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저녁 기온이 꽤 서늘해졌습니다. 바람이 불 때 마다 가을 담긴 나뭇잎이 굴러다닙니다. 발에 걸린 나뭇잎을 물끄러미 보다가 습관처럼 올려다 본 정오의 하늘은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웠습니다. 언제 저리 높이 올라갔을까요. 저 푸른 하늘을 요양원 창으로 바라볼 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아버지를 보러 가야지 생각합니다.
오늘 엄마와 함께 아버지가 지내는 요양원에 들렀습니다. 막 낮잠을 즐기려는 듯 혹은 일상처럼 누워있던 아버지는 침대 가까이 들이대는 딸의 얼굴을 보더니 아이처럼 입가에 배시시 미소를 지었습니다. 반짝 나타난 그 웃음이 어찌나 싱그럽던지 가을 한 낮 뜻밖의 선물을 받은 개구쟁이 소년 같았습니다. 그 순간 가당치도 않게 좋아했던 시가 떠올랐습니다.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 내 가슴에 쿵쿵 거린다 / 바스락 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에리는 일 있을까 /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 너였다가 / 너였다가 / 너일 것이었다가 / 다시 문이 닫힌다.
- 황지우 / 너를 기다리는 동안 중에서
혼자서는 벗어날 수 없는 요양원 침대에 누워 행여 가족이 올까 문이 열릴 때 마다 기대했다가 실망했을 아버지의 그 마음이 느껴진 때문입니다. 간절하고 초조한 기다림으로 쿵쾅거리며 다가오는 발자국 따라 집으로 가고 싶던 아버지는 작은 침대를 벗어날 수 없는 당신 대신 잊지 말고 자꾸자꾸 오라고 배시시 미소를 보여준 것인지도 모릅니다.
자식을 앞세워야 만날 수 있는 노년의 부부는 “잘 있었어?” “응.” 하며 덤덤한 안부를 주고받습니다. 스무 살 무렵 만나 가정을 일구고 곁눈 한 번 안 주고 살아온 부부의 모습은 오누이처럼 닮았습니다. 켜켜이 얹히는 삶의 무게를 양 어깨에 지고 사느라 가을 들녘 벼이삭처럼 구부정한 등허리도 닮았습니다. 젊은 시절 까맣던 머리에 하얗게 서리 내린 늙은 부부는 함께 살 수 없어 그저 손 한 번, 발 한 번, 얼굴 한 번 만지며 애잔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봅니다.
집 주변을 돌며 운동을 하던 부모님
한 사람은 침대에, 한 사람은 의자에 앉아 바라보는 동안 무심한 딸은 급히 오느라 근처에서 사 온 간식을 주섬주섬 풀어냅니다. 아버지가 딸의 얼굴 보다 더 반가워하는 비타민이 들어간 건강음료와 밤이 제법 들어간 빵입니다. 아버지의 무료한 일상을 즐겁게 해 줄 반가운 간식입니다.
“큰 아들 이름이 뭐야?” 엄마는 어린 아이에게 묻듯이 오빠의 이름을 물어봅니다. “정00.” 아버지는 용케도 잊지 않고 오빠의 이름을 내놓습니다. “잘했어! 잘했어!” 십여 년 전 뇌출혈로 쓰러져 후유증이 남은 아버지는 자식 이름 하나 맞추고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남편이 됩니다.
엄마와 나는 약속이나 한 듯 6남매의 이름을 하나하나 다 맞춘 아버지의 등을 쓰담쓰담 하며 잘했다고 번갈아 속삭입니다. 손가락 운동에 발 운동까지 침대에서 할 수 있는 손동작 발동작을 한동안 하고는 아무렇지 않은 듯 작별인사를 합니다.
“아버지 또 올게. 운동 많이 하고 있어.” 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이는 아버지에게 손을 흔들며 뒤돌아 나옵니다. “아버지가 화장실만 다녀도 내가 같이 살 텐데.” 복잡한 마음이 웅얼웅얼 소리가 되어 나옵니다.”화장실만 혼자 가면 여기 안 있지. “ 엄마도 마음이 편치 않은지 맞장구를 칩니다. “아버지 뇌세포가 죽어서 지능이 서너 살 밖에 안 된대.” 가족이 다 아는 얘기를 묻지도 않았는데 엄마가 다시 말합니다. 할 말이 없습니다. 등 뒤로 철컥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립니다. 아버지의 감옥입니다.
일 년 전 처음 요양원에 왔을 때 아버지는 곧 집으로 가리라 생각했습니다. “잘 걸으면 집에 갈 수 있어.” 면회를 온 아들이 말했습니다. “아버지 자꾸 걷는 연습해야 돼. 그래야 집에 가지.” 면회 온 딸이 말했습니다. 한동안 아버지는 지팡이를 짚고 힘겹게 걸음을 뗄 수 있었습니다. 빨리 걷는 연습 많이 해서 집에 가자고 하면 희망으로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습니다.
얼마 전부터 아버지는 걷는 연습이 줄어들더니 “못 걸어서 집에 못가?”하고 물으면 고개를 끄덕입니다. 처음 요양원에 들어왔을 때의 놀람과 서운함과 복잡한 심정이 일 년 가까이 지나면서 체념이 된 듯합니다. 계절은 이제 막 가을 문 앞에 섰는데 아버지의 시간은 겨울 끄트머리에 섰습니다. 한동안 문이 열릴 때 마다 다시 귀를 세울 아버지. 황지우의 시처럼 아버지는 문을 열고 드나드는 모든 발자국이 행여 가족일까 가슴을 쿵쾅거리겠지요.
서소문을 지나는 철길
어스름 저녁 피부에 닿는 바람이 더 차가워졌습니다. 서쪽으로 옮겨간 태양도 하루를 보내느라 지쳐 환한 빛을 잃었습니다. 발그레한 태양처럼 올 겨울은 따뜻하면 좋겠습니다. 아버지의 겨울이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아버지가 있는 요양원 창으로 들어오는 햇볕이 아버지의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주면 좋겠습니다. 걷지 못해서 집으로 못 간다고 말하는 대신 열심히 걸어서 집으로 가겠다고 말하는 그런 겨울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올 겨울은 내 아버지와 당신의 아버지, 세상의 모든 아버지가 따뜻하게 지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과 나, 우리 앞에 다가올 겨울이 그랬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