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 folk high school에서
인생을 다시 디자인하다

 

 

 이해견ㅣ50+스토리 공모전 최우수상

 

 

어떻게 덴마크까지 왔냐고요?

두 아이 키우는 전업주부로서 10년, 공립학교 영어교사로서 16년을 보내고 50을 맞았을 때 나는 내 지난 인생을 아파하며 반성해야 했습니다. 대학생 시절에는 민주화운동에 동참했고, 전업주부 때는 두 아이 씻기고 먹이고 열심히 보살폈고, 선생이 되어서는 어떻게 하면 좀 더 잘 가르칠까 고민하며 공부했었습니다. 열심히 산다고 애쓰며 살았던 것입니다.


50이 된 어느 날이었습니다. 수업을 하다가 갑자기 이런 생각이 나를 강타했습니다. ‘아! 내가 이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경쟁에서 이기라는 것뿐이구나. 경쟁을 부추기는 교사. 경쟁에서 이겨야한다고 주장하는 교사. 경쟁에서 이기는 방법이라고 말하며 받아 적고 외우기를 강요하는 교사. 이것이 나의 자화상이다.’ 그동안 애써 눌러놓고 부정해왔던 나의 모습과 정면으로 마주한 것입니다. 온몸에 힘이 빠졌습니다. 더 이상 수업을 할 수 없었습니다.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의존할 것이 책 밖에 없었습니다. ‘무엇을 가르쳐야 하나?’ ‘가르침은 어떤 경우에 의미가 있나?’ ‘자발적 배움은 어떻게 일어나나?’ ‘가르침과 배움은 어떤 경우에 서로를 상승시킬 수 있나?’ ‘내가 가서 배울만한 교육의 장이 있는가?’ 등의 의문이 끊임없이 올라왔습니다. 대안교육에 관한 책들이 나에게 힘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대안교육의 공간을 만들고 실천했던 분들의 낱낱의 고민과 성과가 고맙게 다가왔습니다. 우연히 ‘삶을 위한 학교’라는 책이 출간되었다는 글을 읽었습니다. 삶을 위한 학교. 숱한 아이들을 죽인 학교이거나 죽음의 길로 안내하는 학교가 아니라 살기 위한 학교입니다. 책을 주문했습니다. 덴마크의 성직자이자 철학자, 교육학자, 시인이었던 그룬트비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말한 ‘살아 있는 말’에 의한 교육이 뭘까 궁금해졌습니다. 시험도 없고 경쟁도 없는 folk high school이라는 것이 덴마크   민중을 깨어있는 시민으로 성장시킨 원동력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가보자 싶었습니다. 2016년 2월에 퇴직을 했습니다. 3월 28일, 덴마크로 가기위해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부끄러운 모습도 나다 – 나를 인정해 나가는 과정

세계 30여 개국에서 온 사람들과 함께 자신을 확장하는 곳 : IPC
IPC에 와서 얻은 게 뭐냐는 질문을 서로 많이 합니다. 이 질문에 나는 서슴지 않고 ‘나를 좀 더 많이 알게 되었다’고 대답합니다. 나는 일을 시작하기 전에 많이 주저하며, 많은 사람들과 사귀는 것을 힘들어하고, 파티를 싫어했습니다. 특히, 나는 나의 부끄러운 점, 부족하다고 느끼는 점을 남에게 드러내놓기를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나는 중요한 것을 하나 깨달았습니다. 이런 점도 다 나의 모습이라는 것.

 

 

덴마크 국기와 유엔기가 함께 걸려 있는 IPC 전경

 

 

 

