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제수씨가 “이제 고사리나물은 다 먹었네” 하고 울었다. 지금도 제사 때면 며느리들과 딸들이 고사리나물 무쳐놓고 그 맛이 나네 안 나네 하고 두런거린다.
2014년 12월 25일 오전 1:02분에 불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인 황현산이 올린 트윗이다.
이제 고사리나물은 다 먹었네. 존재했던 한 생명의 소멸을, 먹이고 먹던 한 사람 손길의 부재를, 오래도록 기억을 불러일으킬 하나의 사물에 대해 툭, 던지는 저 한 마디의 말. 그 말이 들어간 140자를 넘지 않는 문장에서 시를 느꼈다. 마른 고사리 향까지 훅.
일상이 글이 되고 말이 시가 되는 온라인상의 공간 트위터.
황현산 트위터 아이디는 septuor1이다. 7중주, 7중주단이란 뜻. 제일 유명한 7중주 곡은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7중주 E Flat 장조 Op. 20. 세 대의 목관악기와 네 대의 현악기를 위한 작품이다. 클라리넷, 바순, 호른,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콘트라베이스의 악기 구성으로 40여 분 동안 일곱 개의 악기들이 제 소리를 내면서 물 흐르듯 함께 아름답게 흘러간다. 7중주의 하모니를 유독 좋아해서 이름을 붙이셨을라나.
황현산 트윗 모음집 <내가 모르는 것이 참 많다>도 그렇게 7중주처럼 흐르고 모이고 흩어지고 나서고 겹치면서 지나가고 끝난다.
2014년 11월 8일, “트윗을 시작합니다”부터 2018년 6월 25일 “<밤이 선생이다>. <우물에서 하늘보기> 이후 제가 쓴 글들을 모은 책입니다”까지 그대로 모은 666페이지짜리 그야말로 벽돌 책이다. 황현산의 7중주 연주라면 문학, 하루하루 일상, 정치, 언어, 사람, 사회, 문화, 이렇게 일곱 개랄까. 아니, 시, 페미니즘, 영화, 나이 듦과 병과 죽음, 세월호, 탄핵과 삶에서의 운동성까지. 결국 7중주를 넘어 이름가진 모든 것들의 움직임과 생각을 짯짯하게 썼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철학서들 말고 ‘한낱’ 트위터 모음집이 이렇게 두꺼운 양장본으로 출간될 것이라곤 생각도 못해봤다.
<내가 모르는 것이 참 많다>는 저 허허로운 온라인 공중에 3년 정도 떠 있던 황현산의 생각의 높고 낮은 지저귐을 단 한자도 편집 없이, 심지어 오자까지 그대로 실어 펴냈다.
지금도 트위터에 들어가 septuor1을 치면 이승을 떠나기 전까지 쓴 글을 읽을 수 있는데도, 돌아가신 지 일 년 지나 황현산의 방, 황현산의 밤 행사까지 치렀음에도.
속담의 폭력성에 관해 말했더니, 폭력적인 사람이 죄지 속담이 무슨 죄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속담 중에는 애초에 갑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많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 -암탉이 울면 집안 망한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 등등등.
2015년 7월 20일에 올린 이 트윗을 읽은 시간은 가을 햇살 쨍하니 맑았던 얼마 전 추석날이었다. 담양의 소쇄원에서였다. 4년 전에 남긴 말. 이토록 짧은 글들 쯤이야 순식간에 읽고 지나가리라, 생각의 조각에 불과하니 마음에 남는 것도 없으리라 싶었는데, 그렇지 않았다. 한 페이지 넘길 때마다 무릎을 칠 만큼 좋아 자꾸 포스트잇을 붙이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딱 이걸 읽고 밑줄을 그으려고 할 때 일이 벌어졌다.
추석날 아침. 포스트잇을 여러 장 붙이며 짧은 글들을 읽었다. 내가 모르는 것이 참 많다.
이른 추석이라 한낮은 아직 더워 소쇄원 오래된 대나무 길에서도 땀이 났고 제월당 낡은 마루장도 따끈했다. 딸아이들이 햇볕을 피해 그늘로 옮겨 걷는 걸 보고 애들 아빠가 말했다.
