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되었다. 자주 그랬다. 연원을 알 수 없는 버릇이나 습관이었다. 어딜 나갔다, 하면 돌을 주워왔다. 돌이 있는 자리가 못 잊을 장소가 아니어도, 멀고 낯선 먼 곳이 아니어도 꼭 그랬다. 여느 소녀들처럼 조개껍질이나 소라껍데기를 줍지 않았고, 소라를 집어 들어 귀에 대지 않았다. 소라가 내 귀를 똑같이 닮아서 한때는 놀랐지만, 파도소리 바람소리는 청력이 시원찮은 진짜 내 귀로도 충분했다. 소라 속 파도 소리는 의외로 너무 소란하고 스산했다. 귓바퀴를 스쳐가지 않고 곧장 귓구멍으로 쳐들어오는 바다물결 소리가 귀곡성처럼 슬펐던 날로부터 더 이상 소라 줍기를 단념했다. 구멍이 숭얼숭얼 뚫린 흰 뼈 같은 산호는 가끔 주머니에 넣어왔다. 돌은 달랐다. 애초부터 돌은 소라껍데기나 산호처럼 무슨 말을 하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지, 어느 순간, 돌하고 눈이 딱딱 마주쳤다. 부싯돌 부딪쳐 불씨가 생겨나는 것처럼 아무 ‘염’도 없이 걷다가 내 눈빛이 닿은 돌들이, 진짜로 반짝, 빛을 마주 보냈다.

잘 생기고 예쁜 돌이 아니었고 무늬가 출중한 것들도 아니었다. 다만 웬일이야, 눈이 마주쳤을 뿐. 눈이 맞은 돌을 두고 그냥 갈 순 없었으나 집에 가져다 어디에 쓸 요량이 없었다. 동치미를 누를 것도 아니었고 누질러 놓을 만큼 들뜨는 마음도 없었다.

우리 집엔 화분 하나 없으므로 반반히 놓을 데도 없었다. 꽃 밭담을 둘러서 내 꽃들을 싸안고 싶어도 내 집에는 흙 한 톨 없었다. 나무 하나 꽃 한 송이 안사는 집이고 그런 사람이었다. 게다가 이래 뵈도 수석이야, 보란 듯이 놓아둘 장식장이나 선반도, 틈도 새도 없었다.

 

 

그러나, 그렇지만, 불이 날만큼 세차게 부딪친 그 눈빛을 두고 올 수 없어서 돌은 언제나 내 주머니에 들어왔다. 흙덩이가 묻은 채, 이끼가 끼어 미끄럽게 파랗거나 빗방울을 머금거나 바닷물에 절여진 채. 원피스 주머니에, 벗어둔 모자에, 배낭 옆 주머니에 집어넣은 돌들은, 무겁게 서로서로 돌돌돌 소리를 냈다.

 

나랑 집에 가자. 돌에게 한 말은 그것 뿐.

 

왜, 왜냐고 물었다. 사람들이 까닭을 물었다. 세탁기 옆에 벗어둔 옷에서 굴러 나온 돌들을 맑은 물에 넣어 설거지하듯 그 몸을 씻어주고 있으면 그 돌은 무슨 의미냐고 어서 말하라고 채근해댔다. 응응. 보던 책을 눌러놓을 거야, 대답했다. 예쁜 것도 아니고, 훌륭한 모양도 아닌데? 무겁지도 않아? 그 멀리까지 가서 보석도 아닌데 그 돌만 들고 온 거야? 책 누를 돌은 이미 가득이잖아. 열권을 펼쳐 놓고 눌러도 남을 만큼 많은 게, 네가 주워온 돌들이잖아, 같이 사는 사람들이 말했다.

 

 

그런 영화가 있어. 소설이 먼저 있었고, 그리고 실제 있었던 일이야. 헐렁한 원피스 양쪽 주머니에 조약돌을 자꾸자꾸 집어넣고 강물 안 쪽으로, 은색 물살을 헤치고 쑥쑥 깊이 들어가던 버지니아 울프. 그녀가 강물 속에 저의 몸을 누질러, 누질러 놓듯이. 다시는 이 몸 물 위로 떠오르지 말기를, 돌 쥔 손을 꼭 잡았던 그 '세월'의 쇠약하고 예민한 여자처럼 그 무엇이라도 뭐 눌러놓고 싶었나 보아, 혼잣말을 했다.

병상 침대에 팔을 묶인 엄마를 담요로 덮어주고 괴산 강인가, 달천 강인가, 이름을 알 수 없는 겨울 강을 걸었다. 또, 또, 돌 하나가 제법 큰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아파서 입술이 조금 돌아간 엄마얼굴을 닮은 돌이 거기 있다가 눈을 마주쳤다. 그래, 너도 가자, 우리 집에. 엄마 닮은 돌을 주워서 엄마 침대 옆에 놓았다가 집으로 옮겨왔다. 돌들이 세월처럼 시간처럼 쌓여갔다. 베란다 먼지구덩이 창틀 위에, 어수선한 책꽂이 틈에, 고추 삭히는 간장 물속에, 욕실 바구니 때밀이 수건 옆에... 왜 가져왔냐고 물어대는 사람들에게 주워온 돌들의 필요를 설명하느라 찾아낸 장소에 끼리끼리, 돌들끼리 모여 앉았다.

서귀포 법환 포구에서 가져온 돌이 탄자니아 잔지바 해변에서 온 돌이랑 머리를 맞대고 한라산 백록담에서 한겨울에 담아온 돌이 스리랑카 탕갈레 남쪽 바다에서 뜨거운 햇볕 아래 빼문 강아지 혓바닥 같은 돌과 허리를 기댔다.

