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영화 읽기

다가오는 것들 Things To Come’ #2

 

 

- 영화읽기 '다가오는 것들 Things To Come' #1에서 계속 - 

 

 

모든 것이 떠난 후, 세 번의 깊은 통곡, 그러나 ‘물 위에서 노래함’

포스터에 나온 풍경처럼 기차 타고 자신의 집으로 찾아온 나탈리와 다정하게 인사하는 파비엥은 정말 사랑하게 되는 걸까. 남편이 떠났으므로 쓸쓸하지만 홀가분해진 그녀가 정말 남편이 그랬듯이 젊은 제자와 바람이 나는 걸까. 왠지 나탈리와 파비엥은 아슬아슬할 만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파비엥은 애초부터 나탈리에 대한 호감과 존경이 깊고 현재 훌륭한 철학자이자 작가로 성장했다. 나탈리에게 파비엥은 아들 말마따나 아들보다 더 사랑하는 이상적이고 지적인 이상적 아들이기도 하다. 파비엥은 나탈리의 엄마가 요양원에서 죽고 남편과 이혼하고 떠날 때도 옆에서 이야기를 들어주고 현재의 삶과 미래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물어주는, 어쩌면 지상의 유일한 친구이기도 하다. 파비엥은 고백한다.

 

“고 3때의 기억은 단 두 개예요. 엄마와 함께 아빠 임종을 기다리던 병원, 철학을 발견하게 된 선생님의 수업. 선생님의 생각과 책들이 절 격려하며 붙들어줬죠.”

 

나탈리의 삶을 따르듯 철학자가 되고 작가가 된 파비엥은 나탈리가 닥친 일들을 수습하며 약간 당황해 하는 그 시기에, 아주 단호하게 자신이 살아야 할 장소와 삶의 방법을 결정한다. 집도 절도 없는데다 자유롭지도 않은 도시에 삶에 항거하던 그는 조용히 지쳐간다. 파비엥의 옷차림은 한번 모습을 보일 때마다 점점 더 허름해지고 일견 자유로워진다. 어느 날 파비엥은 배낭 하나 짊어지고 급진적이고 대안적인 아나키즘 공동체를 꾸리기 위해 산으로 들어간다. 문명과 도시의 룰이 지배하지 않는 버려진 언덕 아래 농가다. 같이 살 사람을 스스로 고르고 선택하고 취업을 하는 대신 할 일을 스스로 만들어낸다. 나탈리는 아직 빈 집에 혼자 살지만 파비엥은 동료와 애인과 취직을 산 속의 공동체에서 일군다. 가장 내밀한 이야기를 나누는 유일한 친구인 나탈리와 파비엥은 남과 여, 연상과 연하, 선생과 제자라는 분별과 다름에 아랑곳없이 가족보다 엄마보다 남편보다 더 가까웠었다. 가만히 보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둘은 슬쩍 애인이 되거나 바람이 나거나 일회적으로라도 ‘썸’이 생길 법도 한데, 그러나 두 사람은 그 길을 가지 않는다. 가벼운 위안이나 충동적인 애정의 표출 없이 서로의 삶의 변화에 대해 대화하고 서로의 공간에 초대할 뿐. 하지만, 이 관계라고 변화가 없으랴. 삶의 방식도 달라지고 철학적 자세도 변화한 그들 사이에도 넒고 깊은 거리가 생겨난다.

닥쳐오는 이별과 배신, 죽음에도 담담하고 담대하고 이성적으로 대처하는 나탈리도 목석이 아닌 바에야 물론 슬퍼하고 절망하고 소리 없이 운다. 철저하게 혼자가 되어 소리 없이 터져 나오는 통곡을 두세 번 울음 운다. 헤어졌으므로 다시는 갈 수 없는 전남편의 별장에서 25년 동안 손수 가꾼 꽃들을 쓰다듬다 누운 방에서, 위독한 엄마 소식을 듣고 황망한 채 돌아오는 남편의 차 안에서, 낙원 같은 파비엥의 공동체에서 꿈꾸는 아나키스트가 되어버린 사랑하는 제자 파비엥에게 지난 삶을 비판당한 후 검은 고양이 판도라를 껴안은 채 하염없이 그녀는 운다. 평생의 삶이 ‘머리에는 별 총총, 가슴에는 도덕률’ 이라고 떠들어대던 남편이 끝까지 냉담하게 등 돌리고 있을 때, 젊은이들과 어울리며 자유로운 철학의 세계를 유영하는 파비엥이 애인과 웃고 떠들 때, 임종을 앞둔 엄마를 향해 맨발로 종종거릴 때 그녀의 얼굴엔 눈물이 어룽져 내린다. 눈물로 엉킨 그녀의 얼굴 위로 흐르는 음악은 슈베르트의 ‘물 위에서 노래함.’ 물 위에서 노래한다는 것은? 그저 렛잇플로우Let it flow. 흘러가는 것은 흘러가게 두어할 할 뿐. 그 뜻이지 않을까.

