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창기 한국계 전염병 전문의·에이즈 전문가
서병세 미국 템플대학교 의대 종신교수,
한센병·에이즈·지카 퇴치에 매진하다
자유와 독립의 상징인 미국의 옛 수도 필라델피아. 영화 애호가라면 지난 1993년 톰 행크스가 에이즈 환자로 열연해 아카데미 주연상을 거머쥔 영화 <필라델피아>를 떠올릴 것이다. 이 영화가 나오기 10년 전 바로 이 도시에서 에이즈 환자가 처음 출현했을 때 사투를 벌인 의사가 템플대학교 부속 병원의 서병세(徐丙世·74) 박사다. 최초창기 한국계 전염병 전문의이자 에이즈 전문가인 서 박사는 요즘 지카바이러스 퇴치에 힘을 쏟고 있다. 늦가을인데도 장미꽃이 예쁘게 피어 있는 필라델피아 교외의 자택에서 템플대 의대 종신교수인 서 박사를 만났다.
그의 하루 일과는 빡빡하다. 담당하는 입원환자만 50명 수준. 하루 6~10명의 입원환자를 정밀 진료하고 외래환자도 따로 본다. 환자별 진료시간은 통상 30분에서 1시간. 여기에다 거의 매일 인턴, 레지던트 및 펠로우를 대상으로 30분 정도의 강의를 하고 입원환자 회진과 의과대 학 강의까지 하다 보면 하루 8시간의 근무시간을 훌쩍 넘길 수밖에 없다. 많은 환자를 진료해야 하는 국내 의사들이 미국 의사를 부러워하지 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교수 정년을 10년이나 넘긴 종신교수인 점을 감안하면 과중한 일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서 박사는 다른 의사와 똑같이 일하 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인터뷰 일정을 주말로 잡은 것도 주중에는 시간을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전염병 연구와 치료, 사회봉사에 매진해온 외골수의 삶
서 박사가 요즘 외래에서 전담하고 있는 분야는 여행건강클리닉. 생소 하지만 말 그대로 여행자를 위한 의료 서비스다. 아프리카 등지로 여행 하는 경우 황열병, 말라리아, 장티푸스 등에 대비한 예방조치를 취하고 풍토병에 대처하는 방법도 알려준다. 요즘은 지카바이러스가 요주의 대상이다. 지카바이러스가 중남미 지역에서 플로리다로 확산되면서 미국에서도 비상이 걸렸지만 공포심을 가질 필요는 없다는 것이 그의 조언이다.
“모기에 물리지 않는 것이 최선의 예방책이지만 감염이 되더라도 너무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지카바이러스는 감염되어도 80% 정도는 아무런 증상이 없고 여성 체내에서는 1개월, 남성 체내에서는 6개월밖에 견디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기간 동안 임신을 피해 소두증 아이 출산을 막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서 박사는 내년에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학회에서 지카바이러스에 대한 연구 내용을 소개할 생각이다.
서 박사가 전염병에 관심 갖기 시작한 것은 지난 1962년. 중앙대학교 약 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세브란스 의과대학에서 조교생활을 하면서 한센병 연구와 치료의 선구자였던 (고)유준 박사를 도와 한센인을 돌본 것이 평생의 업이 되었다. 반세기를 훌쩍 넘긴 전염병과의 싸움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환자는 그가 처음으로 에이즈 진단을 내렸던 청년 알렉스. 잘생기고 유능했던 알렉스는 어느 날부터인가 퇴근을 하면서 집으로 연결되는 고속도로 출구를 번번이 지나쳤다. 뇌 기능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병원을 찾았는데 에이즈로 판명됐다. 에이즈가 뇌까지 침투한 상태였다.
호흡이나 신체 접촉으로도 전염될지 모른다는 공포심이 전염병보다 더 빠르게 전 세계로 확산되었던 그 당시, 서 박사는 에이즈 환자들의 구원자이자 친구였다. 일가친척들도 천형으로 여겨 기피했던 에이즈 환자들을 스스럼없이 대하고 접촉했다. 소록도의 한센인들을 친구처럼 대했던 유준 박사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한 것이다.
