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창에 열심히 하, 까지만 치면 똑똑하게 자동 완성되는 말은 ‘열심히 하겠습니다’다. 열심히! 라는 말 뒤에는 열심히 하겠습니다, 열심히 합니다. 열심히 했습니다, 라는 미래형, 현재형, 과거형이 이어져야 자연스럽다. 열심히 하지, 까지 치면 ‘열심히 하지 않아서, 열심히 하지 않았다’는 말이 자동 완성되는데, 곧바로 후회한다, 라는 말이 이어질 것 같은 문장이다. 열심熱心, 뜨거운 마음. 심장이 뜨거워짐. 어떤 일에 생각과 정신과 의지를 모두 집중하는 일이란 뜻. 좋은 말이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평생을 열심히, 라는 부사로 이어진 말을 들으며 살아왔다. 열심히 공부해라. 열심히 사랑해라. 열심히 살아라. 그런데 이 여자, 사노 요코, 조용히 배짱 좋게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라는 말을 뱉는다. 열심히 하지 않았습니다, 도 아니고 열심히 하지 않겠습니다, 도 아닌, 그냥 현재형. 지금. 나는.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 사노 요코  2016>

 

사실 사노 요코, 이 작가만큼 부지런히(열심히) 산 사람도 적을 것이다. 겉으로만 봐도 그녀가 펴낸 책은 우리나라에 번역된 것만 쳐도 열권을 훌쩍 넘는다. 그림동화작가라는 그녀 정체성에 맞게 아이의 그림처럼 천진하고 톡톡톡 리듬이 살아 있는 글들로 유명한 그림 동화책은 <내 친구 모모>, <백만 번 산 고양이>, <아저씨 우산> <하늘을 나는 사자> 등인데 상도 많이 받았다. 그것뿐이 아니다. <사는 게 뭐라고> <죽는 게 뭐라고> <아니라고 말하는 게 뭐가 어때서> <문제가 있습니다> 같은 어른들의 이야기를 유쾌하게 써내 펴냈다. 책에 쓴 것을 보면 연애도 여러 번, 결혼도 두 번, 이혼도 두 번 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명실상부, 열심히 사는 여자의 표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라니. 사노 요코의 에세이들은 정녕 어디서도 읽어본 적 없는 시니컬하면서도 배 아프게 웃긴 것투성이다. 그 나이 즈음의 성공한데다 배운 여자라면 하지 않을, 절대 보이지 않을 생활 속의 자신의 쪼잔하고 비루한 모습을 그대로 써 놓아서, 읽다보면 왠지 세상 근심 걱정이 다 모래알처럼 작아지게 느껴진다. 하긴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의 부제도 ‘격하게 솔직한 사노 요코의 근심 소멸 에세이’다. 사노 요코는 나이 들어가고 암에 걸리고 혼자 살면서 자꾸만 기억을 잃어가고 기력을 잃어가는 자신과 또래의 친구들과 이웃 할머니들의 서글픈 몸짓을 천연덕스럽게 관찰하고 기록한다. 읽기로는 슬픈 내용인데, 웃음이 솟아나는 기이한 문장이어서 내 속의 불안과 걱정이 가뭇없이 사라진다. 단언컨대 사노 요코의 책을 읽으면서 눈물 콱 쏟아보지 않거나, 깔깔 웃어대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는 게 뭐라고> <죽는 게 뭐라고>  표지. 한 여자가 나름 열심히 살다가 암 선고를 받고 나이 듦을 통과하면서 살아내는 시간,
죽어가는 시간 속에 촘촘히, 또는 성글게 무늬를 만들어내는 일상을 배꼽 빠지게, 써냈다. 암 걸린 여자이야기가 이리도 명랑할 수 있다니!
 

 

내가 지금부터 유념할 것은, 물욕을 갖지 않는 것이다

이를 테면 사노 요코는 손가락 사이로 흩어지는 세월을 바라보면서 자꾸 아픈 몸을 남의 것처럼 바라보면서 이런 할머니가 되겠다고 꿈꾸는 여자다.

 

어떤 할머니가 되고 싶냐고? 그런 질문은 넌센스다. 이미 거의 할매가 된 사람한텐 말이다. 사람은 어느 날 갑자기 할머니가 되는 게 아니라, 스물 네 살의 자만에 찬 젊은 시절부터 이미 서서히 할머니가 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아니 다섯 살 여자아이도 보고 있으면 팔십 먹은 그 아이의 영락한 말로가 비쳐 보인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 사람이 아닌 다른 할머니는 될 수 없다는 거다. 나는 나인 채로 할머니가 되는 거다.

