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사람이 책의 빈곳에 남기는 글을 ‘마지널리아marginalia'라고 합니다. 저는 이 말을 원로 문학평론가 김병익(1938~)의 글에서 만났습니다.
운영하던 출판사를 후배에게 인계한 후 집에서 노닥거리며 시간을 보내는 동안 편하게, 마음 내키는 대로 책 읽기를 새로이 시작한 것이 그런 덕이었다. 그것을 처음에는 ‘자유로운 책 읽기’ 혹은 ‘게으른 책 읽기’라고 스스로 명명했는데 (중략) 메모를 하며 책 읽는 일은 체계적인 책 분석도 아니고 전반적인 주제 파악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그래서 책임감 없이, 물론 체계화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옮기고 여백의 방주(傍註)처럼 덧붙이며, 훌륭한 생각, 멋진 구절, 아름다운 장면에 대한 내 솔직한 느낌과 소감 들을 적어 넣을 수 있어 내게는 소중한 자의식의 표현이 되는 것이었다. (중략) ‘비망록’ 작가로서의 거창한 야심을 갖지 않더라도 겸손한 ‘마지널리언’이 되어 우리의 소담한 책 읽기에서 삶과 세상에 대한 새로운 반성과 이해, 회상과 그 소회를 적어보는 것은 힘들고 까다로운 일도, 남들의 시선에 그리 괘념할 일도 분명 아니다. -김병익, 「마지널리언의 한가한 책 읽기-노후의 독서」, 『조용한 걸음으로』, 문학과지성사, 2013.
집안 여기저기 그동안 읽었던-아니 읽고 있는, 아직 읽지 않은 책까지 포함입니다.-책들이 쌓여있습니다. 멀리는 까까머리 학창시절에 읽었던 시집 소설에서부터 대학시절 누가 볼세라 몰래 숨어서 보던 금서(禁書)들, 뒤에 사회에 나와 밥을 벌며 의무감으로 읽었던 사회과학, 자연과학, 인문학 서적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합니다.
그 옛 책들을 다시 꺼내 읽다보니 지난날 저 또한 책을 읽으며 많이 ‘끼적거려’ 놓았습니다. 참으로 신기한 것이 세월이 그토록 흘렀건만 당시 그것들을 적던 제 마음자리가 또렷이 보인다는 점입니다. 더러는 치열했던 나날을, 더러는 나약하기만 한 내면을 고백한 것으로 보이는 그 낙서 같은 단어, 문장이 소환하는 과거는 이제 다 흘러갔지만 시간의 더께 너머 그 마음의 물결이나 무늬들이 오롯이 살아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어쩌다 평생 글을 쓰며 밥을 벌다보니 책은 떼려야 뗄 수 없는 피붙이 같습니다. 밥은 굶어도 사고 싶은 책은 꼭 사고야 말았습니다. 너무 빨리 책장이 넘어가는 것이 아까워 하루 읽을 분량을 정해놓고 책을 읽은 적도 많았습니다.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낳아 키우면서도 그 책들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예전 같지는 않지만, 지금도 날마다 조금씩 늘어나는 책들은 좁은 집을 더 좁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렇게 책을 읽고, 생각하고, 그것을 글로 풀어내며 살아야 하는 것이 제 정해진 팔자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신문기자로 시작해 몇몇 주간지, 잡지에서 글품을 팔았습니다. 그러다 어공-어쩌다 공무원. 별정직 공무원을 일컫는 속어-이 되어 오랜 세월 총리 연설문을 썼습니다. 그렇게 글로 생계를 꾸린 지 삼십 년이 넘었습니다. 그러다 자의반 타의반 일을 그만두게 된 때가 왔습니다. 당장 쓸 것이 없어졌습니다. 처음 얼마간은 그것이 얼마나 좋던지요.
그런데 사람마음이 참으로 이상한 것이 남의 글을 써주며 받았던 내상(內傷)이 대충 아물어가면서 제 글을 써야겠다는 마음이 점점 커져갔습니다. 도심권 50플러스센터에서 열린 수필 강좌를 만난 것도 그 무렵이었습니다. 살아오면서 한 번도 글쓰기 강좌 같은 것을 들은 적이 없는 저에게는 처음 보는 새로운 세계가 거기 있었습니다. 연배는 달랐지만 모두 글에 대한 열정이 철철 넘치는 듯이 보였습니다. 그분들을 보며 저는 부끄러웠습니다. 남의 글이지만 평생 글이라고 썼노라고 생각해 왔는데 저분들에 비하면 ‘나는 그저 글노동자, 글기술자에 불과하지 않았는가’ 하는 자괴감이 스멀스멀 기어올랐습니다.
그러한 반성의 바탕 위에 격월간 『에세이스트』를 통해 수필가로 등단이란 것을 했습니다. 저에게는 또 하나의 새로운 글쓰기의 세계가 열린 것이지요. 그러나 사실 수필은 제가 한 번도 써보지 않은 글입니다. 그래서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아니 어렵게 느껴집니다. 그러니 ‘이제부터의 내 글쓰기는 어찌해야 할까?’ 하는 고민이 깊습니다. 아직 어떻게 해야 하겠다는 목표도, 계획도 없습니다. 그래도 멈추지 않으면 어딘가에 닿게 되겠지.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그때까지는 쉬지 않고 걸어가는 수밖에 다른 도리는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즐거움은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라고 누가 말했었지요 / 그래서 나는 사람으로 살기로 했지요 / 날마다 살기 위해 일만 하고 살았지요 / 일만 하고 사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요 / 일터는 오래 바람 잘 날 없고 / (중략) / 누구의 생도 똑같지는 않았지요 /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건 사람같이 사는 것이었지요 / 그때서야 어려운 것이 즐거울 수도 있다는 걸 겨우 알았지요 -천양희 「물에게 길을 묻다 3」 박형준 이장욱 엮음 『걸었던 자리마다 별이 빛나다』 창비, 2009.
에세이스트로서의 새로운 세계로 들어서며 앞으로도 책읽기는 끊임없이 이어질 것입니다. 읽어야 할 책은 많고도 많은데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고 쏜살같이 달려만 갑니다. 저는 과연 어떤 작가가 될까요. 좋은 작가가 되긴 할까요. 앞으로의 제 삶이 어디까지 이어질지는 모르겠습니다. 이 불확정의 미래를 앞에 두고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쓸 것인가를 곰곰 되새겨보는 일은 어렵고도 어렵습니다. 이 지난한 질문의 답을 찾는 일도 책읽기로 시작해야 할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