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위에 저 높은 곳은, 하늘은, 사람이나 동물이 죽어서 가는 곳이라고 알고 있다. 하늘나라, 천국. 하얀 곳, 높은 곳, 영혼이 돌아가는 곳. 그 곳은 그렇다면 당도한 곳, 도착지이자 목적지가 분명하다.
생명의 잉태와 죽음의 인사를 다 같이 기능적으로 행하는 호르가 마을 사람들. 가장 자연적이면서도 가장 인위적이다. (사진 출처:imdb)
그런데 여러 사람이 양쪽에서 들어주는 꽃가마를 타고 올라간 저 높은 절벽 위에서 사람이 하늘나라로 돌아가지 않고 아래로 새처럼 뛰어내린다. 단지 죽기 위해서, 죽어서 그곳 하늘나라에 가기 위해서. 거꾸로 된 거잖나. 땅에서 살다가 마침내 돌아가는 하늘에서 왜 일부러 꾸역꾸역 올라가 땅으로 떨어져 내려오는가.
자연을 자연스럽게 하기 위해 부자연스럽게 위반하면서 순환의 둥근 고리를 완성하는 사람들이 거기 있다.
그들은 절벽에서 뛰어내리기 전에 손바닥 가운데를 칼로 잘라 피를 낸 후 신성한 자연의 섭리를 새긴 경전 비석에 11자의 피를 묻힌다. 땅 아래엔 방금 전까지 같이 둘러앉아 밥을 먹은 마을 공동체 사람들이 모두 하얀 옷을 입고 서 있다. 어서 기쁘게 돌아가소서. 퍽. 절벽에서 떨어진 여자는 정확하게 땅 아래 바위에 정통으로 머리를 부딪쳐 얼굴을 알아볼 수 없게 깨진 후 바로 생명이 끊긴다. 순간이다, 찰나다. 완전한 성공, 완벽하게 죽었다.
두 번째로 같이 올라간 사람이 절벽에 선다. 그 사람도 날아오른, 아니 날아 내린다. 불행히도 이 사람은 바위에 정확하게 닿지 못해 다리만 으스러지게 부러졌을 뿐 얼굴은 그대로 남아 있고 생명도 붙어 있다. 절명에 성공하지 못한 것은 통탄할 일이다. 아래에 선 사람들도 그의 불운이 안타까워 소리를 지른다.
하지절 축제 첫날. 절벽의 죽음. 72세가 된 사람들은 모든 이들이 보는 앞에서 새처럼 뛰어내려 이 세상을 떠난다. 이름은 남겨주고 얼굴은 사라진다. (사진 출처:imdb)
단번에 기쁨으로 생명을 끊고 가지 못하다니 참으로 불행한 사람이니까. 순수하게 그의 불행을 안타까워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세 사람이 곰도 때려잡을 만큼 큰 나무망치를 들고 다가간다. 한 사람이 한 대씩, 정확하게 망치로 얼굴을 가격한다. 퍽. 살 뭉개지는 소리. 퍽. 뼈 빠개지는 소리. 퍽. 완전히 숨이 끊어지는 소리. 백주대낮. 하얀 것들이 빛을 다 반사해서 눈이 멀 것 같은 눈부신 날. 아니 밤이 되지 않는 백야의 날. 한여름 낮의 축제. <미드소마>, 미드 섬머의 첫째 날 첫 세리모니다.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것은 명백히 자살행위다. 뛰어내렸어도 아직 죽지 않은 산 사람을 망치로 때려죽이는 것은 당연히, 명실상부 살인의 행위다.
자살과 살인의 장면을 눈앞에서 백주대낮에 목격한 사람들은 경악할 수밖에 없는 게 당연한일. 토하고 저항하고 비난하면서 외부인들은 공동체의 규율에 따라 행동하는 이들을 단죄하고자 한다. 축제라면서 사람을 잔혹하게 죽이다니. 야만적이고 잔혹하고 미친 짓이야, 분노로 뜨거워진다. 얼굴이 짓이겨지고 몸이 찢기고 죽는 것이 그리 유쾌할 것까지는 없지만, 그러나 나는 돌연 완벽하게 저 행위에 동의하는 마음이 되고야 말았다. 저렇게 죽을 수 있다면 괜찮은 일일 수도 있잖은가. 어둠 속에, 골방에 갇혀, 병실침대에 묶여, 의식도 없이, 아무도 없이 죽는 것보다는.
