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남쪽 끝자락인 서초구 내곡동 산 13-1에는 헌릉(獻陵)이 있다. 조선의 철혈 군주인 태종과 여장부 원경왕후 민씨가 잠든 쌍릉이다. 헌릉에는 조선의 왕릉 50기 중 유일하게 돌우물이 조성돼 있다. 왕릉의 봉분 앞에는 직육면체 돌판이 있다. 임금의 영혼이 쉬는 혼유석(魂遊石)이다. 헌릉 혼유석 크기는 폭 1.95m, 넓이 3.4m, 높이 0.65m. 무게가 7톤에 이르는 혼유석은 5개의 고석이 받치고 있다. 둥근 고석의 높이는 0.5m.

 

 그런데 고석 밑에 깔린 넓적한 돌인 하전석에 웅덩이가 파여 있다. 가로 12cm, 세로 10cm, 깊이 15cm. 언제, 누가, 왜 조각했는지 기록이 없다. 학자도, 헌릉 관리소 측도, 태종의 후손들도 모른다. 다만 전주이씨대동종약원 측에서는 세종이 부왕의 염원을 담아 조각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온 나라에 물 걱정 없기를 바라는 태종의 마음을 혼유석에 형상화한 것으로 믿는다. 헌릉의 미스터리, 혼유석 밑의 돌우물에서 태종우(太宗雨)와의 연관성을 찾는 것이다.

 

 이상주 전주이씨대동종약원 문화위원은 2011년 문화재청이 주관한 종묘사직 환구 왕릉 제향 전수 교육 때 돌 웅덩이와 태종우의 연관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는 이후 여러 언론 매체에 이 내용을 기고하고, 대중 강연 때 흥미로운 가설을 소개했다.

 

  홍살문에서 바로 본 헌릉 전경 (출처: 문화재청)

 

 태종은 물()을 그리워한 왕이다. 재위 18년 동안 단 한 해만 빼고 매년 기우제를 지냈다. 1416(태종 16) 한 해에는 모두 9회의 기우제를 지냈다. 왕의 가슴은 가뭄이 들면 언제나 까맣게 타들어 갔다. 비를 바라는 간절함은 필생의 선택에 대한 자책으로 이어진다. 혁명이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도 한다. 태종은 16(1416) 519일 육조의 대간 등에게 말한다.

가뭄의 연고를 깊이 생각해 보았다. 이유는 무인(戊寅) 경진(庚辰) 임오(壬午)의 사건이 부자(父子) 형제(兄弟)의 도리에 어긋남에 있음이다. 그러나 또한 하늘이 그렇게 한 것이지 내가 즐겨서 한 것은 아니다.”

 

 무인년은 1398년이다. 태종이 세자인 의안대군(방석)과 정도전 세력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해다. 경진년은 1400년으로 태종이 친형인 회안대군을 축출하고 정국을 완전히 장악한 시기다. 임오년은 1402년이다.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의 친척인 조사의가 제1차 왕자의 난 때 숨진 세자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켰다. 태종은 이 같은 사건이 부자와 형제간의 천륜에 어긋난 것으로 자책했다. 이를 벌하기 위해 하늘이 가뭄으로 고통을 준다고 여겼다.

 

 태종은 1422년에 56세로 승하했다. 음력 510일이 기일이다. 세종 때부터 이날을 전후에 내리는 비를 태종우라고 했다. 태종이 숨진 해에도 가뭄이 심했다. 이를 걱정하는 임금의 마음이 연려실기술에 실려 있다.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지방의 논은 갈라졌다. 밭이 타들어 갔고, 백성은 풀뿌리로 연명했다. (중략) 태종은 가뭄 속 땡볕 아래서 종일 하늘에 비를 내려달라고 빌었다. 태종은 승하할 때 내가 죽어 영혼이 있다면 반드시 이 날만이라도 비를 내리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 후 태종의 기일인 음력 510일에는 어김없이 비가 내렸다. 사람들은 이 비를 태종우라고 불렀다.“

 

태종 승하 200여 년이 지난 광해군 때다. 이조판서 정경세가 새벽에 눈을 떴다. 초여름인 음력 510일이다. 오랜 기간 가뭄으로 산천의 초목이 타들어 가던 무렵이다. 큰 가뭄을 걱정하는 그의 마음을 안 듯, 때마침 주룩주룩 비가 쏟아졌다. 그는 반가운 마음에 붓을 들었다.