 

어려서는 부모의 안색을 살피고-꽤나 말을 안 듣는 아이였지만, 결혼하고 나서는 상대의 기분에 맞추고-별로 맞추지 않았지만, 애 낳고는 머리 가꿀 새도 없이 어머니 노릇을 하고-그랬다고 아이가 수재가 되는 건 아니었지만, 여하튼 세상 사람들에게 어떻게든 맞추려고 노력해 왔다. 몇 십 년이나. 이제 나도 할 만큼 했으니 아이가 성인이 되면, 평생에 딱 한 번만 나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겠다. 더 이상 아들을 얼씬도 못하게 할 거다. 며느리가 어떤 삐딱이 인들 알 게 뭐냐. 네가 고른 사람이잖아. 잘됐구나. 앗, 손자가 끈적끈적한 손으로 와서 엉기는 건 싫어. 다리, 허리가 잘 작동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화려한 스포츠카를 타고, 추우면 안 되니까 솜 넣은 저고리에 아래는 몸빼를 입고, 롯본기의 영화관 시네뷔봥으로 영화를 보러 가겠다. 할 수 있으면, 비척거리는 보이프렌드와 손을 잡고 카페오레를 마시면서 그 여배우 미스캐스팅이라고 생각 안 해요? 도대체가 가슴이 너무 커요 라고 묻는다. 아니, 나는 제법 괜찮은 여배우라고 생각하는데. 흐음. 그 가슴이 좋아요? 아, 알았어요. 하고 사랑싸움도 훌륭하게 해 주자.

 

내 그림에 대한주문도 없어졌을 테니, 서툰 그림이지만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만 내 맘대로 그리고, 마음 내키면 SF 소설도 쓸 거다. SF는 과학적 지식이 필요해서 어려울 것 같으면 살인물이라도 써서 죽이고 싶은 사람을 차례차례 등장시켜 닥치는 대로 산산조각을 내주는 거다. 나이 먹으면 먹을 것에 비정상적으로 집착하게 된다고 하니, 하루가 걸리더라도 감자죽을 만들어 후우 후우 먹겠다. 돈이 없을 게 분명하니 미식은 몸에 좋지 않다고 나 자신을 설득하면서, 입이 험한 것은 나의 숙달된 무기니까 험한 입으로 저 할망구 예쁜 데가 없어. 하고 젊은 녀석들이 나를 싫어하게 만들 거다. 이런 것을 일러 깊은 배려심이라고 하는 거다. 내가 죽으면 아, 좀 더 따뜻하게 대해 줬으면 좋았을 걸, 하고 주위 사람들이 마음 아파하지 않게 말이다, 그 할매 비참하게 죽었지만 자업자득이야, 하고 말할 수 있게 해주는 거다. 하지만 그 전에 노망이 들면 어떠한 결의도 계획도 물거품, 유효하지 않다. 그래서 딱 하나 내가 지금부터 유념할 것은, 물욕을 갖지 않는 것이다. 죽은 사람이 남기는 것은 그것이 아주 적은 돈이든, 사소한 일용품이든 처리하기가 성가시다. 내가 죽으면 동시에 내 주변의 모든 것이 작은 종잇장 하나, 팬티 하나 남기지 않고 ‘슈욱’ 하고 땅 속으로 빨려들어가 사라진다면 조옿겠다‘ 하고 생각한다. -슈욱 사라진다 중에서

 

 

   

사노 요코의 혼밥상.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사는 날들을 엄살 없이 궁상 없이 잘 꾸려나간다.

 

 

이불은 내 평생의 반려입니다

사노 요코는 <사는 게 뭐라고>에서 고백하기를 암에 걸려 병원에 입원해 있던 나날들 중에 한류드라마에 빠져 살았다고 한다. <겨울 연가>에서 시작해 <가을 동화> <호텔리어> <올인> 등 수십 개의 한국드라마 DVD를 병원침대에 쌓아놓고 눈만 뜨면 봤다는 것. 이후 병원에선 암 수술 후 새로운 병 진단을 내렸다. 하도 같은 자세로 텔레비전에 집중하는 바람에 턱이 완전히 삐뚤어져버렸다는 것. 이 여자는 이런 할머니인 것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여느 어른들처럼 벌떡 일어나 씻고 정리하고 일하는 게 아니라 늦게 눈을 뜨고 발가락으로 커튼을 젖혀 보고 이내 이불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이다. 한 협객이 평생의 아군으로 자신의 칼을 꼽을 때, 나한테는 이불이라고 하는 평생의 아군이 있다고 주장하는 유쾌한 할머니다.