“지금 햇볕은 많이 쬐어도 돼. 옛말에도 있잖아. 봄볕에 며느리 내보내고 가을볕에 딸 내보낸다고. 봄볕에 살이 타지 가을볕엔 살도 안타고 몸에 좋다고 하잖아?”
봄볕에 자외선이 가장 많아서 잘 타고 몸에 안 좋고 가을볕은 덜 따갑고 햇볕자체가 보약에 진배없다는 제법 과학적인 근거가 있는 말을 농담 삼아 건넸을 뿐이었는데, 말 끝난 결과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가을 햇볕을 피해 양산을 쓰고 그늘을 찾던 나머지 세 사람이 다 ‘여자’였던 것. 나는 심지어 딸이자 며느리.
가을볕이 아무리 보약이라도 딸 며느리 차별해 내보낼 건 아닐 터. 말과 글에 인간관, 세계관, 가치관이 들어있다.
어차피 봄이든 겨울이든 밭에는 나가 일을 해야 하는데, 며느리가 타든 딸이 타든 속담 속의 여자가 햇볕 받으며 일하는 주인공이다. 딸과 며느리 중에 누가 더 나에게 소중한 존재인가, 라는 판단을 내리는 사람도 부모 중에 여자일 공산이 클 텐데. 딸이든 며느리든 시어머니든 친정엄마든 이 여자들은 두루 딸이었다가 며느리였다가 시어머니였다가 친정어머니가 될 터인데. 듣는 세 여자가 다 언짢아지는 속담 하나를 웃자고 던져버린 애들 아빠에게 저 트윗을 보여줬다. 절이 싫으면 그냥 떠날 게 아니라 절을 바꾸어야지, 정을 맞고 모난 돌이 둥글어지기 전에 언로를 막지 말아야지, 암탉이 울면 기적일 수도 있지, 봄볕이건 가을볕이건 기후변화가 심난하니 환경 생각도 해야지... 속담 속에 들어있는 폭력성과 갑질과 사회현상까지 이야기가 이어졌다.
남의 불행과 고통에 반드시 공감해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공감하지 않는 것과 다른 사람의 공감을 위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2016년 7월 15일
새로운 것들을 알게 될 때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게 틀렸다는 것을 알 때마다 ‘내가 참 모르는 게 많다’고 했다는 황현산의 4년 동안의 그 많은 트윗은 사실 한 줄 한 줄 마다 모두 토론을 이끌어낼 수 있는 문장들이다. 배울 게 속속 들어차있다. 어떻게 팔순의 어르신이 쓴 의견과 판단이 하나도 낡지를 않나. 황현산의 트윗이 이토록 성실하고 세밀하고 날카롭게 그러고도 귀여울 만큼 유머를 품고 속속 올라올 그 시절 나는 트위터를 많이 이용하지 않았었다. 페이스북에 코를 박고 있을 때였다.
죽순처럼 부드럽고 대나무처럼 짱짱한 말들이 모여있는 황현산 트위터 모음집.
자못 ‘인생의 낭비’라고들 했다. 트위터,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예전의 싸이월드 같은 것들. 좀 더 가면 블로그나 카페까지. SNS를 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런 저런 SNS에 몰두하는 사람들을 바보 취급하면서 아래로 보기도 했고 허영에 들뜬 사람으로 폄하하기도 했다. 허세, 나르시시즘, 삶의 전시, 생각 없음, 더해 인정욕구에 목마른 ‘관종’이라고까지 칭하며 비웃기도 했다. 내 의견을 말하고 내 사진을 올리고 내 글을 써서 올리는 사람들에게 ‘그딴 것은 일기장에나 쓰시지’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트위터나 인스타그램은 아직 발을 깊이 넣지 않고 페이스북만 하던 그 시절, 사실 고립무원의 상태에 놓여있을 때였다. 와이파이가 되는 곳에서나 겨우 들어갈 글을 읽을 수 있었던 섬마을 외딴 집, 다른 나라 오지에서 데이터 비용을 비싸게 주고라고 한글도 된, 한국 사람이 쓴 글을 읽고 싶어 전전긍긍할 때 페이스북은 그냥 하나의 책이자 친구였다. 허영이니 허세를 부릴 새도 없이 한국 사람이 쓴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한 소식이 아주 갈급했다. 좀처럼 만날 수 없는 한국어를 쓰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첩첩산중, 아니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바닷가 오지로 들어올 때 그 글들은 갈급한 내 영혼에 얼마나 위로가 되어주었는지. 그 때 황현산의 이 글들을 만났더라면 작히나 좋았을까.
