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너튜브에서 음악을 찾던 중, ‘내 꿈은 컬러꿈’이라는 동영상 제목을 발견했다. 부산국제영화제 특별상영작 예고편이었다. 그 제목이 어찌나 반가운지, ‘어? 나도 그런데!’라고 소리지를 뻔했다. 나는 컬러꿈을 꾼다. 아니 그렇게 알고 있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나이 컬러꿈은 일곱 살 무렵에 꾼 꿈이었다. 어린 은영이가 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진한 보랏빛 치마를 입고 그네를 타고 있었다. 집앞 초등학교 운동장 한 켠에서 느린 동작으로 움직이는 그네. 그 위에 서서 바람을 가르며 마냥 웃는 나. 담벼락에 둘러선 초록빛 나무들은 ‘샤라라’ 소릴 내며 흔들렸다. 지극한 가난에 ‘아이다움’을 잃고 너무 일찍 어른스러운 척을 했던 내게, 보라색과 초록색이 바람 타고 하늘거리던 그 꿈은 오래도록 위로가 되어주었다.
컬러꿈을 꾼다는 확신 때문인지 타고 나길 그리 났는지, 아무튼, 나는 무채색이 지배하는 시・공간을 병적으로 싫어한다. 어쩌면, 진짜로 병에 걸린지도 모르겠다. 주차장에 즐비한 무채색 승용차들을 볼 때, 블랙 군단이 넘실대는 겨울철 길가를 볼 때, 하늘 높이 치솟아놓고서 ‘드러나면 안 된다, 꼭꼭 숨어라’ 하듯이 비슷비슷한 잿빛의 건물들을 볼 때, 진심 폭폭해진다. 획일적이고 천편일률적인 풍경 앞에 설수록 더, 색다른 것을 찾는 내 심정에 공감을 표할 당신을 위해, 오늘도 ‘썸씽 스페셜’한 영화 목록은 이어진다. 아, 우리의 기억을 돕기 위해, 지난 4회차에 실린 영화들을 더듬어 본다면? [더 랍스터, 화성침공, 지구를 지켜라!, 시계태엽 오렌지, 존 말코비치 되기, 아모레스 뻬로스, 희생], 이렇게 일곱 편이었다.
8. 프란시스 하 Frances Ha (2012. 미국. 노아 바움벡*마이어로위츠(2017)*. 그레타 거윅,아담 드라이버)
브루클린의 작은 아파트에서 단짝 소피와 동거 중인 뉴요커 프란시스. 무용수로 성공해 뉴욕을 접수하겠다는 꿈을 꾸지만 현실은 몇 년째 평범한 연습생 신세일 뿐. 우정도, 직업도, 사랑도, 무엇 하나 쉽지 않은데... 가만? 이건 바로 우리네 젊은이들의 현실이지 않나? 빽없고 돈없는 젊은 여성 프란시스는 어떻게 홀로서기를 겪어내는지, 그 성장의 이야기가 세밀하되 무겁지 않게 펼쳐진다. 귀기울여주는 이 하나 없어도 프란시스가 계속 자신의 이야기를 주절거리듯, 영화 전체는 흑백화면으로 담담히 흐른다. 한국에서는... 좀처럼 제작되기 어려운 영화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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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파이트클럽Fight Club (1999. 미국&독일. 데이빗 핀처세븐(1995)/벤자민버튼의 시간의 거꾸로 간다(2008)/나를 찾아줘(2014). 브래드 피트,에드워드 노튼)
흔히, ‘식스 센스The Sixth Sense(1999, M 나이트 샤밀란 감독)급 반전’이란 표현을 쓴다. 하지만 그건 이 영화를 만나기 전의 표현일 것이다. ‘파이트 클럽’에 와보라, ‘역대급 반전’은 진정 이럴 때 쓰는 말임을 알게 될 터이니. 남자들의 핏빛 놀이터이자 세상에 폭력으로 저항하는 조직 ‘파이트 클럽’을 보는 것도 흥분되겠지만, 브래드 피트의 인생 연기, 에드워드 노튼의 미친 연기력 그리고 조명을 특별하게 쓸 줄 아는 감독의 영상미를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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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델리카트슨 사람들Delicatessen (1991. 프랑스. 감독 쟝 피에르 쥬네&마르크 카로. 출연 도미니크 피뇽)
