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이 팔렸다.

집이 팔렸다, 라고 엄마가 전화로 알려왔다.

엄마, 아버지가 오랜 전세살이를 끝내고 처음으로 마련한 집이었다. 사십 년 넘게 살아온 집이었는데, 아버지가 삼 년 전에 돌아가시고 엄마의 거처를 자식들 가까이 옮기기로 하면서 팔게 되었다. 오래된 단독주택이어서 해마다 한두 군데씩 보수를 해오던 터라 엄마는 그 집을 관리하기 힘들어하셨다. 그래서 작자만 나서면 팔고 싶다는 말씀을 자주 해오셨지만 단독주택이라 거래 기회가 자주 오지 않았다. 그러다가도 막상 누군가 적극적으로 매수 의사를 밝히면 뒷걸음치기 일쑤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부동산에서 매매 의향을 묻는 연락이 오자 엄마는 정말 팔아야겠다는 마음을 굳히셨고 하루 이틀 새에 흥정이 오가면서 거래가 결정되었다. 몇 번이고 엄마의 의지를 확인한 후에 가계약금을 받기 위해 집주인인 엄마의 계좌를 대신 알려주려고 부동산에 문자를 보내는데 손가락이 파르르 떨렸다. 터치하는 순간, 계약은 정말 성사되는 것이고 집은 팔리는 것일 테니. 문자를 보내고 여러 감정이 북받쳐서 한동안 눈물을 흘렸다.

그날 오후, 수강하고 있는 문화 기획 모임에서 마을을 새롭게 돌아보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늘 지나치는 골목을 주제를 정해 여유 있게 둘러보는 시간이었는데, 문득 골목에서 문패를 찾아보자는 생각이 들어 이 집 저 집의 대문을 유심히 보게 되었다. 대부분 빌라와 다가구로 바뀌고 어쩌다 남아있는 단독주택들은 대개 덩그러니 주소 현판만 있었는데 그중에 문패가 있는 집을 두 채 발견하였다. 자연스레 아버지의 문패가 떠올랐고 다시 눈물이 나왔다.

한자로 아버지의 함자 석 자가 쓰인 검은색 문패를 걸고서 너무나 기분 좋게 웃으셨던 아버지와 엄마, 그리고 그 집이 생각나서.

 

 

내가 그 집에 이사 간 것은 중학교 3학년 때였다.

네 칸의 방이 있고 마루 한가운데에 기둥이 있었다. 집의 지지대 역할을 했던 그 기둥은 베니어판으로 머리 높이쯤에 나팔꽃이 피어 벌어진 모양으로 장식이 되어 있었는데, 큰언니는 그 기둥 때문에 그 집이 마음에 들었다고 했다.

ㄱ 자로 생긴 마당엔 작은 화단이 있어서 봄부터 가을까지 외할머니가 가꾸는 화초가 가득했었다. 그리고 겨울이면 마당 한쪽의 흙을 파내고 김칫독을 묻었다. 겨우내 살얼음이 낀 김장 맛의 백미는 세밑 행사 때였다. 한 해가 저무는 날, 우리 집은 온 가족이 텔레비전 앞에 모여서 연말가요대상을 보며 자정이 되기를 기다렸다. 드디어 보신각종이 울리면 각자 마음속으로 새해의 소망을 기원했고(무지 순박했었다, 시대 자체가), 그런 다음 김칫국에 국수를 말아 먹는 걸로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았다. 겨울 김칫독에서 갓 꺼낸 김칫국은 살얼음이 끼어 잇속이 시릴 정도로 차서 먹다 보면 한기가 느껴져 이불을 두르고 먹어야 할 정도였다.

나중에 할머니는 화단을 가꾸는 것만으론 성이 차질 않았는지 옥상 한구석에 텃밭을 꾸미기에 이르렀다. 호박, 수세미 정도의 작물이었는데 옥상으로 물을 들고 올라가기가 힘들 때는 우리를 부르곤 했다. 할머니가 마당에서 물통에 물을 담아주면 옥상에 올라가서 우물가에서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올리듯 끌어올리는 건 우리 일이었다. 그렇게 키웠던 수세미나 여주가 옥상에서 아래로 덩굴을 내리면 내 방 창문 너머 푸른 잎이 무성해지고 여름 햇볕을 가려주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도 결혼을 해서 그 집을 떠난 후에 엄마가 어디서 구해 왔는지 마당에 대추나무를 심었는데 한동안 실하게 대추가 열려 가을 한때를 행복하게 해주었다.