 

 

 

 

이미 다 해봤어. 다 겪었다고.

한 때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던 엄마의 늙음과 죽음은 나탈리가 앞둔 미래의 모습일 수 있다. 엄마는 뚱뚱하고 늙고 까만 고양이 판도라와 살다가 막상 요양원으로 떠날 때는 일말의 관심도 없이 고양이를 버리고 간다. 나탈리는 늙고 뚱뚱하고 까만 고양이, 야성과 본능을 잃어버린 판도라를 보살피는 것이 귀찮고 싫지만 어느덧 자아의 분신인양 동일시해 버린다. 자꾸만 고양이를 향해 늙고 본능을 잃어버린, 누구도 탐탁치 않아하는, 결국은 버림받은 존재라며 구박하는데, 그 때가 나탈리로선 가장 의기소침하고 위축된 상태다. 기진맥진, 달라진 상황을 어서 정리하고 환골탈태해야 하는 시간 앞에서 쪼그라든 자신감으로 불안해 보이는 나탈리가 안쓰럽다. ‘버릴 수도 무를 수도 없는 참혹’ 같은 고양이 판도라는 파비엥의 숲 속 집에서 돌연 야생의 본능을 회복하고 밖으로 나가 쥐를 잡는다. 판도라가 늙고 뚱뚱하고 검은 몸으로도 본능적으로 잃어버린 본능을 찾아갈 때, 나탈리는 처음으로 판도라를 대견해 하고 칭찬해준다. “선생님은 좋은 사람 만날 거예요, 늙은 남자 싫으면 젊은 남자랑 만나세요.” 말을 건네는 파비엥에게 “별일 아니야, 삶이 끝난 것도 아니고. 나는 각오하고 있었어. 동정 하지 마. 난 지적으로 충만하게 살잖아. 그거면 족히 행복해. 정말로.” 나탈리는 짐짓 발랄하게 말한다. 허세다. 또는 “여자는 40세가 넘으면 쓸모없어져.” 말한다. 청승이다. 어쩔 수 없다. 나탈리도 이제 다가오는 것들을 모두 맞이하고 응전했으니 스스로도 달라져야 하는 시간이 온다.

 

나탈리는 파비엥의 공동체에서 스스로 자신이 늙었음을, 다 경험했음을, 이미 지나가버린 세월이 저 뒤에 있다는 것을 파비엥의 애인인 젊은 여자에게 고백한다.

“급진성을 논하기엔 나는 너무 늙었어요. 예전에 다 해봤거든요. 다 해 봤다고요. 그래요. 난 변했어요.”

약간 처연한 감이 있으나 그녀는 숲 속의 대안공동체에서 젊은 친구들의 삶에 결코 동화되지 못하는 자신이 지나온 기간을 인정한다. 넓고 넓은 언덕, 푸른 땅에서 한 손에 책 한권을 들고 마주한 나탈리의 모습은, 그제야말로 바뀌어버린 삶을 받아들이는 모습으로 충분하다.

낡은 방에 누워 젊은이들과 어울리지 못한 채, 혹독한 비판의 말을 듣고 돌아와 나탈리가 그토록 비웃었던 늙고 뚱뚱하고 까만, 그 누구도 데려가지 않을 거라는, 본능이고 뭐고 다 잃었을 거라는 판도라를 껴안고 하염없이 울던 그 시간이야말로, 이젠 엄살도 허세도 청승도, 사라져야 할 것은 다 보내야 할, 처음으로 자신에게 돌아와야 할 시간임을 깨달은 눈물이었을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다 겪어본 그녀가 스스로 생각해내고 살아내야 할 시간뿐이다.

 

 

 

 

앞으로도 잘 살 거예요. 지금껏 그래왔듯이

본능을 찾아 숲 속에서 쥐도 잡을 수 있는 판도라를 데리고 돌아와, 그녀는 말한다.

“드디어 집에 왔네.” 그래, 그녀의 집인 것이다. 남의 집에서 고양이를 껴안고 철철 울면서 그제야 저 자신을 만난 시간부터 1년이 지났다. 나탈리는 담담하게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원한다면 우리는 행복 없이 지낼 수 있다. 우리는 행복을 기대한다. 만일 행복이 안 온다면 희망은 지속되며 환영의 매력은 그것을 준 열정만큼 지속된다. 상태는 자체로서 충족되며 그 근심에서 나온 일종의 쾌락은 현실을 보완하고 더 낫게 만들기도 한다. 원할 게 없는 자에게 화 있으라. 그는 가진 것을 모두 잃는다. 원하던 것을 얻고 나면 덜 기쁜 법. 행복해지기 전까지만 행복할 뿐.”

