
서울 마포 연남동 좋아하세요? 아, 서점 구경 좋아하시잖아요? 같이 걸으실래요? 5월의 아침에 연락하나가 왔다. 오랜 후배에게서였다. 젊은 친구들에게 인기 있는 거리, 연남동 거기 세칭 연트럴파크라고 불리는 곳, 경의선 숲길로 걸어가 5개의 작은 서점을 방문하는 산책프로그램이라고 했다. 연남, 서점, 산책. 화음을 이루는 세 음표가 마침맞게 어울려 있었다.
마침 ‘정태춘 박은옥의 40 프로젝트 콘서트’에서 그들의 새 앨범 <사람들 2019> 속 새 노래 '연남, 봄날'을 들은 지 며칠 지나지 않은 날이었다. 정태춘은 '연남, 봄날'을 노래하면서 이 노래에 남다른 감정을 담았다고 말했다. 송파에서 40년을 살던 날을 접고 연남동으로 이사를 하면서 근래 힘들었던 일들을 지나 새 봄 기운을 느끼면서 새 출발을 하고 싶은 마음으로 만든 노래라는 거였다. 그 노래를 들으면서 봄날이 가기 전에 연남동을 걸어야지, 하던 찰나였으니, 금상첨화였다고나 할까.
연남의 봄날, 은방울처럼 햇살이 구른다
홍대입구 3번 출구로 나가 길을 건너 경의선 숲길 구간으로 들어서면서 첫 걸음을 내딛었다. ‘이 시대 새로운 살롱 문화를 리드하는 5점 5색 연남동 서점여행’은 오래 마포에서 살고 있다는 <마포만보> 가이드의 미소에서 시작됐다. 연두색 높은 나무들 사이로 간간이 이어지는 옛 경의선 철길을 따라, 얕게 흐르는 실개천을 따라 오후 2시에.
연남산책, 홍대입구에서 경의선숲길로 들어서서 5개의 서점으로 여행한다.
서울 용산을 시작으로 파주 문산 개성 평양 등을 거쳐 신의주로 향했던 경의선은 현재 도라산 역까지 이어져 있다. 원래는 지상으로 철길이 있었지만 현재 지하로 길이 들어가서 경의중앙선이 되었다. 지상에 있었던 효창공원에서 가좌까지 약 6,3km의 옛 철길이 현재 경의선숲길로 만들어졌다. 경의선 숲길은 지금 서울 빌딩의 숲 속에 난 작은 숲길이다. <마포만보> 조그만 깃발을 따라가면서 옛날, 옛날 은방울자매가 부른 노래 ‘마포종점’이 떠올랐다.
연남산책을 만들어 진행하는 마포만보
“밤 깊은 마포종점 갈 곳 없는 밤 전차, 비에 젖어 너도 섰고 갈 곳 없는 나도 섰다. 강 건너 영등포에 불빛만 아련한데 돌아오지 않는 사람 기다린들 무엇 하나. 첫사랑 떠나간 종점 마포는 서글퍼라. 저 멀리 당인리에 발전소도 잠든 밤, 하나둘씩 불을 끄고 깊어가는 마포종점...”
경의선 숲길을 꺾어 들어가는 골목길에 있는 작은 서점 ‘리스본’이 첫 번째였다. <리스본 행 야간열차>를 읽고 서점이름을 지었다는데 낮은 지붕 아래 서점 앞엔 두 개의 낮은 테이블이 놓여있었다. 극단적으로 밝은 오월 오후 2시의 햇살이 극단적으로 깊은 그림자를 드리운 테이블에서 젊은 친구들이 속삭이고 있었다. 리스본의 주인은 포르투라는 이름으로 다른 만남의 장소를 만들고 있다고 했다. 서울에서 포르투와 리스본을 꿈꿀 수 있게 했다.
첫 번째 서점 산책 리스본
골목길을 꺾어 돌아 만난 두 번째 집은 음악전문서점 '라이너 노트'. 초보자여도 기타를 배울 수 있고 재즈를 들을 수 있는 곳, 공연도 열리는 서점이다.