지금 절벽에서 뛰어내린 이들은 그날, 72세가 된 사람들이다.
72세가 된 마을사람이 절벽에서 뛰어내려 기쁨으로 떠나가기를 기다린다. (사진 출처:imdb)
지상에 몸을 받고 태어나 이름을 달고 72년 동안 잘 살아온 사람이고 이제 그들은 세상에 태어나 해야 할 모든 일을 마쳤다. 그러니까 절벽에서 뛰어내려 생명의 순환에 따라 기쁨으로 뛰어내려 죽는 것은 통곡해야 할 슬픔이 아니다. 잘 살아서 정신 맑을 때 모든 이가 보는 앞에서 자의로 기쁘게 뛰어내려 절명하는 것은 축복이다. 9일 동안 계속 되는 축제에서 오늘 죽은 저들의 이름으로 새 생명이 태어나 72년을 살아갈 것이다. 얼굴을 알아볼 수 없도록 바위에 으깨거나 망치로 쳐서 해체하는 것은 그 얼굴이, 다름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자연의 순환에 따라 둥글게, 둥글게 기능적으로 살아가는 이 마을에서 누군가가 특별히 ‘다를’ 필요는 없다. 여기 삶에서 단독으로, 유일하게, 특별하게, 존재할 이유가 없다.
호랑이처럼 가죽을 남길 필요가 없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지만 그 이름은 죽은 자를 기리기 위해 명예로 남기는 게 아니다. 그냥 새 생명이 받아서 그의 생애 72년을 사용할 뿐이다. 얼굴은 그 다름으로 다르게 인식할 필요가 없다. 얼굴은 새로이 태어날 아이에게 잠깐 고유하게 사용되다 사라질 것이다.
축제의 첫날, ‘절벽’에서 죽은 두 사람은 잘 타는 장작 위에서 으깨진 얼굴로 반듯하게 누워 완전하게 타서 가루가 되어 자연의 순환 속으로 돌아간다. 나무뿌리로 땅으로 바람으로 곡식으로. 죽음과 죽음의 방식, 죽는 시간, 애도의 방식과 소멸과정까지 저기 영화 속 스톡홀름의 공동체 ‘호르가’에서는 인위적이면서도 자연스럽게 진행된다. 인위적이고도 자연스런 인간의 죽음? 앞뒤가 안 맞는 것 같지만 <미드소마>에 나오는 죽음은 기이하게 납득이 된다. 광신적으로 어쩌면 폭력적으로 여러 사람을 죽이는 걸로 보이지만 저 공동체 내의 공동체에 소속된 사람들에게 죽음은, 가장 특별한 의식으로, 가장 성스럽고 가장 기쁘게 진행된다. 그래서인가. 이 영화는 좀 두렵고 끔찍하긴 하지만 공포와 호러가 아니라 동화나 신화처럼 보인다.
미드소마. 당신이 이곳에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환영합니다. (사진 출처:imdb)
‘호르가’에서는 태어나서 죽기까지의 인생의 시기를 봄, 여름, 가을, 겨울로 나눈다.
18세까지는 봄, 태어나고 피어나고 자라고 공부한다. 19세부터 36세까지는 여름, 삶의 순례를 떠난다. 37세부터는 54세까지는 일하고 수확하는 가을이고 55세부터 72세까지가 공동체의 멘토로서 삶의 스승으로서 살아간다. 그리고 72세 이상은, 딱. 끝. 끝이면서 새로운 시작.
얼마 동안 몇 년 사이에 쉼 없이 당도하는 ‘부고’를 듣고 살았다. 친구가, 사랑하는 사람이, 선배가, 모르는 이들이 자살하고 병으로 죽어갔다. 부고와 부고 사이에 엄마의 와병으로 병원을 순례했다. 한번 아픈 이들은 좀체 건강해지지 못했고 한번 나이가 든 이들은 젊어지지도 않았다. 아픈 사람도 늙은 사람도 자연스럽게 이승을 떠나지 못했다. 부고는 불시에 당도했지만 죽은 이들의 마지막은 길고 좁고 어둡고, 또 다시 말해도 길었다.