사실 나탈리는 파비엥을 깊이 사랑했을 것이다. 철학적 애제자로서도, 다른 길을 가는 동지의 여정으로서도, 삶의 방식에서도 파비엥의 변화를 눈부시게 바라봤을 것이다. 사실 파비엥도 나탈리를 사랑했을 것이다. 처음엔 사상의 길을 열어준 은사로, 엄마처럼 길을 열어준 따스함으로도, 사실 나이는 많지만 여자로서도 사랑했음에 틀림없다. 둘은 연인의 길로 가진 않았지만, 순간적인 얽힘의 애인이 되는 것보다 더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서로 알고 있었을 것이다. 유예된 행복이 행복인 것이다. 나탈리가 행복론을 가르치고 파비엥이 불행이란 관념에서 벗어나는 법에 대해 글을 쓰는 것도 일종의 조응으로 볼 수 있다. 남의 입장을 이해한다는 것은 가능한가? 오프닝에서의 그 명제에 대한 리포트, AA로 채점한 그것은 어쩌면 파비엥의 것이 아니었을까.

파비엥과 나탈리는 다행스럽게도 다시 만난다. 성숙한 만남이다. 숲 속의 집이다. 더 늙고 뚱뚱한 판도라는 이제 파비엥의 공동체에서 완전히 본능적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세 마리 당나귀를 키우고 아이를 낳을 계획도 세우면서 도시로는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 파비엥에게 늙은 고양이 판도라를 입양시키던 날, 그 밤은 나탈리에게 마지막 정리가 된 시간이었다. 처음으로 나탈리는 모닥불 난로 앞에서 파비엥에게 다른 이야기를 청한다. 철학 아니고 대안적 삶 아니고 글에 대한 이야기 아니고, 너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말이다. 관계에는 가족이니 애인이니 제자와 스승이니 이름붙인 허울을 떠나 그저, 너 그리고 나일 때 가장 완벽하게 소통되는 관계도 있는 것이다.

Long Long Time, 그 후로도 오랫동안

 

 

영화 <다가오는 것들>은 오프닝에서 무덤과 묘비로 나타나는 죽음으로 시작해서 딸의 아이를 품에 안고 노래하는 삶의 장면으로 끝난다. 미래는 죽음과 삶이 반복된다.

성탄절 저녁, 나탈리의 방은 비어있지 않다. 철학자 파비엥은 숲속의 대안출판사에서 펴낸 철학 시리즈를 한 돌도 안 된 나탈리의 손녀에게 선물함으로써 자리에 함께 한다. 딸과 아들과 사위가 너무 이른 철학책 선물을 펼쳐보며 웃고 있다. 남편은 없다. 남편은 자식과 옛 아내와 함께 성탄절을 보낼 수 있을까 기웃거리지만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건넨 나탈리는 단호하게 그를 내보낸다. 아이는 아이니까 운다. 익숙하고 다정하게 아이를 안은 나탈리는 영락없는 할머니가 되었지만 평온하게 자장가를 불러준다. 그녀가 아기를 안고 노래 부르는 방 옆 거실이 노랗고 따스하게 빛난다. 텅 빈 것 같으면서도 따스하게 차오른 공간의 집. 그런 빛깔의 집에서는 무슨 일이 다가와도 하늘로 날아가거나 땅으로 푹 꺼지진 않을 것이다. 나탈리는 엄마처럼 징징 울다가 외롭게 죽지도 않을 것이고 남편처럼 바람이 나지도 않을 것이다. 행여 그런 미래가 다가오고 있다 해도 그녀라면, 이전처럼 잘 처리해 나갈 것이다. 아마도 75세까지, 저 아름다운 임서기를 집인 듯 숲인 듯한 곳, 그녀의 집에서 노랗게 잘 익어갈 것이다. 119를 불렀다고, 밥을 한 끼도 안 먹었다고, 지금 가스밸브를 열었다고, 곧 죽겠다고 자식에게 죽음으로 협박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어디서나, 언제나, 책을 읽으면서 다가오는 것들을 맞이하면서 지금을 잘 살다가 미래를 맞을 것이 틀림없다. 자기 앞의 생, 50 이후에도 삶은 도도하게 흘러간다.

 

 

권혁란 50+기자 l  사진 P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