못 알아듣는 영어 가르친 부끄러웠던 시간 이제 굿바이

IPC에서는 세계 30여 개국에서 온 100여명의 사람들이 함께 먹고 자고 생활하면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학기는 6주, 12주, 24주 등으로 나뉘어져 있고 수업과 생활에서는 영어를 사용합니다. 여기서는 모두가 다 모이는 morning fellowship 시간이나 lecture 시간에 자신이 다른 사람과 공유하고 싶은 것을 가지고 나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룬트비가 강조한 ‘살아있는 말로의 교육’이 실현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IPC 생활의 아주 초기 lecture 시간에 여기 교사 중 한명이 자신의 어린 시절 가정에서 있었던 경험을 공유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생물학적으로 반은 한국인, 반은 필리핀인이지만 국적은 덴마크다’라고 소개하고 자신이 어렸을 때 덴마크로 입양을 와서 덴마크인 부모 밑에서 생활하게 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그의 이야기가 진행되어 감에 따라 분위기는 숙연해지고 옆의 일본인 친구는 훌쩍거리며 울기 시작했습니다. 간간이 들리는 말로 그가 덴마크인 아버지로부터 학대를 받았다는 정도만 겨우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강의가 끝나고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그 교사를 안아주면서 고마움을 전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힘들었으며 어떻게 그 시간에서 벗어 나왔는지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괴감이 몰려왔습니다.

 

강의가 끝나고 옆에서 울던 일본인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나 솔직히 못 알아들었어, 나 너무도 알고 싶어. 그가 어떤 일을 당했는지. 다시 이야기해줄래?’ 그녀는 그가 한 이야기를 천천히 또박또박 다시 말해주었습니다. 나는 그제야 울 수 있었습니다. 알아듣지 못해서 ‘고맙다’는 말도 못 해준 그에게 너무나도 미안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나에게도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히 공유해주었습니다. 교육의 힘에 대해 알려주기 위해서. 고마웠습니다. 제대로 소통하는 데 쓸 수 있는 언어로 영어를 배우자 싶었습니다.

 

 

해보지 않았던 것에 대한 도전 –자신과의 싸움

IPC에서의 수업은 내가 생각지 못하던 것을 생각해보게 하는 교사들과 외국인 학생들 덕분에 항상 도전과제가 있었습니다. 나는 크게 한 가지는 제대로 도전해보자 싶었습니다. 그것이 drama 수업이었습니다. 연기를 해본 적이 한 번도 없는데다가 18~20대 초반의 외국인 학생들과 함께 호흡을 맞춘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봄학기 12주 동안 두 번을 공연했는데 이게 나에게는 큰 도전이었습니다.

 

봄 학기 마지막 날 무대에 올린 짧은 연극에서 연기중인 나

 

 

첫 번째 공연이 끝나고 평가시간에 나는 내 마음에 두었던 말을 꺼냈습니다. ‘공연에서 내가 여러 번 실수해서 미안해요.’ 교장선생님이면서 드라마 수업 담당교사인 소렌이 말했습니다. ‘우린 아무도 너의 실수를 알아차리지 못했어. 더구나 관객은 연기자의 실수를 알아차리지 못해. 다만, 연기자가 자신의 실수에 매몰되고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해서 자꾸 더 실수하게 되는 거지.’ 실수에 대한 자기검열이 자신이 하는 일을 더 어렵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이제 내 인생의 교훈이 되었습니다.

 

두 번째 공연에서 나는 ‘mirror marriage’ 라는 짧은 극의 나이든 아내 역을 맡았습니다. 일본인 친구가 나의 남편 역이었고 베트남인 여학생 프랑스인 남학생이 함께 팀을 이루었습니다. 소렌은 항상 ‘very good’을 외치며 우리가 개선하면 좋을 점을 이야기해줬습니다. 우리는 소렌의 의견 중에서 받아들일 것과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것 등을 토론을 통해 정하였습니다. 우리는 수업시간 외에도 따로 만나 연습을 했습니다. 서로 발음도 교정해주고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 의견을 내고 다시하기를 반복했습니다. 지루하고 힘들었습니다. ‘내가 왜 이것을 도전과제로 삼았나?’ 싶기도 했습니다. 드디어 무대에 오르는 날. 내 연기에 집중하자 싶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성공이었습니다.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함께 만들어 나가는 것을 즐겼다는 점에서 또한 성공이었습니다.

 

 

솔직한 공유와 소통으로 얻는 것 : 신뢰와 사랑

한번은 ‘people movement and migration’ 시간에 내가 한국의 ‘international marriage’에 대해 프레젠테이션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스무 명 남짓한 학생들 앞에서 하는 발표였지만 잘 모르는 내용이라서 스스로 영어논문도 찾아 읽고 준비를 많이 했었습니다. 그런데 알면 알수록 한국의 국제결혼의 어두운 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급기야는 한국인 남편이 외국인 아내를 폭행하거나 살해하는 등의 사건까지 알게 되었습니다. 한국의 민낯을 외국인들에게 샅샅이 말해줘야하나? 이 사건은 빼도 되지 않을까? 나는 며칠을 망설였습니다. 사실 그 사건들은 내 프레젠테이션에 꼭 들어가야 할 부분은 아니어서 빼도 무방합니다. 그러나 나는 내 자신에게 문제의식이 일어났습니다.


