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로 아버지와 아들 사이가 썩 좋지만은 않은 줄 압니다. 제 아버지와 저도 그랬습니다. 특히 형제 중 맏이였던 저는 젊은 시절 아버지와 내내 불화했습니다. 크고 작은 갈등도 많았지요. 나이 들어 분가한 이후로는 아버지와 만날 기회도 이야기를 나눌 시간도 거의 없었습니다. 바쁘다는 핑계였지만 한 편으로는 불편한 아버지와의 만남을 가급적 피하려 했던 마음이 컸습니다. 그렇게 사십이 되고 오십이 됐습니다.
아버지를 증오하면서 나는 자랐다, / 아버지가 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겠노라고 / 이것이 내 평생의 좌우명이 되었다, / 나는 빚을 질 일을 하지 않았다, / 취한 색시를 업고 다니지 않았고, / 노름으로 밤을 지새지 않았다, / 아버지는 이런 아들이 오히려 장하다 했고 / 나는 기고만장했다, 그리고 이제 나도 /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진 나이를 넘었지만, // 나는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한 일이 없다, / 일생을 아들의 반면교사로 산 아버지를 / 가엽다고 생각한 일도 없다, 그래서 / 나는 늘 당당하고 떳떳했는데 문득 / 거울을 쳐다보다가 놀란다, 나는 간 곳이 없고 / 나약하고 소심해진 아버지만이 있어서, / 취한 색시를 안고 대낮에 거리를 활보하고, / 호기있게 광산에서 돈을 뿌리던 아버지 대신, / 그 거울속에는 인사동에서도 종로에서도 / 제대로 기 한번 못 펴고 큰 소리 한번 못 치는 / 늙고 초라한 아버지만이 있다.
-신경림, 「아버지의 그늘」 부분,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창비, 1998
제 아버지는 시인의 아버지처럼 반면교사로 삼을 아버지는 전혀 아니었습니다. 다만 몇 차례의 판단착오와 실패로 평생 가족을 가난에 허덕이게 했다는 것이 죄라면 죄였습니다. 서울에서 나고 자라면서도 우리 형제가 어느 한 곳의 기억을 오래 가지고 있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전산화가 되기 전 주민등록표에 더 이상 전입 전출 신고를 적을 란(欄)이 없어 다른 용지를 덧대고 그 위에 새로운 주소를 기입하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만큼 이사를 많이 다녔다는 것이고, 아버지 어머니의 일생은 이삿짐을 싸고 풀고 하던 시간 속에 속절없이 흘러갔다는 생각도 듭니다. 거의 한 평생을 집 한 칸 없이 이리저리 떠돌며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얼마나 큰 마음의 짐을 갖고 계셨을까요. 누군들 가난하게 살고 싶은 사람은 없을 테지만 어떻게 해도 벗어나지지 않는 가난 앞에서 아버지가 가졌을 마음을 이제는 이해할 수도 있을 듯합니다.
가난이 부끄러운 건 아니었지만 살아오면서 가난으로 인해 많은 부분이 불편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가난 때문에 하고 싶었던 것들을 접어야 했을 때 아주 조금 서글퍼지기도 했습니다. 그 가난 속에서 저는 아버지처럼 살지는 않겠다고 다짐을 했었을까요. 대학을 마치고 여러 신문 잡지를 거치면서도 더 나은 조건(?)을 찾기 위해 전전긍긍했습니다. 그러나 삼십 년 가까이 월급쟁이의 삶을 마친 지금 저 또한 아버지의 길을 뒤따르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깜짝 놀라 자문하게 될 때가 많습니다. 우리 아이들도 자라면서 가난한 부모를 원망한 적이 있지 않을까 하고 말입니다.
돌이켜보면 짧은 기간이지만 말년의 아버지와 함께 지낼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습니다. 광화문에 있던 일터가 세종시로 옮겨가면서 아버지를 그곳으로 모셨습니다. 오래 병상에 계시던 어머니가 멀리 떠나고 아무 의지처를 갖지 못한 아버지를 홀로 둘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옛 충청남도 연기군 일대의 세종시가 아버지 고향하고 가깝다고는 하지만 친구도 혈육도 없는 새로 생긴 지방도시는 낯선 타향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래도 아들이 가자니까 따라나선 것이겠지요. 팔십을 훌쩍 넘긴 늙은 아버지와 육십이 가까운 아들이 열 평 남짓한 임대아파트의 한 공간에서 지내는 것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부자지간이지만 떨어져 산 세월이 삼십 년에 가깝다보니 일상의 사소한 것들부터 삐걱거렸습니다. 안 맞는 것 투성이었습니다.
그래도 그 시간이 있어 평생 처음 아버지와 단둘이 목욕도 하고 외식도 하고 그랬습니다. 아버지를 차 뒷자리에 모시고 온천에 몸을 담그고 나와 냉면이며 장어며 설렁탕이며를 먹으러 다녔습니다. 한 달에 한 번 공주 이발소에 들러 머리도 잘라드렸습니다. 그러면서 육십이 되도록 보지 못했던 아버지의 모습을 본 것도 같습니다.
술병은 잔에다 / 자기를 계속 따라주면서 / 속을 비워간다 // 빈 병은 아무렇게나 버려져 / 길거리나 / 쓰레기장에 굴러다닌다 // 바람이 세게 불던 밤 나는 / 문 밖에서 / 아버지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 나가보니 / 마루 끝에 쪼그려 앉은 / 빈 소주병이었다
.-공광규, 「소주병」, 『소주병』, 실천문학사, 2004
일찍이 카프카는 “나의 모든 글은 아버지를 상대로 씌어졌다. 글 속에서 나는 평소 직접 아버지의 가슴에다 대고 토로할 수 없는 것만을 토해냈다. 그건 오랫동안에 걸쳐 의도적으로 진행된 아버지와의 결별 과정이었다.”고 고백했지요. 저 또한 세종시에서 그 십 개월여 아버지와 함께 지내면서 아버지와 진정으로 결별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시간이 없었다면 저는 아버지와 화해하지도, 제 가난의 상처를 치유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팔십이 넘은 아버지는 내가 알던 아버지가 아니었습니다. 날로 쇠약해져가는 늙고 초라한 노인일 뿐이었습니다. 밤늦게 일을 마치고 돌아와 아파트 현관키를 누르는 소리가 들리며 ‘어이! 왔냐’ 하며 몸을 일으키시던 모습이 떠오르고, ‘내일 일이 생겨 서울출장 가서 며칠 못 옵니다’ 하면 티나게 실망하시던 모습도 눈에 선합니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가시고 일 년 반도 더 사시지 못하고 어머니 곁으로 가셨습니다. 가신 그곳이 어디든 그곳에서는 더 이상 아프지도, 더 이상 가난하지도 않은 삶을 이어가셨으면 하고 바랍니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 기일이 멀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