 

 

식물들뿐 아니라 여러 동물도 그 마당에서 생사고락의 시간을 보냈다. 언젠가는 시골에서 토끼를 얻어다 키운 적도 있었는데 어미 토끼는 갓 낳은 새끼가 사람 손을 타면 새끼를 물어 죽이는 일이 일어나곤 했다. 한번은 아직 살아남은 새끼를 방에 데려다 놓았다가 죽인 적도 있었다. 추울까 봐 이불 속에 넣어 두었는데 아버지가 모르고 밟아서 빚어진 참사였다.

닭을 키운 적도 있었다. 대학 다닐 때 봄철에 등굣길에 병아리를 사서 서클룸에 두었다가 집에 데려간 적이 있었는데 곧 죽을 거란 예상과 달리 세 마리가 중닭으로 잘 자랐다. 서클룸에서 병아리를 보았던 친구들은 이따금 장난치듯 병아리의 생사 여부를 묻곤 했다. 병아리를 집에 데려다 놓았을 뿐 신경을 쓰지 않았던 나와는 달리 할머니는 점차 닭 꼴을 갖춰 가도록 애지중지 돌보았다. 할머니에겐 다른 목적이 있었으니…. 그해 여름, 우리 집 식탁에 올랐다는 비보를 친구들에게 전하게 되었다.

내가 결혼한 이후엔 강아지도 한 마리 키웠다. 그때야 개를 마당에서 지내도록 했는데, 개장수가 골목을 휘젓고 다니던 다음 날 없어져서 끌려갔을지도 모른다는 심증만 남아 있을 뿐이다.

 

 

나중에 대대적으로 집수리를 하기 전까지 겨울이면 연탄으로 난방을 했는데, 애들이 등교를 하면 하루 종일 비어있는 방을 쓸데없이 데우고 있는 것을 할머니는 아까워하셨다. 그래서 다른 방은 놔두고 당신과 내가 함께 쓰는 방에 새벽쯤이면 저절로 꺼져버릴 정도의 연탄을 아궁이에 넣곤 하셨다. 아침에 잠에서 깨었을 때 한기가 느껴져 몸이 으슬으슬한 것이 싫었던 나는 그때마다 짜증을 내면서 다른 방의 따뜻한 이불 속으로 파고 들었던 적도 많았다.

방을 함께 썼던 외할머니는 밤이면 김영임의 〈회심곡〉을 듣곤 하셨는데 난 그 소리가 듣기 싫어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었다. 할머니가 얼른 자라고 채근을 하시다 주무시면 새벽 두세시까지 책을 보거나 음악을 듣거나 뭔가를 끄적이며 밤을 보내곤 했다. 그러다 가끔 언니 방에 건너가 긴 수다를 떨기도 하였다.

 

외할머니와 부모님, 자식들이 북적였던 집이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형제들이 줄줄이 결혼과 독립으로 집을 떠나기도 했다가 새 식구를 맞기도 하고 조카들이 태어나며 아이들로 다시 북적이기도 했다. 그 세월을 버티는 동안 집은 낡아가고 두 번의 리모델링을 거치며 모습이 달라지기도 했지만 초록 철제 대문은 사십 년 세월을 고스란히 담아 녹슬어 있다.

이사 가서 결혼하여 집을 떠나기까지 십여 년, 이후 친정이란 이름으로 드나든 지 삼십 년, 지면에는 옮기지 못할 기억들이 어찌 무성하지 않을까? 십 대 중반부터 이십 대 중반까지 인생에서 가장 예민하고 꿈도 많고, 눈물과 웃음이 넘쳐나던 그 시절, 내 아름다운 청춘의 기억들이 내밀하게 숨겨져 있던 곳, 이별이 다가오고 있다.

 

정류장에서 버스를 내린다. 버스 가는 방향으로 이십 보 정도 걷다가 약국을 보면서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가면 기다란 골목이 눈앞에 펼쳐진다. 그 길을 노래 한 곡을 부르며 걷다가 마칠 즈음 골목이 거의 끝나가고 끝까지 가기 직전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꺾는다. 한 집 지나서 다시 왼쪽, 네 집이 대문을 마주 보는 작은 골목이 나오고 끝에 아버지의 문패가 걸린 초록색 철대문집이 있다. 끼익, 쇳소리를 내며 대문을 열고 들어가 작은 마당을 건너 흰색과 고동색 타일로 외벽이 장식된 단층 양옥의 현관문을 열며 인사를 한다. “다녀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