“의사로서 큰 자괴감을 느꼈던 시기였습니다. 치료 방법이 없어 저나 환자나 유일한 희망은 치료제가 개발될 때까지 생명을 연장시키는 것 이었지요. 에이즈 환자는 남이 자신을 기피하는 데 대해 극도의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어 인간적인 유대감을 쌓는 것이 치료의 첫걸음이었습니다. 다른 환자와 다를 게 없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이 중요했지요. 에이즈는 혈액과 정액으로만 감염되기 때문에 꺼릴 이유도 없었습니다.” 서 박사는 당시 절박 했던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에이즈 판명을 받으면 1년을 넘기기가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알렉스는 임종 때 부모의 애타는 목소리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나 서 박사의 작별인사에는 잔잔한 미소로 화답했다. 장례식이 끝나고 그의 부모는 알렉스가 서 박사에게 남긴 마지막 선물을 전해줬다. 알렉스의 투명하고 깨끗한 마음을 담은 크리스털 볼이었다. 서 박사는 이 크리스털 볼을 곁에 두고 보면서 의사의 사명을 되새겨왔다. 서 박사와 알렉스의 애잔한 일화를 들으면 영화 <필라델피아>를 바로 떠올리게 된다. 그런데 정작 서 박사는 여태 이 영화를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면서 쑥스러워했다. 전염병 연구와 치료, 그리고 강의와 사회봉사에 매진해온 외골수의 삶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에이즈 공포가 절정에 달했던 1989년, 서 박사는 국회초청으로 보건사회위원회에서 에이즈의 특성과 예방대책을 강의하는 등 에이즈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바로 잡으려 애를 썼다. 그의 활약이 언론매체를 통해 국내에도 알려지면서 에이즈 환자와 가족들의 간절한 요청이 줄을 이었다. 그 당시 국내에는 에이즈에 대처할 의료체제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다. 혈우병 치료를 위해 혈장 수혈을 했다가 에이즈에 감염된 한 소년과 부모는 서 박사에 게 치료를 받기 위해 아예 필라델피아로 이주 하기도 했다.
미국 의료계에서 존경받는 명의로 우뚝 서다
서 박사가 치료한 에이즈 환자는 수백 명. 여기에다 전문의 양성과 치료법 연구에 매달리느라 번번이 휴가를 건너뛰었다. 미국국립보건원(NIH)과 파이저, 바이엘, 후지사와 등 굴지의 제약회사로부터 연구비 지원이 쇄도했다. 그가 중심이 돼 설립한 템플대 전염병센터의 의료진은 3명에서 8명으로 늘었고 전문의 2명이 에이즈를 전담하게 됐다. 그는 이런 공로로 1984년 종신교수로, 1990년에는 정교수로 임명되었다. 템플대 의대 내과에는 104명의 쟁쟁한 교수가 몸을 담고 있지만 종신교수는 3명뿐이다.
“이제는 에이즈 환자도 일상생활을 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정도로 의술이 좋아졌지만 여전히 감염자가 늘고 있어 걱정입니다. 미국의 에이즈 바이러스 보균자는 120만 명 정도이며 이 가운데 40% 정도가 에이즈 진단을 받은 것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동성연애와 마약주사, 문란한 성생활 등이 주요인이지요.” 서 박사는 에이즈 치료 업무를 그가 양성한 의사들에게 넘겼지만 여전히 많은 관심을 쏟고 있다. 그가 세계 최고로 손꼽히는 미국 의료계에서 보이지 않는 차별을 극복 하고 이처럼 존경받는 명의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은 미생물 관찰과 연구가 그의 취미이자 천직이었기 때문이다. “실험실에서 현미경으로 보는 미생물의 세계가 너무 흥미로웠습니다. 그 작은 생물이 자연계와 인류에 끼치는 영향이 엄청나잖아요.”