세상이 황폐하고 식량을 못 구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인육을 먹는 게 당연시되는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번득이는 식칼을 휘두르며 고기 분배를 독점하는 푸줏간 주인이 일정 공간 속 사람들을 통제하고 감시한다? 분명 스산하고 어두운 분위기를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영화 “델리카트슨”엔 놀랍도록 기상천외한 판타지적 미장센들이 넘쳐난다. 단언컨대, 이보다 더 독특하고 기발한 화면들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캐릭터들은 하나하나 개성 넘치다 못해 기이하다, 다 모아놓으면 그냥 평범한 동네 주민들, 도시 속 무명인들일 따름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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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13구역Banlieue 13(2004.프랑스.감독피에르 모렐. 출연시릴 라파엘리,데이비드 벨)
‘작품성이고 스토리고 필요없다, 온 몸이 뻥 뚫릴 시원한 액션 어디 없을까?’ 싶다면 망설이지 말고 “13구역”을 만나보라! 컴퓨터 그래픽이나 스턴트액션 따윈 없다. ‘파르쿠르Parkour;도심에서 도구와 장비 없이 건물을 기어오르거나 건물과 건물 사이를 뛰어다니며 체력을 단련하는 고난도 스포츠’를 창시한 데이비드 벨이 직접 출연해, ‘저게 인간이 할 수 있는 액션인가?’ 싶을 정도로 현란한 이동 기술을 보여준다. 헐리웃산 액션물과는 사뭇 다른, 말 그대로 맨몸 액션의 최고봉이다. 단, 그외 것엔 지그시 눈을 감아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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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애정만세Vive L'Amour (1994. 대만. 감독 차이밍 량. 출연 이강생,양귀매,진소영)
대만영화, 그것도 무려 1994년도 작품을? 기억할 만하다. 상영관에서 나 혼자 본 영화인데, 엔딩크레딧이 끝나고도 내 울음이 그치지 않았으니까. 이 영화는 타 영화들에 비해 유난스럽게 적은 것이 있다. 대사가 있는 출연진은 대도시 속 비루한 젊은이 세 명 뿐인데 그나마 말이 별로 없다. 인공의 효과음이나 배경음악이 없다. 그래서 참 조용한 영화지만, 도시의 일상이 만들어내는 소음들, 즉 도시의 백색소음은 계속 들린다. 그 시도가 무던히도 맘에 들었었다. 주인공들이 느끼는 외로움과 삭막함을 어찌나 잘 전해주던지. 영화의 마지막은 여주인공이 공원 벤치에 앉아서 우는데 롱테이크로, 장장 6분 정도 이어진다. 오직 흐느끼는 그의 얼굴만 봐야 한다. 그게 관객에겐 당혹스럽거나 지루하거나 혹은 감동적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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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페르세폴리스Persepolis (2007. 프랑스&미국. 애니메이션. 감독 마르잔 사트라피, 빈센트 파로노드. 출연 키아라 마스트로얀니, 까뜨린느 드뇌브)
얼마 전, 남산의 만화도서관에서 본 그래픽노블, “페르세폴리스”가 흑백애니메이션 영화로 나왔는데 아직 만나질 못했다. 50+영화 벗들에게 추천하는 동시에 나도 꼭 보고픈 영화다. 롤러코스터 같은 현대 이란사, 즉 왕가의 몰락과 혁명, 그리고 전쟁을 겪으며 성장한 소녀 마르잔! 그의 삶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잘 몰랐던 이란의 역사, 그 속에서 따뜻한 유머와 당당함으로 삶을 이어온 여성들의 이야기를 만날 것이다. 누군가는 강력하게 주장한다, 죽기 전에 꼭 봐야할 영화라고. 그 때가 언제인지 알 수가 없으니, 미리미리 봐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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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