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박하사탕』(2000. 1.1. 개봉 2018. 4.26 재개봉 감독 이창동, 주연 설경구 문소리 김여진)은 많은 분들이 보셨을 줄 압니다. “박하사탕 좋아해요?” 라는 영호(설경구 분)의 물음에 순임(문소리 분)은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좋아했으면 좋겠어요.” 그리 넓지 않은 강변으로 나온 야유회, 갓 스물이나 넘겼을까 싶은 순임과 영호의 풋사과 같은 대화가 이어집니다. 전날 먹은 술의 취기가 가시지 않은 채로 비스듬히 스크린을 응시하던 저는 ‘쳇, 좋아하면 좋아하고 싫어하면 싫어하는 거지. 좋아했으면 좋겠어요는 뭐야?’ 그랬습니다. 그런데 다음 순간 “공장에서 하루 1000개씩 싸거든요”라는 순임의 말이 들려왔습니다.
그 뒤 이야기가 어느 방향으로 흘러갔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영호가 순임의 대답에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도 기억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저 장면만은 또렷하게 남아있습니다. 부끄럽지만 저는 ‘박하사탕을 하루 1000개씩 싸는’ 일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 일이 얼마나 고된지, 그 고되고 지루한 일을 어떻게 견뎌내는지 헤아릴 방도가 없습니다. 제게 그 노동은 추상의 세계에 머물러 있습니다. 겨우겨우 짐작만 할 따름이지요.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 난 새벽 쓰린 가슴 위로 /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 아 / 이러다간 오래 못가지 / 이러다간 끝내 못가지 // 설은 세 그릇 짬밥으로 / 기름투성이 체력전을 / 전력을 다 짜내어 바둥치는 / 이 전쟁 같은 노동일을 / 오래 못가도 / 끝내 못가도 / 어쩔 수 없지 // 탈출할 수만 있다면, / 진이 빠져, 허깨비 같은 / 스물아홉의 내 운명을 날아 빠질 수만 있다면 / 아 그러나 /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지 / 죽음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지 / 이 질긴 목숨을, / 가난의 멍에를, / 이 운명을 어쩔 수 없지
-박노해 「노동의 새벽」 부분, 『노동의 새벽』 풀빛, 1984
이미지출처 - 다음 영화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4
영화의 때는 1979년 가을입니다. 그때 우리 사회는 압축성장의 가파른 그래프를 그리고 있었습니다. 경제개발정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면서 급격한 산업화 바람이 불었습니다. 사람들은 도시로, 도시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당도한 도시는 그들이 꿈꾸던 미래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대부분이 공장의 저임금 노동자로 흘러들어 도시 빈민층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았지요. 아무리 일해도 가난의 굴레를 벗기가 쉽지 않았던 우리들이었습니다.
박노해의 시집 『노동의 새벽』이 나온 것은 1984년입니다. 영화와 몇 년의 시차가 있지만 이 땅의 현실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나빠졌습니다. 1956년 전라도생으로 15세에 상경하여 기능공으로 일하던 시인은 시집 『노동의 새벽』을 “저임금과 장시간노동의 암울한 생활 속에서도 희망과 웃음을 잃지 않고 열심히 살며 활동하는 노동형제들에게 조촐한 술 한상으로 바친다”고 밝혀놓습니다.
그리고 세월은 흘러 이제 우리 조국 대한민국은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를 상회하는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 되었습니다. 이들 영화와 시에서 그려지는 가난하고 소외된 노동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그들의 삶이 그 시대를 전부 대변할 수는 없겠지만, 지금 우리가 누리는 부의 일정 부분이 그들이 흘린 땀과 눈물 위에 지어졌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영화 『박하사탕』은 극중 영호가 죽은 1999년 이듬해 2000년에 개봉했습니다. 그해는 제가 막 마흔이 되던 해입니다. 극중 마흔 살 영호는 철로 위에서 “나 다시 돌아갈래”라고 절규합니다. 영화를 보면서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후로도 다시 영화를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픕니다. 영호의 시간이 우리들의 물리적인 시간과 겹쳐있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고 영호가 겪은 상처와 아픔이 우리들의 실제 삶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날 아버지는 일곱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 여동생은 아홉시에 학교로 갔다 그날 어머니의 낡은 /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 노닥거렸다 前方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 없었다 / (중략) /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 (중략) / 아무도 그날의 신음소리를 듣지 못했다 /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이성복, 「그날」 부분,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 문학과지성사, 1980
순수했던 한 청년이 망가지고 타락하는데 걸린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 시대 어쩌면 우리 모두가 그랬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우리의 지나온 세월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돌이켜보면 참 엄혹한 시절을 견뎌왔구나 싶습니다. 대학 1학년 때 5.18을 겪고 전방 입소군사훈련에 군대에 끌려(?)가 30개월 가까이 뺑뺑이를 돌고 제대를 해도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았더랬습니다. 돌아보면 20대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지요. 그러고 나니 시나브로 마흔이 되고 쉰을 통과해 육십을 바라보게 됐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지독한 악몽일까요?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왜 매일매일의 고통이, 우리가 이야기를 하는데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장면으로 거듭해서 꿈으로 번역되는 걸까?
-쁘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이현경 옮김, 돌베개, 2007.
얼마전 서울시50플러스 중부캠퍼스의 인생학교 5기 동기생들과 1박2일 워크숍을 다녀왔습니다. 살아온 사정은 서로 달라도 엄혹한 한 시대를 함께 건너왔을 그들과 하룻밤을 보내면서 따뜻한 연대감, 동질감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이 삶이 악몽의 연속일지라도 견딜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