이불만 있으면 빈곤이니, 실연이니 따위에 슬프지 않을 수 있었단다. 행여 슬픔을 느낄 때면 서둘러 벽장의 이불을 끌어내리고 그 속에 파고 들어가 그 따스함 속에 마음을 맡길 수가 있었다며 스무 살 일기에 ‘이불만이 내 편이다’라고 쓴 여자다.

 

이불만 있으면 나는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거지가 되어도 이불만큼은 등에 지고 나가자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몇 십 년이나 살았다. 몇 십 년의 단 하루도 이불 속으로 파고들지 않은 날은 없다. 나는 진통이 덥쳐 오기 직전에도 부지런히 솜을 타서 흰색과 핑크의 깅엄 체크 이불 홑청을 꿰매고 있었다. 가벼운 나일론 이불이 나와도 나는 이불은 목화솜이라고 믿었기에, 우리 집에 자러 오는 친구의 아이들은 ‘이제 자러 안 가. 무거워서 피곤해’ 하고 불평했다.

나는 견디기 힘든 일이 있으면 언제나 이불 속에 들어가 몸을 둥글게 말았다.

 

 

아아, 인류여, 남자여, 여자여, 어쩌면 이렇게 부지런하고 성실한가.

아무튼, 물론 부지런히,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세상을 이루고 굴러가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게으른 사람이 옳다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그 우화는 어떤가. 해변 그늘에서 고기 몇 마리 잡아놓고 시원한 바람에 몸을 맡기고 쉬고 있는 어부를 비웃는 현대의 사장님 이야기 말이다. 더 열심히 일해서 고기를 많이 잡고 열심히 팔아서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하지 않겠냐는 것. 그러나 결국 그 사장이 열심히, 열심히 살고 난 후에 와서 해야 할 한 가지가 어부처럼 해변 가에서 편안히 쉬는 것이라는 그 이야기. 사노 요코는 말한다. 반드시 몇 시에 무슨 일을 해내어야 하고, 몇 십 가지의 밥상을 차려야 하고, 수십 장의 서류를 똑바로 정리하지 않으면 견대지 못하는 이들에게. “나는 타인의 부지런함과 성실함 때문에 멍해지고 만다. 생활이란 종잡을 수 없는 것이거늘, 그 종잡을 수 없는 것 속에 사람들은 각각 자신의 잣대로 자신을 재면서 거의 대부분 병처럼 자신의 스타일을 고집하려고 한다. 남이 관리하지 않아도 스스로 자신을 관리한다.”고. 너무 열심히 하는 것 아니냐고. 나는 당신들보다는 ‘열심히 하지 않는다’고. 사실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를 읽는 것은 <큰 스님의 마음공부>를 읽는 것과 비슷한 아주 편안한 깨달음을 얻는 일이기도 했다.

 

나는 식당 테이블에 멍청히 앉아서 두 시간이든, 세 시간이든 집 앞의 참억새를 바라보곤 한다. 눈썹을 움직이는 것조차 귀찮다. 지진이 와도 도망치지 않을 거야 하고 생각한다. 장식장 안의 정리해야 할 물건들이 생각나지만 그것들을 직각으로 정리해 놓는다한들 내 마음이 정리되는 것도 아닌데 하면 그냥 둔다. 일은 마감 전에 완성하고, 약속 시간은 지키고, 더러워진 것은 잽싸게 빨아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다가 지칠 대로 지쳐 기진맥진해서 죽는 것이 인간의 삶인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신주쿠의 노숙자 아저씨가 부럽다고 말하거나, 혹은 남쪽 섬에서 하루 온종일 태양과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슬쩍 손을 올려 파파야를 따먹고, 그렇게 늙어서 평생을 마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좋지 않나, 하고 생각하는 것도, 영차, 영차 부지런하게 살아야만 하는 문화국가의 인간이기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닌가. 오타케씨, 전기밥솥 5시 반에 스위치 눌렀나요?

사토 군, 아내의 팬티 둥글게 말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