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야, 밥이나 한번 먹자!
경상도 산골의 중학교를 졸업한 필자는 청운의 큰 뜻을 품고 형님이 살고 계신 인천의 한 고등학교에 진학을 했다. 억센 경상도 사투리 발음이 재미있어 깔깔대며 웃어대는 반 아이들의 등쌀에 필자는 학교를 다니기 싫을 정도로 위축되어 있었다. 함께 연대해서 무리지어 싸워줄 중학교 동창이 없다는 사실이 큰 핸디캡이었고 반 아이들이 중학교 동창들과 친하게 어울려 다니는 모습이 제일 부러웠다.
반에서 키가 큰 편이고 깡마른 K는 필자를 직접적으로 보호해주지는 못했지만 방과 후 옆에 다가와서 필자를 많이 위로해주었다. 마음이 통하는지 자기집에도 데리고 가서 부모님에게 인사도 시키고 K의 동생들도 필자를 친형처럼 잘 따랐다. K의 집에 놀러 가면 이웃집에서 놀고 있던 K의 엄마가 쏜살같이 달려와 밥도 주시고 과일 등도 챙겨주셨다. K가 필자를 좋게 얘기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후 서로 다른 대학을 진학하고 군 생활을 하는 등 서로 떨어져 있는 시간이 제법 되고 직장생활을 하느라 자주 연락을 못하는 뜸한 상태로 몇 년이 더 지나갔다. 그러는 사이 K도 결혼을 하고 필자도 결혼을 하면서 이번에는 사느라고 바빠서 자주 만나지 못했다. 그런데 운명처럼 다시 가까운 곳에서 K와 이웃하며 살게 되었다. K는 그동안 많이 변해 있었다. 아가씨를 두고 룸살롱을 하는데 정나미가 뚝뚝 떨어질 정도로 섬뜩한 이야기를 해댔다. 착하고 순했던 K는 돈벌이라면 무슨 일이라도 할 정도로 차갑게 변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필자에게 찾아와 돈을 꿔달라고 했다. 갑자기 그만한 돈도 없었지만 마음속에서 K에 대한 신뢰가 이미 깨져 있었기 때문에 돈을 꿔주면 다시는 돌려받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의식적으로 K를 점점 피하기 시작했지만 속마음과는 달리 K에게서 전화가 오면 반가웠다. 그리고 어느 정도의 세월이 흐른 뒤 K와 술집에서 마주 앉았다. K는 술이 취하자 필자가 과거에 돈을 꿔주지 않은 것이 무척 섭섭했다고 말했다. 필자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친구가 절실하게 돈이 필요한데 돌려받지 못할 것만 걱정하면서 속물같이 굴었다는 사실이 부끄러워 연신 사과했다. 그때는 정말 돈이 없었다고 이해해달라며 약간의 거짓말을 하며 술만 들이켰다.
그러고 나서 2~3년의 세월이 흘렀다. 친구가 또 돈을 꿔달라고 했다. 수중에 그만한 돈이 없어 은행에서 돈을 빌려 K의 손에 쥐어주었다. K는 새롭고 기발한 음식을 개발하고 종업원들에게 친절교육을 시키는 등 야심찬 출발을 한 지 불과 1년도 채 되지 않아 음식점 문을 닫았다. 손님을 왕처럼 모시려 했지만 왕 같은 손님이 오지 않았다.
친구와 돈거래를 하면 친구 잃고 돈 잃는다는 말이 있다. 필자가 찾아가면 돈 받으러 온 것으로 여길 까봐 찾아가지도 못했고 K의 자존심을 살려주기 위해 K가 먼저 필자를 찾기 전에는 찾지 않으리라고 다짐하고 전화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또 세월이 흘렀다. K가 사이비 종교에 빠져 기도원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풍문이 들려왔다. 하지만 기도원의 이름도 위치도 정확하지 않았다. 이제는 필자가 찾아가려고 해도 찾아갈 수가 없다. 전화번호도 바꿨고 필자가 찾아갈 수 있는 단서도 없다. 우연히 길에서 K를 만난 사람의 전언에 의하면 필자를 만나기 싫다고 했단다. 이렇게 K와 관계가 정리되는 것이 아쉽고 싫다. 하지만 아직 살아갈 날이 많이 남은 우리는 운명처럼 또 만나게 될 것이다. 지금은 필자를 피하는 K에게 지나가는 바람에 소식을 실어 보낼 수밖에 없다.
“친구야 그 돈을 꿔줄 때 받을 생각 없이 그냥 준 거야! 나에게 미안해할 필요 없어. 우리 더 늙기 전에 만나서 밥이나 한번 같이 먹자.”
글 조왕래 동년기자 bravopress@e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