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책 읽기 모임이 핫하다. 독서 모임, 북클럽의 이름으로 카페에서 책방에서 삼삼오오 책을 읽는 모임이 성황을 이룬다. 포털 사이트에는 ‘동네책방’ 코너도 있다. 독서 모임을 전문으로 하는 기업도 있다. 소셜러닝그룹 '트레바리'는 최대 20여만 원의 비용을 지불해야 활동할 수 있는 유료 독서 모임이다. 그뿐 아니라 독후감을 쓰지 않으면 모임 참가가 아예 불가능하다. 이 불편하고 불친절한 트레바리 사용법에도 불구하고 젊은 친구들 사이에선 인기가 대단하다. 트레바리를 비롯, 크고 작은 요즘의 독서 모임은 책 읽기도 중요하지만 책을 읽는 사람과 함께하는 활동에 관심이 더 크다. 처음 보는 사람과도 책을 매개로 소통하는 것이다.
블로그에서 책 읽는 모임을 알게 되어 궁금하던 차에 갑자기 스케줄이 비어 성큼 서촌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오후 세 시, 서촌에서는 기분 좋은 느른함이 느껴진다.
갑작스럽게 찾게 되어 책도 준비 못 한 처지라 커피 한 잔 하며 슬쩍 귀동냥이나 해볼까 했는데 책 어쩌고 하니 넉넉한 주인은 당장 함께 하잔다.
이날 읽은 책은 『데미안』... 십대 시절에 만났던 헤르만 헤세의 작품이다. 함께 책 읽는 이들은 50대 여성들과 20대 후반의 여성, 모두 다섯 명이었다. 한 주에 두 챕터씩 읽는데 한 챕터를 읽고 잠시 쉬는 사이 여러 이야기가 오갔다. 도대체 이 책을 몇 년 만에 읽는지 모르겠다며 지나온 시간을 헤아리기도 하고, 오래전 이 책을 읽었을 때 감상을 나누던 친구가 생각난다는 반응도 있었다.
더불어 책에 얽힌 갖가지 추억도 쏟아져 나왔다. 삼중당 문고가 나오고, 친구들끼리 서로 주고받으며 읽었던 기억이며 보급판 세계문학전집도 등장한다. 집에 변변히 읽을 만한 책이 없었던 그 시절 얘기가 덤으로 쏟아져 나오며 맞아, 맞아, 그땐 그랬어~ 하고 추임새도 곁들여진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령 채널제도의 건지 섬은 독일군 점령 아래 있었다. 섬 주민들은 점령군에게 식량을 공급하느라 먹을 것이 늘 부족했던 데다 매일 가축을 비롯한 식량 상황을 보고해야 했다. 그런데 주민들 중 한 사람이 삼엄한 감시 아래서도 돼지 한 마리를 몰래 숨겨 두었다가 돼지구이 파티를 하게 되었다. 간만에 만찬을 하느라 통금을 넘겨 귀가하던 중 순찰하던 독일군에게 걸리자 한 아가씨가 기지를 발휘해 북클럽 모임 때문에 늦었다고 둘러대었다. 당장은 위기를 모면했지만 독일군 사령부에 보여주기 위해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거짓말로 시작된 북클럽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북클럽을 통해 읽은 책들이 건지 섬 사람들의 삶에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30년 넘게 바로 옆집에 살면서도 농사와 날씨 말고는 딱히 대화랄 것도 없이 지내던 이웃들이 북클럽을 통해 대화를 나누고 서로를 알게 되고 친밀해지고 전쟁의 공포 가운데서도 서로를 보듬고 살게 되었다.
“모임이 시작되었어요. 처음에는 사령관이 올 때를 대비한 것이었고, 그 후로는 우리가 즐거워서 모였답니다. 우리 중 누구도 문학회란 걸 경험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 나름의 규칙을 정했어요. 읽은 책에 대해 돌아가며 발표하기로 했지요. 시작할 때는 조용히 경청하고 객관성을 잃지 않으려 애썼지만, 곧 분위기가 바뀌고 발표자의 목적은 자기가 읽은 책을 다른 회원들도 읽고 싶게 부추기는 쪽으로 흘러갔어요. 한번은 두 명이 같은 책을 읽고 논쟁을 벌였는데 그러니까 굉장히 즐겁더라고요. 우리는 책을 읽고 책에 관해 이야기하고 책을 놓고 토론하면서 점점 더 가까워졌어요.”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81~82쪽)
“처음에는 문학회 같은 데 나갈 마음이 없었습니다. 농장 일이 무척 바쁘기도 하고, 실제 존재하지도 않은 사람들과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한 글을 읽는 데 시간을 허비하기도 싫었습니다. (중략) 그 시집을 읽은 후 저는 ‘시’라는 것에 뭔가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문학회에 참석하기 시작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참 다행입니다. 그러지 않았다면 제가 무슨 수로 윌리엄 워즈워스의 작품을 만났겠습니까? 아마 지금도 모르고 있을 테지요.” (같은 책, 111쪽~)
지난겨울 서대문 50+센터에서 주관한 독서 모임에 참여한 적이 있다. 철칙은 고맙게도 절대 미리 읽기 없기다. 모임 참석 전에 미리 읽고서 가야 하는 부담 때문에 책을 읽지 않으면 아예 모임을 빠져버리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다. 하지만 불참을 막는 그 이상의 효과도 있다. 그것은 설렘.
모임 시간에만 읽고 덮어두려니 다음 모임 때까지 읽고 싶은 것을 참기가 힘들었다. to be continued~ 라고 예고편을 날리고 총총히 사라지는 시리즈의 효과? 셰에라자드의 다음 날 이야기를 기다리는 아라비아 왕처럼 궁금한 뒷얘기를 참아야 할 인내심은 좀 필요하다. 하지만 그만큼 스토리를 쫓아가는 집중도는 높아지고, 반응도 신선하다. 그렇게 설레며 읽었던 책이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이었다.
독서(讀書)는 으레 독서(獨書)였다. 교과서가 아니라면 한 공간에서 같은 책을 같이 읽는 일이란 거의 없었던 듯하다. 사적인 공간이든, 오픈된 공간이든 책을 읽는 시간에는 오롯이 나와 책만 있었다. 그랬던 독서를 이젠 여럿이 함께 돌아가며 소리 내어 읽는 모임으로 만나게 되었다.
“애들 다 키우고 시간이 많을 줄 알았는데, 그렇다고 책을 읽게 되진 않더라고요.”
“겨우 시간 내서 책을 좀 볼까 하다가도 어느새 졸고 있고. 같이 읽으니 어쨌든 읽게 돼요.”
“오래전에 읽은 책이어도 다시 읽으니 좋네요. 예전의 느낌과도 사뭇 다르네요.“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었지만 함께 모여 책을 읽다 보니 친해지는 것 같아요.”
50+에게 독서 모임은 어떤 의미일까? 앞에서 얘기했던 서촌 독서 모임에서 만난 주부의 말에서 답을 얻었다.
“매주 마실 나와서 함께 책 읽고 차 마시고 얘기도 나누니 참 좋아요. 갈 데가 있으니 좋고 책을 읽으니 마음도 뿌듯하고 새롭게 친구를 사귀는 느낌이에요. 저번엔 책 읽기 전에 경복궁 나들이도 했지요.“
책과 더불어 함께 놀 친구 만들기, 독서 모임이 필요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