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구릉 산책
왕릉에 대해 실눈이라도 뜨게 된 덕분에 설레는 마음으로 동구릉(東九陵) 입구에 도착해서 왕릉역사문화관을 둘러보았다. 동구릉은 ‘동쪽에 있는 아홉 개의 능’이라는 뜻으로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建元陵)을 비롯해 문종과 현덕왕후(顯德王后)의 현릉(顯陵),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貞純王后)의 능인 원릉(元陵) 등 9개의 능이 있다.
왕릉 권역의 시작을 알리는 재실(齋室)은 능을 보호하고 관리하던 종구품 능참봉(陵參奉)이 거주하던 공간이지만 왕이 능행 행차를 할 때나 제향을 담당하던 제관들이 임시로 머물기도 했다. 능참봉은 조선시대 인기 직종이었다 한다. 성종과 예종의 장인이자 세조가 왕이 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한명회와 진경산수화의 대가이자 조선 최고의 화가인 겸재 정선이 능참봉 출신이다. 능참봉은 왕의 능행행차 때 왕의 눈에 띄면 출세 길이 열리기도 했다 하니 관직을 꿈꾸는 이들이 선호했음직하다. 재실은 제사에 쓸 향을 보관하는 일부터 제기의 보관까지 제사와 관련된 모든 일을 주관하던 본부격이었다.
동구릉 재실, 다른 곳의 재실에 비해 규모가 크다.
동구릉의 재실을 둘러보고 본격적인 왕릉 답사를 위해 해설사를 따라 건원릉으로 향했다. 해설사는 우리를 능 뒤편의 언덕으로 안내했다. 그곳에서 능을 가운데로 두고 좌우로 산줄기가 뻗어나가고 있었다. 능침(陵寢: 임금의 무덤)의 바로 뒤 언덕에서 바라본 풍경은 앞이 탁 트이고 시원하면서도 아늑한 느낌이었다. 풍수지리라고는 배산임수라는 말밖에 모르는 내가 봐도 좋은 자리라는 것이 느껴졌다.
언덕에서 내려다본 건원릉. 천하를 호령할 듯한 기세가 느껴진다.
왕릉의 공간구성
왕릉의 공간구성은 크게 진입공간, 제향공간, 능침공간으로 나뉜다. 진입공간은 재실에서 금천교(禁川橋)를 지나 홍살문 앞까지다. 금천교는 궁궐 입구에도 놓여 있는 다리인데 여기서부터는 왕의 공간 즉 신성한 공간이라는 경계의 의미를 담고 있다.
다음으로 제향공간이다. 제향공간은 산 자가 죽은 자를 위해 제사를 지내는 공간이다. 홍살문부터 능침 공간 바로 앞까지이며 향로와 신로, 정자각(丁字閣), 비각, 수복방, 수라간이 여기에 속한다. 한문 정(丁)자 형태라 해서 정자각이라 이름 붙은 정자각에서 음식을 진설하고 제사를 지낸다. 정자각의 뒷문은 능침을 향해 있다. 정자각은 월대 좌우에 동계, 서계라는 계단이 있다. 그 계단마저도 왕의 영혼이 오르는 신계(神階)와 어계(御階)로 나뉘고 형태와 조각의 정교함에서 차이가 난다. 제사가 끝나면 신위를 태우던 예감(망료위)이 능침 공간 바로 아래 있다.
능침공간은 왕릉의 가장 안쪽이자 가장 위쪽에 자리하며 상계, 중계, 하계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후대에는 중계, 하계의 구분이 사라진다.) 상계는 울타리인 곡장, 무덤인 능침, 나쁜 기운을 물리친다는 석양, 능을 지키는 석호, 혼이 노니는 혼유석, 사후세계를 밝히는 장명등, 능역임을 알리는 망주석으로 구성된다. 중계는 문석인과 석마가 좌우로 서 있고 하계에는 무석인과 석마가 서 있다.
앞에서 바라본 건원릉, 능침의 병풍석과 지대석을 비롯해 능의 모든 요소를 갖추었다.
