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국민화해프로젝트-용서>라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늘 그렇듯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잡다한 생각이 있을 때 우연히 이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어요. 변화를 주기 위해선지 촬영은 주로 가까운 외국 관광지였는데요. 다양한 이유로 마음이 멀어진 사람들이 용서와 화해를 하기 위해 비행기를 탔습니다. 출연자 대부분이 인상적이었지만 특히 생각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소아비만에 걸려 어른이 되었을 때는 초고도 비만이 된 딸과 그녀의 어머니였습니다.
그녀는 어머니가 자신의 식사습관을 조절해주지 않아 소아비만이 되었고 그 때문에 학교에서 놀림을 당하는 힘든 시간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비만 때문에 자신이 꿈꾸던 연극영화과도 못 가게 되어 연기를 하고 싶던 꿈도 접었다고 하더군요. 좌절감에 현실도피를 했고 게임에 빠졌대요. 게임 속 멋진 캐릭터에게서 대리만족을 했다고 합니다. 계획 없이 살다 보니 아기를 가진 상태에서 사귀던 사람과도 헤어졌다고 해요.
그녀는 자신의 모든 불행이 어렸을 때 식습관을 제대로 잡아주지 못한 엄마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원망하는 마음이 있으니 모녀 관계가 편치 않았겠지요. 분위기를 바꾸느라 멀리 떠나온 곳이지만 거르지 않은 속엣 말을 하다 보니 또 다른 상처가 됩니다.
그녀의 어머니도 딸이 서운합니다. 아내로서 엄마로서 자신을 희생하며 열심히 살았는데 지나고 보니 후회되는 일도 많고 애지중지 키운 딸은 미혼모가 되어 엄마를 원망합니다. 어디서 잘못되었는지 모르겠다는 심정이 네모난 화면을 통해 느껴집니다. 모녀는 낯선 여행길에서 서로의 마음을 알아갑니다. 꾹꾹 눌러두었던 속말을 내놓으니 놀라기도 하고 더 서운해 하기도 합니다. 저러다 화해가 가능할까 싶습니다. 물론 지금까지 본 결과는 늘 해피엔딩입니다.
용서를 주고받는 사람들은 상처를 드러내는 게 겁이 나서 꾹꾹 눌러 덮어둔 탓에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화들짝 놀라 반응을 보입니다. 곪은 상처를 헤집으니 통증은 배가 됩니다. 빠르게 퍼지는 감정들이 눈물이 되어 흐릅니다. 남의일 같지가 않네요. 둘째딸이 생각납니다.
큰딸은 아무리 먹여도 살이 찌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둘째가 태어났어요. 다행히 둘째딸은 제 소원대로 오동통하게 성장했습니다. 늘 활짝 웃는 동그란 얼굴에 살이 오른 통통한 모습이 보기만 해도 사랑스러웠습니다. 엄마인 저는 그랬습니다.
그런데 초등학교 때 통통하던 딸은 중학교에 가더니 살이 쪽 빠져서 마른 모습이 되었습니다. 이후엔 몸무게가 조금만 늘어도 바로 식사 조절을 했어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춘기가 오니 외모에 신경이 쓰일 수 있다고 그냥 그런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초등학교 때 통통하다고 놀림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많이 힘들었는데 아이가 말을 하지 않은 것이었어요.
그 때 받은 스트레스로 중학교에 가서 살을 뺐을 때 초등학교 때 알던 친구들이 보인 반응은 “우와~너 000 맞아?”였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딸은 조금만 몸무게가 늘어도 식사를 조절합니다. 통통하다고 놀림 받던 경험과 살을 뺐을 때 친구들이 보인 반응이 평생 다이어트를 하게 만든 것 같습니다. 딸은 늘 표준치에 못 미치는 몸무게를 유지하고 있지만 엄마로서 마음이 아픕니다.
화면 속 엄마는 여전히 울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는 딸의 원망을 들으며 참아온 눈물이 터진 듯합니다. 엄마와 딸은 그렇게 꽁꽁 감춰둔 마음을 꺼내어 울고 웃으며 화해의 문으로 조금씩 다가섭니다. 손을 내미는 엄마와 그 손을 맞잡아 주는 딸. 이번에도 역시 해피엔딩입니다.
살다보면 누구나 한 번쯤 다툼이 있게 마련입니다. 대개 지극히 사소한 일이 발단이 됩니다. 사소한 그것은 마음에 상처라는 이름의 작은 불씨를 남겨둔 채 서서히 마음을 닫게 만들지요. 한동안 닫힌 마음을 살피느라 상대방을 돌아볼 겨를이 없습니다. 그리곤 하염없이 시간이 흐르죠. 그렇게 마음을 닫은 채 살다보면 정작 다툰 기억은 간데없고 용서를 하기에도, 받기에도 어색한 사이가 되어버립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용서와 화해를 자연스레 풀어가던 나라가 있었습니다. 바로 러시아입니다. 러시아에는 사순절이 시작되기 전 7일에 걸쳐 하는 축제가 있는데 금욕과 절제의 기간인 사순절 전에 ‘마음껏 먹고 신나게 놀자’는 뜻이 있다고 합니다.
축제가 진행되는 동안 하루하루 일정한 의식이 있는데, 마지막 날은 ‘용서의 날’이라고 합니다. 아는 사람뿐 아니라 모르는 사람에게도 이날은 서로 입을 맞춘 후 “나를 용서해 주세요. 당신을 용서합니다.”라고 말을 한다고 해요. 아쉽게도 지금은 이런 의식이 많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문득 예전에 스치듯 읽은 ‘용서하지 않을 자유도 용서할 수 있는 용기도 모두 나의 것’이라는 글이 떠오르네요.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이 글을 읽고 참 근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용서하지 않을 자유’라는 말이 특히 그랬습니다. 진정으로 용서할 마음이 없는데 아무렇지 않은 척 혹은, 억지로 용서 하는 게 비겁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용서’에 따라온 ‘자유’ 라는 단어가 마음 한구석을 흔들어 더욱 그랬습니다. 지금은 우선순위가 변했습니다. ‘용서할 수 있는 용기’ 라는 말을 더 좋아합니다. 사람과 사람사이 용서 안 될 것이 뭐 그리 많겠나 싶어 마음이 기웁니다. ‘미움’에게 마음 한 자락 내어주느니 용서함으로 그 공간을 비워두고 싶기 때문입니다.
엄마와 딸의 미소와 함께 프로그램이 끝났습니다. 화면은 멈췄지만 다시 누군가는 ‘용서’ 라는 이름을 들고 낯선 이국땅으로 화해의 여정을 떠나겠지요. 설사 먼 이국땅이 아니면 어떻습니까.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지금 화해의 손을 내밀어 보세요. 용서는 빠를수록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