죽지 못해 산다는 말은 농담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죽지 못한 사람들은 나이도 다들 많았다. 구십 살 이상도 많았고 팔십 넘은 것은 예사였다. 칠십이면 거의 청년이었다.
구십 살인 엄마의 병원을 따라 다닌 병실에는 식음을 전폐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팔 다리가 묶여 있는 이들이 많았고 제 코로 숨 쉬는 이는 거의 없었고 주사바늘과 호스를 꽂지 않은 이들은 한 명도 없었다. 기저귀를 차지 않거나 걸어서 화장실에 가는 사람은, 그 병동엔 단 한 명도 없었다.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가 모호했다.
솔직히 말해서, 그 때 그 병실을 오가면서 말 못하고 그저 묶인 채 호스로 영양제를 투여 받으면서 자식이고 뭐고 하나도 알아보지 못하고 말도 못하면서 그냥 살아만 이들이 간혹 뜨는 눈빛에서 희미하게나마 어서 죽고 싶어 하는, 어서 이 썩어 가는 몸을 벗고 떠나고 싶어 하는, 활활 불타고 싶어 하는 절박한 소망을 본 것만 같았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욕설과 절규를 하는 것이 어서 빨리, 제발, 나를 죽게 해달라는 부탁의 말처럼 들렸다.
같이 울어주는 사람들. 탓하지도 막지도 않고 오로지 그녀의 슬픔에 공감해주는 통곡의 장면. 마음놓고 우는 여자. (사진 출처:imdb)
산 것도 같고 죽은 것도 같은 저 어둡고 길고 흐릿한 마지막 날들을 오래 살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 아무리 장수만세니, 만수무강을 빌어주는 말을 덕담으로 주고받는 지금 세상에서라도 저건, 저렇게 두는 것은 너무 죽음에 대해서 예의가 없지 않은가. 그동안 살아온 삶에 대해서도 아무 예의를 차리지 않는 것 아닌가. 사람이 꼭 저렇게 모욕적으로 세상을 떠나야 하는 걸까, 오래 생각했다.
<미드소마>를 본 사람들이 “저 공동체로 가야겠어. 72세가 되면 모두의 배웅을 받고 기쁘게 죽을 수 있는 저 곳으로. 스톡홀름이라고? 미드섬머. 하지에 벌이는 축제라고? 일종의 존엄사로 볼 수도 있잖아.” 라고 평을 남긴 것을 읽었다. 존엄하게 죽을 수 있게 도와주는 스위스의 디그니티 센터처럼, 엑시트 센터처럼 저런 공동체에서라면 존엄하게 자살 및 살인이더라도 깨끗하게 소멸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여럿이었다. 이 영화에서 저 장면을 보지 않은 사람들이라도 거의 모두 늙고 아픈 부모들의 병과 앓음과 죽음에 대해 생각이 많았다. 부모뿐이 아니라 자기의 죽음까지, 도처에서 죽음에 대한 말과 글이 흘러 다녔다.
환갑이 넘으면
남의나이를 먹는다고 한다.
허망하게 죽은 젊은이와 한 몸이 되어 황혼 길을 걷는다.
다시 맞은 봄으로 사랑을 불태우기도 한다.
팔순이 지나면
남의나이를 모신다고 한다.
기저귀 타고 떠난 젖먹이와 둥개둥개 한 몸이 된다.
때도 없이 어리광 부리고
떼쓰기와 삐치기와 사탕을 좋아한다.
아예 똥오줌을 못 가리는 갓난아기로 돌아간다.
그래서 영혼은 모두 다 동갑내기 벗이 된다.
이정록이 쓴 '남의나이'라는 시다. ‘남의나이’는 명사로 환갑이 지난 뒤의 나이를 이르는 말이고 대체로 팔순 이상을 이른다, 라고 사전에 나와 있다. 예전 같으면 ‘환갑이 지난 뒤의 나이’지만 지금은 워낙 백수시대니까 80이 넘어야 ‘남의나이’로 사는 것이 된다.