건원릉의 능침공간은 격조 있고 웅장했다. 병풍석이나 지대석 등 석조물의 조각이 섬세하고 아름다웠다. 태종은 동생들과 부왕의 충신들을 척살하며 권력을 잡았지만 아버지의 무덤만큼은 고려 공민왕의 무덤 형식을 따라 왕릉으로서 최대한의 예우를 갖춰 조성했다. 건원릉의 특징 중 하나가 봉분이 억새풀로 뒤덮여 있다는 점이다. 태조가 말년에 고향을 그리워하자 유언에 따라 이성계의 고향 함흥에서 억새풀을 가져다 봉분을 덮었다. 건원릉은 억새가 피는 시기에 맞춰 능침 개방행사를 한다.
태조 이성계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을 통해 새 왕조를 연 개국의 시조다. 하지만 살아생전에 사랑하는 부인 강비를 잃고 뒤이어 일어난 왕자의 난으로 두 아들마저 죽임을 당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게다가 사후에도 부인들과 떨어져 혼자 묻혀 있으니 행여 쓸쓸하지나 않을까? 천하를 얻었으되 자식을 지키지 못한 아버지의 통한을 짐작해볼 뿐이다.
동구릉에서는 현릉(顯陵)과 원릉(元陵)을 더 둘러보았다. 해설사와 동행하지 않은 원릉은 출입이 제한되어 멀리서 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살기 위해 아들을 죽여야 했던 비정한 아버지, 영조의 무덤인 원릉을 멀리서 바라보며 묘한 기분이 들었다. 즉위 후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밝힌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가 죽자 효종의 무덤자리에 영조의 능을 조성했다. 효종의 자리가 좋지 않다고 파묘한 그 자리에 정조는 복수를 하듯 할아버지를 모신 것이다. 역사에는 영원한 승자도 패자도 없다는 말이 생각난다.
문종과 현덕왕후의 현릉은 동원이강릉이다. 건원릉과의 비교를 위해 해설사가 특별히 능침공간으로 안내해 설명해주었다.
문종과 현덕왕후의 비
청계천의 복원으로 세상에 드러난 유물이 있다. 청계천의 광통교(廣通橋) 일대를 지나다 보면 화려한 조각이 새겨진 잘 다듬어진 커다란 돌들이 보인다. 그것이 이성계의 경처(京妻)로 조선 건국에 기여했던 신덕왕후(神德王后)의 무덤에 둘러쳐졌던 병풍석들이다. 신덕왕후의 정릉(貞陵)은 본디 지금의 정동(貞洞: 신덕왕후의 정릉에서 유래했다)에 있었으나 이복동생, 방석(芳碩)이 세자에 책봉되자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동생들을 죽이고 그래도 분이 안 풀렸던지 정동(貞洞)에 있던 강비의 능을 파헤쳐 그 석물들은 청계천 광통교를 놓을 때 부재로 썼다. 신덕왕후는 아들이 왕이 되길 원했으나 그 욕심 때문에 두 자식을 잃었고 결국 자신의 죽음 자리마저도 편안하게 유지하지 못했다. 그뿐 아니다. 왕비로서도 인정받지 못하다가 250년 후인 현종대에 이르러서야 신주가 종묘에 모셔지고 정릉이 조성되면서 명예를 회복했다.
신덕왕후의 예에서도 볼 수 있듯이 역사도 세상사도 사람의 욕심이 불러온 크고 작은 사건들로 점철되어 있다. 지천명(知天命)한다는 쉰을 넘고 보니 하늘의 뜻을 다 헤아리지는 못해도 어둠 속에서 빛을 내는 반딧불이 빛만큼 세상 보는 눈이 밝아진 것 같다. 한 심리학자가 갈등은 욕망의 좌절에서 비롯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가족들에 대한 과한 욕심으로 마음이 들끓던 때라 그 말이 뇌리에 콕 박혔다. 그 후로는 정말 욕심 부리지 말아야지 다짐한다. 비록 내가 자발적으로 욕망을 자제하지 못하지만 욕망할수록 괴로웠던 상황에 대한 학습 덕분에 이제는 조금 유연해졌다. 지금의 삶이 가볍고 신나는 이유이다.
사도세자 즉 장조의 무덤인 융릉 정조가 정성을 다해 조성한 무덤으로 멀리서 보아도 석물이 정교하고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