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양말 한 쌍 같다는 에버렛과 모드 커플의 전사前史
에버렛 루이스(에단 호크), 그 남자의 사정: 우리가 낡은 양말 한 쌍이라면 나는 하얀 면양말. 애초에 손바닥만 한 작은 집에서 살림이랄 것도 없이 혼자 사는 궁색한 남자가 동네에서 제일 큰 만물상회에 찾아가 느닷없이 화를 내고 땅땅 카운터를 치면서 '가정부'를 구한다며 메모를 붙일 때, 짐작했다. 저 남자, 엄청 외롭구나. 너무 외롭고 괴팍해서 자기가 얼마나 외로운지도 못됐는지도 모르는구나. 가정부를 구한 후에 지불해야 할 돈의 액수가 문제가 아니겠구나. 그리고 결핍 투성이 이 남자, 세상이나 사람에 적응을 엄청 못하는, 요샛말로 '열폭남' 이겠구나 생각했다. 왜냐하면 현재 ‘가정부’를 구한다는 명목 하에 ‘여자’찾고 있는 게 본심이기 때문이다. 사실 온전한 사람이라면 그 자신이 가난하고 나이가 들었을지언정 명백한 홀몸이니 합법적으로 아내가 될 사람을 수소문하거나 조심스레 만나서 연애하고 결혼하면 될 터이다. 그런데 그는 굳이 자신과 여자의 존재가치를 본래 가진 것에서 삼분의 일 정도 뚝 잘라내 버린 후에 ‘가정부이자 여자이자 아내’를 구하고 있는 셈이다. 저런 행태가 살림살이랄 것도 없는 작은 집에, 자기 한 몸도 건사하지 못하면서, 충동적으로 화를 벌컥벌컥 내는 남자의 뼈에 사무치는 열등감 폭발이지 다른 무엇이 있겠는가, 말이다. 사실 그는 메모지를 붙이면서도 어느 여자가 가정부로 오기나 할까, 반신반의했을 것이다. 나를 보살펴줄 사람, 도와줄 사람, 사랑할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언감생심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한 간절함으로 누군가 자기를 찾아오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는 아직 사랑을 받아본 적도, 주어본 적도 없는 외롭고 화난 고아소년에 머물러 있을 뿐.
모드 루이스(샐리 호킨스), 그녀의 사정: 우리가 낡은 양말 한 쌍이라면 나는 감청색이나 카나리아 색 양말:
어려서부터 류마티스 성 관절염을 앓았고 현재 턱도 자유롭지 않은데, 친척집에 얹혀서 살고 있다. 전혀 그녀의 존재를 달가워하지 않는 공간에 짐처럼 버려진 듯, 붙잡힌 듯 옴짝달싹할 수 없는 처지다. 다리가 뒤틀리고 턱이 자유롭지 않아도 그녀의 정신은 자유롭고 독립적이어서 온전히 스스로 편안할 수 있는 집을, 어머니가 살던 옛 집으로 가고 싶어한다. 그 곳으로 어서 가서 마음대로 그림도 그리고 편하게 눕게 되기를 앙망하지만, 야속한 남동생은 약삭빠르게 모든 것을 팔아서 저 혼자 처리했다. 모드를 둘러싼 환경도 열악하기는 에버렛과 마찬가지. 사랑해주는 이도 사랑받을 상황도 아니지만 다른 것은 단 하나. 에버렛과 달리 모드는 스스로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녀는 숨 막히는 남의 집을, 어서 떠나고 싶다. 돈을 벌고 싶고 독립해서 살고 싶다. 그녀는 저돌적인 용기를 갖고 있고 웬만한 모욕이나 거친 말도 모르는 척 넘길 수 있는 단단한 마음도 가졌다. 보기엔 흔들리는 몸을 가진 빼빼마른 여자지만 낙관적인 편인데다 유머 감각도 상당하다. 만물상회에서 가정부를 구하는 에버렛을 보자마자, 그녀는 결심한다. 다 해져 기운 옷을 입고 소리를 지르는 에버렛을 보고 놀랐을지언정 어쩌면 처음 본 순간부터 맘에 들었을 수도 있다. 그녀는 단숨에 가정부를 구하는 에버렛의 메모를 떼어내 주머니에 넣는다. 그 곳으로 갈 거야, 다짐한다. 도무지 만나지지 않을 것 같은 두 사람은, 이렇게 만나게 된다. 가장 불필요한 이유를 제일 앞자리에 둔 우연한 모습으로. 당신은 내가 필요해, 서로 잘못 짚으면서.
