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이 ‘겁나’ 많은 편이다. 귀신이나 유령이란 것은 만나기도 전에 글자 자체가 무서웠다. 그런데도 어렸을 때 흑백텔레비전에서 해주는 <전설의 고향> 같은 것은 꼬박꼬박 시청했다. 온 가족이 다 보고 있으니 그랬겠지만 납량특집 운운 하는 서늘한 푸른 빛이 화면에 나오는 여름밤은 그래서 덥지 않았다. 화면 속에서 촛불만 꺼지고 바람만 불어도 오금이 저리고 뒤통수가 서늘했다. 소리는 얼마나 질러댔는지. 신기한 것은 그 시절 흑백화면인데도 소복을 입은 귀신의 풀어헤친 긴 머리는 새까맣게, 하얀 옷은 새하얗게, 그리고 입가에 흘러내리는 피는 새빨갛게 보였다는 것. 상상은 겁보다 힘이 셌다고나 할까. 아니면 가진 겁에 더해 더 겁나고 싶어서 총천연색을 마음으로 불러들였는지도 모르겠다. 더 황당했던 기억은 ‘구미호’를 보다가 무서움에 질려 혼절했던 밤이었는데 그 이튿날, 꺼진 회색빛의 텔레비전 앞조차 지나가지 못했다는 사실. 금방이라도 그 안에서 하얀 손이 쑥 나와 잡아챌 것 같았다. 간이 쫄깃해질 만큼 겁나는 이 상상이 훗날 세월이 흐른 후 일본 영화 <링>에서 실현되어 나왔을 때, 정녕 얼마나 놀랐던지. <링>이 상영되는 어둑한 극장에서 스크린을 찢고 영화 속 텔레비전에서 ‘사다코’가 기어 나오는 장면에서 심장마비로 죽지 않은 것은 어쩌면 기적이다.

 

 

한강 선상 나이트, 장르문학 부흥회의 밤, 유람선 아라호 3층 전경

  

 

북스피어, 무서운 책들의 성전: 재미가 없으면 의미도 없다

아무튼 귀신 영화, 호러영화, 미스터리, 추리소설 같은, 무서운 것들을 즐기는 편이 못되는 성격이었다. 책마저도 표지에 무서울 것 같은 징조만 보여도 집어 들지 못했던 천하의 겁보(요새는 쫄보라고 하던데)가 ‘제 4회 장르문학 부흥회’라는 이름의 행사랄까, 북파티랄까 하는 곳에 당당하게 참가신청을 했다. 그 동안 나이가 들어 그나마 공포영화 몇 개는 소리를 지를지언정 볼 수 있게 되었고 살점이 튀고 피가 뚝뚝 떨어지는 스릴러, 미스터리, 좀비 이야기도 심장을 부여잡고라도 볼 수 있게 되었으니, 여럿이서 모이는 행사에서는 귀신을 만나더라도 즐길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아시다시피 장르문학 부흥회를 주최한 출판사 북스피어는 영어로 BOOKSFEAR. 소위 무서운 책들을 펴내는 곳이다. 모토를 "재미가 없으면 의미도 없다"로 정한 장르문학 전문 출판사다. SF, 무협, 판타지, 추리, 호러, 로맨스 등 독자들의 흥미를 끄는, 재미있고 신기한 소재의 책들을 만드는 북스피어는 ‘아아, 사람들아. 책 좀 사라.’는 글이 새겨진 머그컵으로 유명하다.

 

북스피어의 도서목록을 볼작시면 <화차>로 유명한 미야베 미유키 소설들은 미야베 월드라는 이름으로 <사라진 왕국의 성> <혼자 남겨져> <불문률>이 줄이어 나오고 있고, 세이초 월드에는 마쓰모토 세이초의 <짐승의 길> <미스터리의 계보> 등이 이어진다. 영미 미스터리, 일본 미스터리, 국내미스터리까지,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는 장르문학도서가 즐비하다. 일전엔 세월호 민간잠수사 김관홍의 이야기를 쓴 김탁환의 <거짓말이다>가 나왔는가하면 며칠 전엔 선물처럼 만나게 된 소설 속 인물과의 만남과 이별을 쓴 <그래서 그는 바다로 갔다>를 펴냈다.