도시에서 홀로 외롭게 살던 여자는 호르가에서 5월의 여왕이 된다. (사진 출처:imdb)
아참, 저기 저 영화 속 공동체 마을에선 가족이라는 폐쇄적 피의 고리가 없다. 생명을 잉태하기 위해 성관계를 할 때 남성을 여자가 직접 고른다. 여자의 피와 여자의 체모를 섞은 음료수를 손수 고른 남자에게 마시게 해서 기능적으로 아기를 갖는다. 선택된 남자는 12명의 공동체 여자들이 다 벗고 있는 방에 들어와 완벽하게 임신할 수 있는 몸으로 가운데 누워 있는 여자에게 와서 기능적으로 아기씨를 전달한다. 성행위의 기쁨이나 오르가즘은 거의 고려되지 않는다. 여자는 아이를 받아 안아 제 몸 안에 길러 낳으면 아기는 공동육아로 자란다. 그러니 엄마 아빠라는 것도 양육과 보살핌, 효도 같은 것이 개인에게 맡겨지지 않는다. 아기들은 고아가 될 일은 아예 없고 늙은 사람은 효도를 받을 이유가 생기지 않는다.
꽃과 과일이 천지에 가득한 땅, 해가 지지 않는 태양의 날들, 초록의 벌판, 나무처럼 교합하고 나무처럼 자라다가 활활 불에 타서 떠나는 지상의 밝은 세계에는 어둠이 없고 깜짝 놀랄 일이 생기지 않는다. 모든 것이(생명의 탄생과 죽음까지) 정해져 있으니 정한 대로만 살면 되고 거부하지만 않으면 된다. 그곳엔 어두운 실내가 없고 너른 벌판이 있고 까만 옷도 없이 하얀 옷만 입는다. 꽃이 만발한 자연의 세계에서는 다들 꽃처럼 생겨나 꽃으로 죽는다.
미드소마. 우리는 다같이 먹고 다같이 춤추고 기쁨으로 죽습니다. 호르가 마을의 사제 (사진 출처:imdb)
어둡고 칙칙하고 좁은 공간은 문명 도시에만 있다. 이별도 사랑도 보살핌도 죽음도 저 도시에서는 그토록 무신경하고 파괴적이고 폭력적이다. 가족은 서로 죽이고 내 목숨은 스스로 끊고 심리적 병을 앓는다. 가족은 어이 없이 죽고 애인은 사랑하지 않는다. 친구는 모여 있을 뿐 가까이 하지 않는다. 속을 알 수 없는 관계의 지옥, 어둡고 추운 일상의 지옥. 모두가 이별이다.
나는 가노란 말도 못하고 어두운 방에서 잠든 채 가스로 죽임을 당하는 엄마 아빠, 우울증으로 엄마 아빠를 죽이고 자살하는 동생, 그런 일을 겪은 애인의 통곡을 지겨워하는 남자친구. 아무도 심리적 공감과 배려가 없는 그 도시에서 홀로 울던 여자가 오월의 여왕이 되는 것이 당연히 행복해 보인다.
아이, 생명, 죽음, 사랑까지 어떤 물질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에도 배타적 소유격 ‘나의’를 쓰지 않으면서도 같이 울어주고 같이 먹고 같이 죽어주는 마을에서 꽃의 여왕이 된다는 것.
지쳐 쓰러질 때까지 춤을 추는 것. 아무리 기괴하고 잔혹하게 죽고 죽이는데도 왠지 한바탕 환한 난장의 축제가 되어버리는 숲 속의 마을.
여주인공은 아마도 거기서 마침내 미소를 지었으니, 72세까지 잘 살다가 기쁘게 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별을 완성하는 들여다봄의 의식. 가족, 애인, 사랑의 관계는 쉽게 부서진다. (사진 출처:imdb)
그러니 아리 애스터의 영화 <미드소마>가 공포영화로 알려졌으나 기묘한 치유영화로 여겨지게 되었을 것이다. 감독은 “이별을 계기로 관계의 파탄에 대한 일종의 동화이자 오페라 같은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었다.”고 했다는데. 고맙다. 충분히 동화 같았고 위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