개와 고양이 이야기도 많다. 동물의 친구이기도 하셨던 어른의 말.
<왕좌의 게임>에서 아리아와 늑대개의 삽화는 아리아가 고향 윈터펠로 돌아가지 않으리라는 암시로 생각했는데 이런저런 글들을 보면 내가 잘못 짚었나보다. 하긴 이 전란의 삶에 암시나 복선이 그렇게 단순할 수는 없겠지.
2017년 8월 7일.
같은 시기에, 서로 떨어진 먼 곳에서, 황현산과 내가 동시에 <왕좌의 게임>의 아리아에게 몰입하고 있었다는 것은 얼마나 친구처럼 다정한 느낌인지.
SNS로 중년의 사람들이 연애를 한다더라, 사기를 친다더라, 신상이 다 털린다더라, 사진 올리지 말라 걱정을 해댔지만 그건 큰 문제가 안됐다. 모든 디지털 도구들은 사용하기 나름이니까.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이용한 인맥이나 관계 맺기가 거의 불가능한 어느 곳에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에 기댄 랜선 인맥만이 내밀한 그들의 일기장을, 밥해 먹는 이야기들을, 사람이 살고 죽는 이야기들을, 격변하는 사회상황에 대한 뉴스를 착착 던져주었으니 차라리 더 좋았다.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던 외국에서 친구처럼 댓글로 포스팅으로 속삭이던 사람들을 한국으로 돌아와 만났을 때, 그것은 진짜 친구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처음 만나는 사이임에도 나는 여자 남자 후배 선배 가릴 것 없이 편안하게 만났고 여행을 다녔다.
황현산이 밤이 선생이다, 한 것처럼 내겐 밤만큼이나 SNS가 선생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오프라인에서와 똑같이 온라인에서도 사람과의 인연은 생겨나고 무르익고 싸우고 사라지고 죽어간다. 온라인 인연만으로도 뒤통수를 치는 이도 있고 배신자에 위선자도 있고 반면교사도 있다. 지금도 나는 트위터에서 페이스북에서 어느 날은 일기를 쓰고 뉴스를 읽고 칼럼을 연재하고 같은 의견에 동조하고 싸울 일엔 싸우고 도울 일을 돕고 슬픈 일에는 위로하고 위로받고 산다. 이러저러하게 몸이 아플 때 가장 큰 도움과 정보를 얻은 것도 그 공간이었는데 정말 신기한 것은 내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문상을 오고 조의를 표한 사람들의 대부분이 SNS에서 사귄 사람들이라는 거였다. 오래 알던 이들, 옛 사람들은 거의 만날 수 없었다.
게으른 낙관주의를 두 글자로 줄이면 설마가 된다. 설마는 단순한 부사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세계관이다.
2016년 11월 21일.
아무튼 2016년 2017년 그 요동치던 우리나라 사회와 정치상황에 대해서도 촌철살인의 트윗을 성실하게 썼던 황현산은 지금은 여기에 없다. 오롯이 책으로만 남았다. 또 어지럽고 시끄럽고 말도 안 되는 일이 하루도 머다 하고 벌어지는 요즘, 누군가 그렇게 썼다. “황현산님이 살아있어서 트윗을 한다면 오늘날 이 날들에 대해 뭐라고 쓰실까” 하고. 그런데 놀랍게도 이 책에는 지금 살아 있어 썼다고 해도 믿을 것 같은 글이 이렇게 쓰여 있다. 사람은 가고 없으나 생각과 글은 남아있고 시간은 지나갔으나 변화는 더디 온다.
140자의 속삭임과 가르침. 한글자도 버릴 게 없는 글.
인간의 다양성은 그 자체로 종의 유지에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인류의 먼 미래에는, 사회 정의를 입에 달고 살며 저 자신은 온갖 비리를 저지르고도 법망을 피해 잘도 달아나며, 남을 그 법망 속에 밀어 넣는 그런 인간들만 살아남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2015년 6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