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게 왠지 밋밋하고, 반복되는 생활이 지루해서 여행 떠날 생각을 하는 분들이 많다. 그런데, 한때 내가 그랬던 거처럼 답답하고 미칠 것 같은 심정이 되어 가출을 생각해 보는 분도 있을 거 같다.
용감하게 가출을 시도한 두 사람이 생각난다.
자기가 모범생인 것도 지겹고, 동생들과 텔레비전 때문에 싸우는 것도 지겹고, 반복되는 매일이 지겨워 가출한 아이. 나이는 열두 살, 이름은 클로디아! ‘F.L. 코닉스버그’의 <클로디아의 비밀>에 나오는 주인공.
‘클로디아’는 위험하고 흥미진진한 모험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최대한 안전하고 편안한 가출을 하려고 준비를 철저하게 한다. 저축을 제법 한 구두쇠 둘째 남동생을 가출에 끌어들이고, 작전도 치밀하게 짠다. 목적지는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클로디아’는 견학 갔던 기억을 되짚으며 답사 지도를 만들고, 미술관의 안내서들을 모아 연구도 했다. 화려한 도시 뉴욕이 좋았고, 미술관은 낮에는 분주해도 밤은 무척 안전한 곳이면서 깨끗해서 지내기도 좋았다.
또 한 사람은 질서 정연한 삶을 걷어차고 책 몇 권, CD플레이어와 옷가지 등을 궤짝에 넣고 남편에게 이별을 통보한 여인, 발렌티나. 옛 동독 라이프치히에 살며 독일 통일 후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며 허무함을 느꼈던 ‘카티 나우만’이 쓴 소설 ‘오랜된 편지’의 주인공이다.
‘발렌티나’는 30대 후반으로 결혼 14년차이다. 아이를 원하지만 쉽지가 않다. 남편은 대학시절부터 친구였고, 겉보기에 크게 하자가 있는 사람은 아니다. 다만 늘 아내를 세심히 챙기면서 가르치려하는데 문화적 취향이 많이 다르다. 주변 상황과 자신의 오라클에 따라 별 저항 없이 살던 ‘발렌티나’는 가재도구 매각 세일에서 산 궤짝을 남편에게 주고 그 안에 있던 오래된 편지들을 남편 몰래 숨겨두고 읽는다. 만약 남편이 그것의 가격을 알고 내용을 알게 된다면 야단치고 비난할 것이 뻔했고 남편이 모르는 거 하나쯤은 있었으면 싶었다.
50년 전,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어린 군인이 사랑하는 여인에게 보낸 편지들을 읽으며 ‘발렌티나’는 지적이고 사랑이 가득한 ‘게오르그 슈타인베르그’란 인물에게 막연한 동경심이 생기는데 죽은 사람이라 생각했던 사람을 요양원에서 만나게 된다.
나는 ‘클로디아'가 미술관에서 동생과 1주일 이상 지내며 겪는 일들이 참 부러웠다. 내가 만약 가출을 한다면 그대로 따라하고 싶을 정도로.......
‘클로디아’는 가출한 이유도 분명했고, 목적도 분명했다. 그것은 비밀이다. 안전하면서도 사람을 다르게 만들어 주는 비밀! 그것은 비밀을 지닌 사람의 마음속에서만 의미가 있지만, 그 사람을 크게 달라지게 만들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그 비밀은 나만의 것이기에 ‘나’를 다른 사람이 아닌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결국 ‘클로디아’는 자신만의 비밀을 갖게 되고 훌쩍 성장한 모습으로 집으로 돌아간다.
‘발렌티나’의 가출은 집으로 돌아갈 것을 전제하지 않았다. 남편은 자신은 금연을 하니까 아내에게 초콜릿을 끊으라 하고, 교통위반 딱지가 날아오면 한심하다는 충고를 한다. 독특한 취향의 이웃 친구를 이해 못 하고, 동네에서 벌어진 작은 사건조차도 결국엔 시어머니, 시누이, 남편에게 다 전달되는 현실. ‘발렌티나’가 마당 한쪽에서 애지중지 키우며 기쁨을 나누던 초롱꽃이 남편에 의해 잘려나가 생일상 꽃다발이 돼버린 참혹함. 뭐 하나 숨겨지지 않는 마을과 집이란 공간에서 ‘발렌티나’는 견딜 수가 없었을 것이다.
지난해에 내가 도슨트로 활동하는 아람 미술관에 초대받은 조각가가 ‘여성 조각가의 행동 풍부화’란 제목으로 작품을 전시한 적 있다. 요지는 자연을 떠나서 동물원에 갇혀 있는 동물들이 조금이라도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최소한의 여건을 만들어 주는데, 그것을 ‘동물 행동 풍부화’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작가는 그것에서 착안해 여성 조각가인 자신의 삶과 작업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들을 작품으로 표현했다고 한다.
나도 생각해 보니 ‘나를 위한 행동 풍부화’의 조건들이 있다. 그것은 바로 ‘나만의 공간’, ‘나만의 시간’이다. 뭐 큰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다 드러 내놓고 싶지 않은 마음, 미주알고주알 떠들고 싶지 않은 것도 있고 다른 이의 간섭이 하나도 없는 세상 편하게 널브러져 있을 수 있는 공간도 필요하다.
‘클로디아’와 ‘발렌티나’에게도 필요했던 바로 그것!
사람들은 혼자 살기는 어렵다. 어울렁 더울렁 섞여 살며 사는 것이 좋다. 그렇다 해도 나만의 시간, 나만의 공간이 없다면 숨이 막혀버릴 지도 모른다.
나는 결혼 전에 남편에게 결혼하면 뒹굴뒹굴 같이 책을 보면 좋겠다고 말했었다. 그런데 남편은 책 읽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가끔 그것이 답답할 때도 있지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내가 읽는 책뿐만 아니라, 내 수첩이나 일기장에도 전혀 관심이 없으니.......
한때 나도 가출을 꿈꿔보곤 했다. 식구들이 너무 많았다. 시어머니, 시누이 둘, 시동생, 남편과 아들, 딸. 그땐 참 힘들었다.
지금은 아이들까지 성장을 해서 독립했고, 시어머니도 먼 세상으로 떠나셔서 집에서도 나만의 시간이 많아졌다. 나만의 공간은 겨우 책상 하나의 공간뿐이라 좀 아쉽지만, 나만의 공간을 좀 더 확장하기 위해 궁리 중이다. 그래서 이젠 가출을 꿈꾸진 않는다. 가끔 여행을 계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