음악전문서점 라이너노트가 있는 연남동 골목길
한국의 모든 서점이 대형화하고 인터넷 서점이 한둘을 넘어서면서 편하게 들를 수 있던 동네 서점들이 한꺼번에 사라졌던 시절이 있었다. 크지 않으니 찾는 책을 다 갖출 수 없고 할인을 하지 않고 ‘굿즈’라는 명목의 선물도 없으니 고객이 먼저 사라졌고 그 많던 동네책방 주인들도 어디론가 떠나갔다. 대형서점은 카페가 되고 독자들은 아무렇게나 책을 읽을 수 있게 되고 망가진 책은 출판사로 반품되었다. 다행이라고 할까. 허망하게 사라졌던 다정한 서점들은 아주 천천히 저마다 특색 있게 구석구석 새 자리를 잡았다. 서점에서 차도 마시고 맥주 한 잔도 할 수 있고 작은 낭독회가 열리게 됐다.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가만히 행복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든 이들이 서점 주인들인데, 부디 오래 갈 수 있기를.
골목을 돌아 나올 때마다 맛있는 가게들이 저마다 빵 냄새를, 향기로운 기름 냄새를 풍겨주었다. ‘사이에’는 여행 전문서점이다. 입구에서부터 여행 책을 낸 작가들과 함께 떠나는 특별한 여행 프로그램 포스터가 붙어 있다.
여행서점 책방사이에. 여행에 관련한 모든 책과 모임이 열리는 곳
와인 읽어주는 남자 프랑스 와인 산책, 베네룩스 맥주 산책, 포틀랜드 킨포크 여행, 도시 탐독 소모임 같은 것들이 그야말로 여행으로 유혹한다. 신청하면 여행을 같이 떠나거나 서점 사이에 의자에 앉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여행서점답게 똑똑한 여행영어를 가르치는 프로그램도 있다. 하나같이 저만의 취향과 색깔로 만든 서점들은 헬로 인디북스에서 나름 정점을 찍는다. 헬로 인디북스는 책 한권 한권이 다 독립출판물을 파는 곳이어서 다른 서점에서는 찾을 수도 없는 책들이 꽂혀 있다.
취향에 맞게 찾아가는 책방
각 서점마다 방문객에게 블라인드 북을 선물로 주었는데 나는 헬로 인디북스에서 선물을 받았다. 무슨 책일까. 산책이 끝나고 열어보니 책은 <디어 마이 게스트>. 마포에서 게스트하우스를 열고 운영했던 엔조라는 사람의 책. 알고 보니 마포만보 연남 산책을 진행하고 가이드한 분이 쓰신 책이다. 반가움이 두 배.
서점을 산책하는 사람들이 받은 선물, 블라인드북이라 어떤 책일지 두근두근
산책의 끝은 마포 경의선 책거리를 쭉 걸어 나가 오른 언덕 위에 있는 책방 '연희'.
산책한 서점 중에 가장 큰 연희에서 미니 글쓰기 워크숍이 있었다. 마포만보 연남 산책을 한 사람들이 시원한 책방에 앉아 조용조용 이야기를 나눴다.
책방 연희, 책과 함께 노는 곳
만보기에는 7800의 숫자가 찍혀 있었다. 길을 다시 걸어 나가 연트럴 파크 잔디밭에 앉으니 만보에 가까워졌다. 오늘 하루 100원은 이미 벌었다. 봄날, 연남동의 해는 노랗게 내려앉았는데, 여기가 어딘가. 저기쯤에서 한 가수가 버스킹을 하고 있고 여기쯤에서 외국인들이 말하고 있고 여러 마리의 개들이 그림처럼 꾸미고 산책을 하고 있다. 오래 참았던 허기를 베트남 음식 반미로 채울 수 있었다. 봄날 저녁노을처럼 바게트 빵이 노랗게 바삭거렸다. 어쩌면 이 자리에서 정태춘은 노래를 만들었을 수도 있었겠다. 반미 마지막을 먹으면서 연남, 봄날을 틀고 가사를 열었더니, 오늘 걸은 연남동 산책과 아주 맞아떨어졌으니.
“그 언제부터 기다려왔나 이 새파란 봄날
거리엔 꽃비 흩날리고 카페마다 커피 향, 어디
멀리서 온 젊은 사람들 캐리어 경쾌한 바퀴 소리
철길 공원길엔 햇살이 말갛게 쏟아지네.“
<마포만보>는 마포에 살고 있는 사람과 모이는 사람을 잇는 마포마을여행플랫폼 구축사업단'이다. ‘만 걸음 속에 숨겨진 마포의 마을 만나기’로 여행프로그램을 운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