우연처럼 내 이름자 끝 R이 새겨져 있어 주워온 작은 고기잡이배 닻 같은 돌이, 용암에서 부딪쳐온 현무암돌이랑 어영부영 껴안고, 중랑천 장마로 쓸려온 돌이 끄라비 고급호텔 프라이빗 비치에서 비행기 타고 온 돌이랑 어리 얼싸 뒹굴고 있었다.

돌들이 색이 바래 윤기를 잃고 있잖아, 있던 자리에서 뽑혀와 먼지를 뒤집어쓰고 말라가잖아, 너무 미안하잖아, 생각했다. 무슨 죄야, 어느 날 나하고 눈 마주친 인연밖에 없는데.

 

무늬도 곱지 않고 의미도 품지 않아 이름도 붙일 수 없는 돌들을 보물처럼 들고 오는 요령부득의 행태를, 이제 그만 접어야겠다... 포기하고 먼지를 닦아주다가, 또 생각을 했다.

돌은 정말 딱딱한 물성일까? 그냥 단단하기만 할까? 저렇게 동그랗게 저렇게 눈이랑 입술을 달고 나랑 마주치기 위해서 그 강가 그 바다 그 산에서 가만히 있었을 때 아무 말도 없었을까. 돌은 마음이 없었을까.

간호사는 왜 그 때 엄마의 팔은 묶고 발은 묶지 않았을까, 달천 강에서 따라온 돌에게 물어봤다. 다리가 부러져서 발버둥을 칠 수 없으니 발은 묶을 필요가 없었잖아. 몽골의 후예 같은 넓적한 엄마 얼굴 같은 돌이 반짝, 말을 해왔다.

돌 같이 딱딱해진 엄마는 더 이상 부드러워질 일은 없을 거였다. 돌보다 더 딱딱하게 굳은 엄마는 이제 이 세상을 떠났으니까. 말을 마치고 다시 단단하게 뭉친 돌들 사이에 발을 오그리고 앉아 이제 다시는 돌을 집으로 데려오진 않게 되리란 걸 혼자 알아차렸다.

 

디파처 즉 출발이었던 영화가 굿, 바이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50724)

 

그리고 그 영화, 돌을 전해주면서 너를 향한 내 마음을 보여주는 ‘돌 편지’를 쓰던 영화 <굿, 바이>를 다시 봤다. 원래 제목은 출발, <departure>였던 그 영화, 사람이 죽었을 때 염을 하는 염습사 이야기를. 어쩌다 ‘출발’이란 영화가 ‘굿, 바이’로 바뀌었을까 의아해하면서.

 

 

디파처의 한 장면, 어릴 때 돌편지를 주고 떠난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보내주는 아들(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50724)

 

십 몇 년 데려온 돌들을 하나씩 만지면서 찍어 올린 사진 아래 사람들이 말했다. 돌을 주워오는 버릇은 나만 가진 것이 아니었다. 강변의 돌들은 나 말고도 사람들이랑 눈을 맞추고 있었던 거였다. 누군가가 말했다.

“이제 돌들이 모였으니, 물만 흐르면 되네.”

이제 물만 흐르면 되네, 이제 물만 흐르면 되네. 이제 물만 흐르면 되네. 돌들이 모였으니.

그 강변처럼 그 바다에서처럼, 물만 흐르면 되네.... 오래 그 말을 입에 넣고 굴렸다.

 

한글자사전, 여기에 돌이란 제목의 시는 꼭 내가 쓴 것처럼 똑같았다

 

그리고 한 글자로만 쓴 김소연의 시집 <한 글자 사전>에서 ‘돌’을 읽었다. 진심으로 내가 쓴 것인가 오해하면서, 내 마음 같아 깜짝 놀라면서. 다른 한 글자의 시들은 그리도 짧은데, 돌은, 참으로 길구나, 또 한 번 이상해 하면서.

 

아무것도 아닌 것 하나

 

돌을 줍는다. 되는대로 줍지 않고 허리를 수그리거나 쪼그리고 앉아서 오래 오래 이 돌 저 돌을 살펴보며 하나를 고른다.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오래 돌을 보고 있으면, 무늬가 보인다. 그 무늬는 이 마을의 지도가 오랫동안 보존돼 있을 것만 같다.

돌 속에 길도 보이고 집도 보인다. 갈림길도 보인다.

손에 꼭 쥐고 호주머니에 넣어두고 집에 돌아온다. 내 방 창턱에는 그렇게 모아온 돌들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언젠가는 손바닥보다 더 큰, 둥글둥글하게 잘 생긴 돌을 주워온 적이 있었다. 엄마는 그 돌을 깨끗이 씻어 장독 속에 장아찌를 눌러놓는 용도로 사용했다.

언젠가는 납작한 달걀처럼 생긴 돌을 주워온 적이 있었다. 나는 그 돌을 책을 펼쳐놓고 종이를 눌러놓는 문진으로 사용했다. 구멍이 뚫린 돌은 가죽 끈으로 매달아 목걸이를 만들었고, 움푹 파인 돌은 작은 수생식물을 담아두는 용도로 사용했다.

주워온 돌 하나. 아무것도 아닌 것 하나.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쓸데가 없다. 그저 돌멩이 하나다. 쓸데가 없어서 돌은 이모저모로 쓸데를 찾게 만드는 사물이기도 하다. 어떻게 사용할지는 돌의 주인에게 달렸다. 돌의 용도를 발명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