 

‘마포 김사장’으로 더 알려진 김홍민 대표는 이전부터 독자와 함께 하는 독자교정파티, 출간비용 마련을 위한 ‘독자 북펀딩’을 벌이고, 출판편집부에서 자체 제작한 장르문학 소식지 ‘르 지라시Le Zirasi’를 간행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 사이사이 폐교나 도서관에서 밤을 새워 책을 읽고 이야기하는 장르문학 부흥회 등을 열면서 장르문학에 열광하는 수많은 독자들과 같이 ‘일’하고 ‘놀고’ ‘만났다.’ 심지어 김홍민 사장은 스스로 <재미가 없으면 의미도 없다>는 책까지 써서 출간한 사람이다. 그러니, 얼마나 이 행사가 재미있을 것인가. 한강에 가서 배를 타기도 전에 기대가 차올랐다.

 

 


출판사가 주최한 장르문학 부흥회 한강 선상 나이트 포스터. 한강에서 아라호를 타고 하룻밤 내내 진행한 일종의 북 토크쇼  l

아아 사람들아 책 좀 사라, 라고 새겨진 머그컵(출처 : 북스피어 페이스북)

 

 

한강 몽땅 여름축제 2017 '한강이 피서지다'

처음 들어봤다. 한강 몽땅 여름 축제. Hangang Summer Festival. 2017년 축제는 7월 21일부터 8월 20일까지 31일 동안 열린다. 시원 한강, 감동 한강, 함께 한강이라는 이름으로, 서울을 가로지르는 한강 주변에서 수많은 행사가, 놀이가, 공연이 펼쳐진다. 일인당 4만원을 내고 신청한 북스피어출판사의 장르문학 부흥회도 한강 몽땅 여름축제의 한 가지다. 선착순 150명에 들기 위해 서둘러 신청하고 입금한 후 미처 못 읽은 미야베 미유키의 책들을 읽었다. 행사는 이러하다고 공지사항이 떴다. 한강 강바람을 맞으며 여러 개의 한강다리를 건너가는 유람선에서 아, 강의를 알차게 들어야 하는, 공부도 해야 하는 모양이었다. 귀신이 출몰하지는 않으려나 보았다.

 

 

대망의 장르문학부흥회-한강선상나이트 간단정리!

1) 우주 최강의 귀여운 멤바들(장강명, 김탁환, 박상준, 김홍민)과

2) 통째로 빌린 한강 아라호 유람선에서

3) 8월 4일(금) 밤부터 5일(토) 새벽까지 올나잇

4) 스케줄을 볼짝시면,

    출항_본격선상추리게임:단서를 찾아라

    제1강_박상준(교양필수 SF 두 시간 완성)

    제2강_요조(공연+책방 무사 이야기)

    제3강_김탁환(내 사람의 비밀)

    제4강_장강명(사고실험으로서의 장르문학 구분법)

5) 참가비는 4만원, 북스피어 홈페이지에서 신청.(http://www.booksfear.com)

 

 

약간의 긴장과 불안을 장착한 채 유람선 아라호를 타기 위해 폭염이 들끓는 한강에 도착했다. 승선 시간은 9시 50분. 여의나루역 근처에는 서울 사람이 다 나왔나 싶을 만큼 차와 사람들로 흥청거렸다. 야시장이, 음식냄새가, 사람들 소리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배달 음식을 주문해놓고 기다리는 천막에는 피자와 치킨이 도착하고 길가에 만들어놓은 작은 계곡에는 어른과 아이들이 첨벙첨벙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가족과 연인, 친구들이 끼리끼리 모여 여름밤 속에 흩어지고 모이고 있었다.

 

승선 후부터 아라호 연회장은 뭔가 지체되었다. 유연하게 잘 굴러가지는 않는 느낌, 음향상태도 스크린 상태도 원활하지 않았다. 하루 종일 일하고 공부하고 나름 놀겠다고 따라온 동행자들이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아니 유람선이 떠나지 않으니, 게다가 본격선상추리게임을 해보겠다고 마음을 다져먹고 왔는데, 진행도 없고 배가 떠나지 않으니 긴장도 설렘도 다 사라진 모양인지, 내처 잠이 들고야 말았다. 아. 이것도 행사의 일환인가. 이러다가 뭔가 꽝 하고 터지는 것일까, 싶을 즈음. 청천의 벼락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원래 유람선 아라호는 10시에는 운행하는 시간이 아니라했고, 조율이 어긋난 탓에 유람선을 띄워줄 선장님이 퇴근을 하셨다고 했다. 세상에. 이거 추리소설 서두 아냐. 사람들은 웅성거렸다. 선장이 오기를 기다리며 바로 1강으로 들어갔다. ‘출항_본격선상추리게임:단서를 찾아라’라는 차례는 그냥 사라졌다.