‘내가 부끄럽다고 숨기려고 드는구나. 부끄러운 면은 내가 아닌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나는 그 살해사건도 다루었고 나의 프레젠테이션이 끝나고 많은 친구들이 나와 안아주면서 고마워했습니다.

‘너희 나라를 좀 더 알게 되었어, 고마워.’ ‘너희가 고민이 많은 것도 알게 되었어. 고마워.’ 이들과 잘 소통했다는 만족감이 그동안 나의 고민과 부끄러움을 한방에 날려주었습니다. 이제 나는 나의 부끄러운 점을 드러내는 것이 처음처럼 많이 두렵지는 않습니다. 물론 아직도 조금은 두렵습니다. 하지만 솔직한 공유와 소통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솔직히 소통하고자 하는 용기의 대가로 얻어지는 깊은 신뢰와 사랑입니다. 함께 하는 힘으로 그동안 깰 수 없었던 나를 깨고 나온 느낌입니다.

 

 


IPC교사 Cha와 함께 수업을 진행하는 모습

 

 

이제 다시 길을 떠나고 싶습니다

12월 14일이면 9개월의 덴마크생활이 끝납니다. 나는 이제 태국에 있는 permaculture 농장에 가서 몇 달 살아볼 작정입니다. 그곳은 퍼머컬쳐 방식으로 농사지으며 공동생활을 하는 농장공동체입니다. 두어군데 가볼만한 농장을 이미 알아두었습니다. permaculture라는 말은 여기 와서 처음 들어봤습니다. 처음부터 이것이다 하는 생각이 든 것은 아니었고 조금씩 더 알게 될수록 나에게 중요한 가치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한국에도 퍼머컬쳐 가치에 의해 농사짓는 분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 말이 잘알려지지 않았을 뿐.

 

한정된 지구의 자원을 보존해가며 어떻게 자연과 인간이 잘 어우러져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substantiality(지속가능성)와 resilience(회복력)이라고 하면 그 하나의 방법으로서 농사에 적용될 수 있는 것이 permaculture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전환마을 은평’에서 하는 전환마을 운동, 여러 생태공동체에서 하는 에코 빌리지 정도로 이 의미가 알려져 있는 것 같습니다

거기에서 살면서 우선 permaculture가 무엇인지, 어떻게 농사를 짓는 것이 우리에게 지속가능한 삶을 보장해주는 지 자세히 배워보고 싶습니다. 또한 지속가능한 삶으로의 전환에 필요한 인식의 전환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공동체 삶을 통해 실천할 수 있는 지속가능한 삶의 모델은 무엇인지도 배워볼 작정입니다. 세계 각국에서 온 뜻 있는 사람들과 생각과 삶을 나눌 생각입니다.

 

내가 IPC생활에서 얻은 것 중 하나가 교육의 힘에 대해 다시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함께 생활하며 삶의 좋은 모델이 되어주는 교사들 덕분입니다. 그들과 모든 것을 나눌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나도 뜻 있는 사람들과 비전을 공유하며 삶을 함께 개척해나가고 싶습니다. 그 이름은 ‘교사’가 아니어도 좋겠습니다. 다만 지금은 다시 길을 떠날 준비가 된 것 같습니다. 다시 배우고 싶습니다. 삶을 위해. 죽음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아름다운 삶을 위해.

 

나는 이제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삶을 위한 학교’가 무엇인지.잘 떠나왔습니다.


새로운 인생을 향해 힘든 결정을 내린 나 자신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냅니다.

 

 

서울시50플러스재단은 50+의 문화, 사회참여활동 등 다양한 활동사례를 발굴하고 50+세대의 활동이야기를 알리고자 ‘2016년 50+스토리 공모전’을 진행하였습니다.  순차적으로 수상작 50+스토리를 선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