금년에는 봄부터 여름까지 비가 오지 않아 마음 졸였다. 510일 새벽부터 저녁까지 단비가 내렸다. 백성들이 말하는 태종우다. 비 내리는 아름다운 감흥을 시로 남긴다.”

 

  헌릉의 하전석에는 조선 왕릉 중 유일하게 돌우물이 조성돼 있다. (출처: 이상주)

 

 태종우 스토리는 왕실에도 내려왔다. 영조는 15(1739) 5월에 비로 인해 고민이 깊었다. 태종의 기일인 510일에 비가 내렸지만 흡족하지는 않았다. 이에 다음날 삼각산 등에서 기우제를 올리게 했으나 더 이상 비가 오지 않아 매우 걱정하고 있었다. 514, 소대(召對)에서 시독관(侍讀官) 오수채가 임금에게 아뢰었다.

비가 온 10일은 태종의 기일입니다. 이날에는 비가 내리곤 합니다. 사람들은 태종의 마지막 유명(遺命) 이라고 해서 태종우라고 부릅니다. 신의 증조부 오윤겸의 문집 안에 태종의 마지막 유명을 수록하고 또 몇 구절 영탄(詠歎)한 시가 있습니다.” <승정원일기 영조 15514>

 

 영조는 오윤겸의 문집인 추탄집(楸灘集)을 가져오게 해 태종우(太宗雨) 시를 읽으며 선왕을 추모했다. 오윤겸은 정경세와 함께 광해군 시대를 산 문인이다.

 

 태종우 이야기는 박동량의 기재잡기, 홍석모의 동국세시기, 이유원의 임하필기 등에 수록돼 조선 후기까지 전해진다. 기재잡기에 의하면 태종우는 왕이 승하 후 해마다 내렸다. 내용 중에 선조 23(1591) 510, 200년 만에 처음으로 태종우가 내리지 않았다. 이에 식자들이 은근히 걱정했다라는 구절에서 유추할 수 있다. 박동량은 매년 내리던 비가 이 해에는 소식이 없자 불길한 징조가 아닌가를 걱정했다. 다음 해인 1592년에 조선은 임진왜란의 병란에 휩싸였다.

 

 비를 바라는 백성의 간절함은 태종에 대한 최고의 존중으로 승화된다. 민간에는 태종이 비를 염원하며 스스로 인신 공양을 했다는 속설이 내려온다.

태종 말년에 극심한 가뭄이 계속되어 많은 사람이 죽었다. 태종은 임금이 부덕한 탓이라는 꾸지람을 들었다. 이에 태종은 제물이 되기를 자처했다. 장작더미에 올라 불을 붙이고 비가 내리기를 간구했다. 갑자기 비가 내려 장작불이 꺼졌다. 해마다 이날 전국적으로 비가 왔다. 이를 태종우라 한다.” (<한국대표야담집> 2)

 

  헌릉을 수호하는 문무인석 (출처: 문화재청)

 

 민간의 이야기를 통해 태종의 백성 사랑 마음이 거듭 진화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전기에는 태종이 승하 후 하늘에서 천제에게 비를 뿌리게 해달라는 부탁 내용이었다. 그런데 후기로 가면서 태종 스스로 기우제의 희생물이 되고자 장작에 불을 붙이는 내용으로 변했다. 중국의 전설 속 인물인 상 왕조의 탕왕이 7년 동안 가뭄이 계속되자 상림(桑林)에 제단을 쌓고 기우제를 올렸다는 고사를 떠올리게 한다.

 

 음력 5월은 물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농사철이다. 조선의 백성들은 단비로 오는 이 무렵의 비를 태종과 연계돼 신령스럽게 여겼다. 그 신비롭고 신령스러운 비의 출발점은 헌릉의 돌우물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