 

 유람선 아라호 3층에서 바라본 서울 한강 여의도의 밤풍경. 꿈 속 같다.

 

이 나라에 이토록 신실한 장르문학 애호가들이 있었던가. 밤 10시가 넘은 시간, 출항하지 않은 정박한 배 안 강의실 자리에 앉은 150명은 얌전히 앉아 모두 박상준의 SF 강의에 몰두했다. 드디어 아라호가 한강을 가로질러 떠난다고 했다. 갑판으로, 2층으로, 마침내 3층 꼭대기로 올라갔다. 반달을 넘은 여름밤 달이 여의도 높은 빌딩들 사이로 빛나고, 노란 등을 밝힌 테이블에는 꽃들이 피어나고 커피와 샌드위치와 김밥, 과자가 쌓여 있었다.

 

머리 위로 한강의 다리들이 커다란 하늘처럼 떠있다 사라졌다. 작가들이 웨이터로 변신해 반짝이 조끼를 입고 음료들을 서빙했다. 깊은 밤으로 나아가는 밤배로 언뜻 강바람이 건너왔다. 서울이, 한강이, 참 예쁘구나, 탄복했다. 김탁환의 선물 같이 주어진 책 속 등장인물 이야기, 장강명의 소설가가 살아가는 이야기도 탄탄하게 이어졌다.

 

밤이 이윽해지다가 새벽이 왔고, 마지막 강의는 5시가 넘어서야 끝났다. 내 동행자들은 새벽 3시가 넘자 3층 소파에 가서 장렬히 완전한 잠의 세계로 떠나갔다.

오로지 나만 일종의 ‘노익장’을 과시하듯 끝까지 남아서 모든 강의를 듣고 퀴즈대회에도 참가했다.

 

 

 

우리는 이제 오늘부터 서로를 가장 행복하게 가끔은 가장 불행하게도 만드는 사람

 

참가자들의 태도는 새벽까지 너무 진지하고 열정적이어서 놀라웠다. 진정한 장르문학 ‘덕후’들이었다. 나는 하나도, 전혀 모르겠는 모든 작가들의 이름과 작품을 모조리 꿰뚫고 있었다. 퀴즈대회에서 첫 문제에서 탈락해보기는 처음이었다. 그들이 척척 맞추는 퀴즈를 들으면서 망연히 르 지라시만 읽었다.

아무려나. 선상 나이트에서 가장 좋았던 것은 뭐니 뭐니 해도 가수이자 책방 주인 요조의 노래와 이야기 시간이었다. 요조. <인간실격> 주인공 이름을 노래하는 자신의 이름으로 붙였다는 그녀는 한밤중에 배안에서 들을 수 있는 가장 깊은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노래 불렀는데, 제목은 ‘그런 사람’이었다. 친구의 결혼을 축하해주려고 만들었다는 노래 가사는 이랬다.

 

 

우리는 이제 오늘부터

아침에 제일 먼저 보는 사람

자기 전에 절박하게 찾게 되는 사람

 

우리는 이제 오늘부터 영원을 얘기하는 사람

갑자기 비가 내려도 필요한 우산은 하나

우리는 이제 그런 사람

우리는 이제 오늘부터 서로를 가장 행복하게

가끔은 가장 불행하게도 만드는 사람

우리는 이제 오늘부터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늘 함께 이겨내든지 늘 함께 질 거라오.

 

가수이자 책방주인 요조가  '그런 사람'을 부르고 있다.  새벽 두시 쯤.

 

 

제 4회 장르문학 부흥회, 한강선상나이트는 ‘선장이 퇴근해서 출항할 수 없다’는 믿지 못할 만큼 황당한 소식으로 시작했다면, 새벽 5시 30분 쯤 아직 동터오지 않은 한강의 밤의 끝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이 노래를 부르기 전, 요조가 한 말이었다. “결혼을 축하해 주려고 만든 노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이 헤어졌어요.” 모든 일들이 계획대로만 된다면, 생각한 대로만 이뤄진다면 우리 삶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이 밤이야말로 명실상부 미스터리하고 SF적이고 호러블한 장르문학 출판사의 이벤트답지 않은가. 장르문학 부흥회는 앞으로도 쭉 열릴 거라고 한다. 시골 폐교, 밤의 도서관, 유람선을 넘어 그 어딘가에서. 그 어느 날 문득. 예를 들어 무인도 같은 곳.

 

 

 

사진: 권혁란, 원병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