로맨스 영화? 멜로드라마? 아니 스릴러 혹은 인생극장
어떻게 사람들은 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아름다운 로맨스라고 하는 걸까. 왜 서로를 물들이고 따스하게 만들어주는 따스한 멜로드라마라고 할까. 제목이 서정적이게도 <내 사랑>으로 붙여졌기 때문일 것이다. 원제는 그저, 온전히 ‘모드’라는 한 여자의 이름일 뿐이다. 몸이 아프고 가난한 한 여자가 한 남자의 집에서 그림을 그리며 살다 세상을 떠난 그 한줄기로 이야기를 따라가야 죽기 바로 전 그녀가‘난 사랑받았어요.’라는 말의 엔딩을 이해할 수 있다. 아무튼 친척집을 떠나 불편한 다리로 가정부를 찾고 있는 성질 고약한 남자 집을 찾아가는 모습은 처연하다. 모드가 맞닥뜨린 첫 구직인터뷰는 거칠고 민망하고 슬프다. 남자는 여자를 쓱 훑어보고 ‘난 여자를 찾고 있다’고 무례하게 대답한다. 당신은 장애인이지 여자도 아니라는 뜻이다. 남자의 집은 한 눈에도 남루하고 가난한 창고 같은 작은 집. 옹색한 살림살이에 가정부라니, 당치도 않을 집에서 서툴고 느릿한 움직임으로 일하겠다는 결정과 몸짓은 로맨스나 멜로는커녕 세상 끝에서 더 이상 물러날 데가 없는 사람들의 잔혹한 몸부림으로 보여 불편하기 그지없다. 태어나서 그 나이, 그 상황이 되기까지 사랑을 주거나 받아본 적이 없는 두 사람의 절박한 동거는 조마조마하게 불안하다. 모드를 볼 때마다 퉁퉁거리며 면박을 주거나 얼굴을 찌푸리며 소리 지르는 에버렛도, 구박과 박대를 짐짓 웃으면서 받아치는 모드도 가엾고 애잔하다. 거의 똑같이 가난하지만 남자는 갑인 고용주, 여자는 을인 가정부다. 남자의 작은 집은 누구의 눈에도 허름하기 그지없지만 남자 자신에게는 고아원에서 독립해서 죽어라 일해서 번 모든 돈이 들어간 금쪽같은 자신의 공간이다.
살풍경한 당신의 집에, 내가 그림을 그려줄게
그는 말끝마다, 내 집, 내 책상, 내 의자, 내 개, 내 닭이라고 소리친다. 그 뿐이랴. 내 것을 함부로 할 수 없도록 서열을 매긴다. 너, 가정부인 너는 우리 집 서열 중 제일 꼴찌야. 첫 번째는 나, 그 다음은 개, 그 다음은 닭, 그 다음이 너라고 쥐어박는 말을 무시로 내뱉는다. 그런데도 모드는 가정부(housemaid)로 왔으면서 가정부인(housewife)이 된 것처럼 슬쩍 이 끔찍한 상황을 모른 척 한다. 밥을 짓고 스프를 끓여 밥상을 차린다. 정말 저 남자를 좋아하나봐, 아슬아슬한 찰나, 급기야 일이 터진다. 뭐 하러 가정부를 얻었냐고, 그냥 마누라 하면 되지 않느냐고 허물없이 놀리는 이웃 친구의 말을 듣고 모드가 짐짓 사실인 것처럼 순진하게 웃어댈 때다. 저 못난 여자가 어떻게 내 아내일 수 있겠냐는 듯 부끄럽게 웃고 있는 모드의 얼굴을, 에버렛은 그냥 스트레이트 훅을 날려버린다. 그녀의 턱이 확 돌아갈 만큼. 마른 몸이 나가 떨어져 넘어질 만큼. 에버렛의 분노는 거칠고 뜨겁다. 나는 가정부를 구했을 뿐이라는 일종의 자존심, 아무리 여자가 필요할지언정 다리가 뒤틀려 이상하게 걷는 저런 여자를 아내로 삼지는 않을 거라는 알량한 자부심의 폭발은, 잔혹해서 서늘하다. 무서워라. 저 작은 집에서 저렇게 맞고 잘 곳도 없는 데서 일하고 살겠다니, 가엾어라. 모드. 모드의 뒤틀린 목과 다리보다 더 꼬인 에버렛의 열등감과 폭력성도 가엾긴 마찬가지. 영화는 도대체 로맨스 스토리의 한구석도 보여주지 않는다. 일을 마친 모드가 ‘나는 어디서 자느냐’고 물을 때 에버렛이 비좁은 자기의 침대 옆을 가리킬 때는 으슬으슬 무서울 정도다. 공포영화다, 싶은데 두 사람은 어쨌든 같이 자면서 이야기를 나눈다. 고아원에서 자란 에버렛의 쓸쓸한 기억, 아기를 낳았으나 뺏겨버린 모드의 기억. 한 침대에 누워도 두 사람은 서로의 몸에 새겨진 슬픈 기억 때문에 몸을 섞지도 못한다. 이건 진짜 ‘트루 스토리’저 사람들의 인간극장일 뿐이야, 마음을 다잡을 무렵 천만다행으로 천천히 두 사람이 손톱만큼씩 가까워진다. 현실이 너무 살벌해서 슬픈 와중에. 긴장이 조금 풀리는 순간은 모드가 살풍경하기 그지없는 남자의 집안에, 그릇에, 창문에 그림을 그려 넣기 시작하면서부터. 돌연 집은 색깔을 입고 찌푸린 남자의 얼굴에도 가끔 미소가 생겨난다. 진짜 꽃이 피고 새가 난다.
>>>>> 낡은 양말 한 쌍 같은 에버렛과 모드의 으스스한 사랑이야기는 2편으로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