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지으려는 사람은 공사비로 수억 원을 지불 할 준비가 되어있다. 집 지을 땅을 사는 절차부터 건축을 하고 공사를 하는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공정마다 적정한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부동산이나 무슨 컨설팅 간판을 걸고 있는 곳에 '상담 및 설계 무료'라는 문구를 붙여놓고 집 지으려는 사람들을 유혹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이런 간판을 보고 건축설계는 무료라고 생각하는 건축주가 의외로 많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건축설계 과정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설계를 의뢰받은 건축사는 현장을 방문해서 그 땅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환경적, 법적 조건들을 검토한다. 그리고 건축주의 기본적인 요구, 즉 가족구성에 따라 필요한 개인 방의 개수, 거실, 주방, 식당, 욕실 등 공간의 배치와 크기 등을 검토한다. 그리고 여러 기능의 공간별 배치와 조합을 스케치로 구상해본다. 그 과정에서 건축주와 몇 차례 만나서 디자인을 구체화해 나간다. 어느 정도 평면 윤곽이 완성되면 집의 형태를 여러 각도에서 스케치하면서 모양과 비례, 적정한 외장재료 등을 검토한다. 이어서 각 방의 상세치수 결정과 병행하여 붙박이장과 침대, 책상, 거실소파, 주방가구와 식탁 등 가구의 배치나 창의 위치, 크기, 개폐방식 등 상세 내용을 건축주와 결정해 들어간다. 각 부분에 사용할 재료와 냉난방방식, 조명기구등과 가정제품의 위치도 상의한다. 디자인이 구체화되고 상세치수와 재료, 가구배치가 완료되면 본격적으로 도면작업을 시작한다. 일반 건축도면, 골조를 그리는 구조도면, 토목과 조경도면, 냉난방이나 위생도면을 그리는 기계도면, 전기도면 등 공사에 필요한 각종도면과 공사방법을 지시하는 시방서를 작성한다. 구조계산, 기계, 전기, 토목, 조경도면 등은 건축사사무소에서 작성하지 못하고 협력업체에 의뢰한다. 이렇게 도면이 완성되면 건축허가를 받기 위해서 해당관청에 접수한다.

 

 

이렇게 주택설계는 복잡하고 디자인과 도면작업에 시간도 많이 걸린다. 주택을 특히 다른 건물을 설계할 때 보다 디자인도 복잡하고 일의 양도 상대적으로 많은데 비해 그 규모라야 수십 평 정도라서 설계비 총액이 적다. 그래서 주택설계는 아예 의뢰 받지 않는 건축사사무소도 많다. 더러는 손해 보지 않는 범위에서 대충 기본 도면만 그려주는 사무소도 있다. 이런 경우 도면이 부실하므로 공사 중에 건축주와 시공자 사이에 크고 작은 분쟁이 생길 소지가 많다. 이렇게 주택설계와 시공에 있어서 부실 악순환이 계속되는 이유는 디자인에 비용을 제대로 지불하지 않으려는 건축주와 그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중개업자. 건설사업자, 그리고 그에 편승해서 양심을 속이는 건축사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

 

이렇게 복잡한 건축설계 진행과정을 살펴보면 '건축설계 무료'는 광고가 얼마니 새빨간 거짓말인지 알 수 있다. 건축설계 사무소는 자선단체가 아니다. 결국 그 비용을 어디선가 빼 먹을 수밖에 없다. , 유혹할 때는 공짜라고 하고 시공비 안에 설계비를 숨겨 놓았다가 그 비용으로 건축사사무소에 설계비를 지불하는 경우도 있다. 더러는 부실 공사로 그 비용을 충당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사실 집을 처음 짓는 건축주는 건축전반에 대한 지식이나 경험이 없다.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지켜봐도 그것이 정상인지 비정상인지 알 수가 없다. 이런 과정으로 설계하고 집을 지은 경우는 디자인도 엉망이 된다. 공짜로 설계해 준다고 하니 디자인 변경을 자꾸 요구하기도 부담스럽고 미안해서 건축사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주택은 가족마가 요구 사항이 있고 개성도 있어서 공간을 건축사가 일방적으로 만들면 안 된다. 건축주의 요구, 그 가족 구성원의 요구를 면밀하게 검토하고 반영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과정이 생략된다면 결과적으로 소위 집장사 집이 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 가족만의 특별한 집을 짓기 위해 시작했는데 수억 원을 들여 완성된 제품은 만족스럽지 못한 일반적인 그저 그런 집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이다.

 

누가 길에서 사탕하나를 공짜로 준다고 가정할 때 그것을 넙죽 받아먹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 호의에 의심도 들지만 그 제품에 대해 불안할 것이다. 요즘은 사라졌지만 예전에 다방에서 사람이 앉아 있는 테이블마다 땅콩 두어 알을 올려놓는 사람들이 있었다. 공짜인 줄 알고 그 땅콩을 집어 먹게 되면 일정량의 땅콩을 강제로 사야만 되었다. 땅콩 두어 알의 가격이 얼마나 되겠느냐마는 우리는 그 땅콩이 가지고 있는 불순한 의도를 알기에 그가 다시 회수해 갈 때까지 행여 땅콩이 굴러 떨어지지 않을까 조마조마 했던 기억이 있다. 이처럼 우리는 공짜처럼 보이는 남의 호의에 뭔가 좋지 않은 의도가 숨어 있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억 원짜리 집을 짓는 일에 설계비 공짜라는 유혹에 무딘 사람들이 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땅을 사는 과정을 빼면 설계비는 집을 짓는 전체 공정에서 초기 시점에 지출하는 돈이다. 어떤 이는 종이 몇 장의 가격이 그렇게 비싸냐고 한다. 그러나 그 종이 몇 장이 집의 모든 걸 결정한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목표 지점을 가려할 때 속도보다 우선 방향설정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공사가 아무리 일사천리로 잘 진행된다고 해도 이미 방향을 알려주는 몇 장의 도면이 잘못 되어 있다면 목적지에 제대로 도달할 수 없다. 테이블에 올려놓은 땅콩 한 알도 후환이 걱정되어 그냥 집어먹지 못하면서 주택설계를 공짜로 해 준다는 말에 속아 넘어간다. 낚시 밥이 공짜인 줄 알고 덥석 부는 순간 물고기의 운명이 결정된다. 그와 같이 '설계공짜'를 덥석 무는 순간 건축주의 운명이 결정된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