미생물학 교수가 되겠다며 달랑 25달러 들고 미국행 그는 지난 1964년 미생물학 교수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인천항에서 미국 해병대 군함에 올랐다. 나가사키 현 사세보 항을 거쳐 17일 반 만에 샌프란시스코 인근 오클랜드에 도착했다. 거기서 최종 목적지인 캔사스 주 로렌스까지는 버스로 52시간을 더 달려야 했다. 캔사스대학의 미 생물학과 조교로 부임하는 여정은 멀고도 험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긴 여정이었지만 그때는 마냥 즐겁고 마음이 부풀어 있었습니다. 미국으로 올 때 손에는 버스비 25달러밖에 없었습니다. 미 군용선 운임 108달러는 후불 조건이라 조교 월급 200달러를 받아 바로 갚았습니다.” 동양인이라고는 혼자밖에 없어 외롭고 가난한 생활이었지만 유일한 취미인 연구에 푹 빠져 2년 만에 석사, 또 2년 만에 약학박사 학위를 받 을 수 있었다. 그때 그의 나이 26세. 국내와 미국의 대학에서 교수직 제의가 있었지만 그의 관심은 유독한 황화수소를 발생시키는 세균 연구 에 쏠려 있었다. 그래서 아이오아대학에서 생화학을 연구했고 의학 공부를 해보라는 선배의 권유로 마이애미대학 의대 박사 코스에 지원해 1056명의 지원자 중 20명을 선발하는 관문을 통과했고 2년 만에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후 위스콘신대학에서 인턴과 레지던트 과정을 거쳐 내과 전문의 자격을 받았다.
봉사와 기부는 삶의 활력소
템플대학교 의대 조교수로 부임한 서 박사는 약학, 미생물학, 생화학, 의학을 두루 섭렵한 경력을 살려 신장 독성물질 제거제를 개발하는 등 많은 연구 성과를 올렸다. 그의 명성이 국내로 알려지면서 제약회사 고문으로 위촉되는 등 국산 약품 개발과 미국 시장 진출의 길잡이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필라델피아 인근에 거주하는 3만여 명의 교민들에게 서 박사는 든든한 버팀목이다. 긴급 환자가 생기면 제일 먼저 그를 찾는다. 형편이 어려운 교민들에게 무료 진료를 하는 것도 그의 일상이다. 의학을 공부하는 교민의 자녀들에게는 롤모델이고 그의 추천서는 진로에 결정적인 도움이 된다. 서 박사의 지도를 받아 미국 약사 자격을 취득한 약사 출신 교민도 10명이 넘는다.
봉사와 기부는 삶의 활력소다. 1983년부터 해마다 디너파티와 골프대회 등 다양한 행사로 성금을 모아 장애우보호시설인 홀트일산복지타운에 지원한 금액은 30만 달러를 넘어섰다. 어렵던 시절 그에게 장학금을 준 대학에는 기부금으로 보답하고 있다. 특히 지난 2002년에는 재미 한인의사협회(KAMA) 회장으로 선임돼 미국과 한국 의료계 간 협력 증진을 위해 온 힘을 쏟았다.
서 박사는 1974년 잠시 귀국해 맞선을 보고 바로 결혼했다. 부인 이영주 씨와는 말다툼 한 번 하지 않을 정도로 금슬이 좋다. 변호사와 의사로 활동하고 있는 세 자녀는 기쁨이고 희망이다. 세 자녀는 모두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집에서는 우리말을 유창하게 사용한다. 우리말을 하지 못 하면 한국인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고 결국 관계가 단절될 수밖에 없다는 서 박사의 가르침과 뜻을 잘 따른 덕분이다.
서 박사는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의료와 강의와 봉사활동을 계속할 작 정이다. 그의 건강 비법은 일주일에 적어도 3일은 5㎞ 이상 걷고 3일은 2.3㎏ 무게의 아령을 양손에 들고 45분 이상 근력운동을 하는 것. 넓은 정원의 꽃나무와 잔디를 가꾸는 것도 건강에 큰 도움이 된다. 골프도 즐기지만 일과가 바쁜데다 요즘은 동반자도 마땅치 않아 한 달에 한두 번 라운딩을 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양주 한 병을 거뜬히 마셨고 9개 층의 입원실을 계단으로 오르내려 젊은 의사들이 따라오기 힘겨워했는데, 요즘은 체력을 과신하지 않고 많이 조심합니다.” 회계학으로 유명한 맨해튼의 버룩대학에서는 100세 넘은 교수가 몇 해 전까지 강의를 계속해 많은 부러움을 샀다. 서 박사의 의료와 봉사활동도 이처럼 오래 계속되기를 기원해본다.
글·사진 남진우 뉴욕 주재기자 njkor@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