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이었다.
"이혼하고 싶어."
"아니 왜?"
"배려가 없어도 이렇게 없는 인간과 산다는 게 더는 감당이 안 돼."
그러고는 한참을 울먹였다.
삼십여 년을 형제가 셋인 한 집안의 맏며느리로 남편의 부양자로 잘은 아니어도 그럭저럭 살고 있다고 여겼다. 남편이 주부로 살아도 불만 삼지 않았다. 손주를 안겨드리진 못했지만, 시부모에겐 듬직한 맏며느리고 직장에선 나름 인정받는 직원이다. 그런 그녀가 서러움이 섞인 한탄을 쏟아냈다.
그녀는 추위를 유난히 잘 탔다. 어쩌면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살갑지 않은 언니 오빠의 밑에서 지낸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날은 유독 추웠고 그녀는 보일러를 켰다. 추위가 가시지 않는다. 난방비가 걱정인 남편이 보일러를 아무 말도 없이 꺼버린 것이다.
"내가 번 돈으로 내 추위도 못 녹이고 산다는 게 말이 돼?"
그녀는 자식도 없는데 자신이 왜 이러고 살았는지 모르겠다며 울먹였다.
수십 년을 살 대고 살았으면 닭살 돋는 애정은 없다손 치더라도 자신의 아내가 어떤 사람인지 정도는 알아야 했다.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시간이 흐르면 의리로 산다고들 한다. 사랑은 식었더라도 배우자에 대한 배려는 해야되지 않았을까. 가장 노릇을 해왔음에도 아내보다 난방비가 더 중한 남편임에 그녀는 상처와 회한뿐이었다. 이혼의 말에 남편은 법대로 하자고 나오니 정나미가 뚝 떨어진다.
결혼할 때는 든든한 지원군을 얻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가족이 되었기에 서로에게 기대하는 바가 안 생길 수는 없다. 의지하고픈 마음. 위로받고 싶은 마음. 영원히 자신의 편이 되어줄 것이라는 희망. 기대는 무너졌다. 남편은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만 알았고 아내에 대한 마음은 쓸 줄도 몰랐다.
우리는 가족 덕분에 행복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가족이란 이름으로 서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경우를 종종 접한다. 친구나 지인에게 털어놓을 수는 있어도 부모, 배우자, 형제자매에게는 절대 하지 못하는 얘기들이 있는 것처럼.
가족의 생각이 변하고 있다. 혼자 살다가 혼자 죽게 된다는 말이 실감 날 정도로 일인 가구의 수가 날로 증가하고 있다. 일인 가구가 늘어가는 세태 안에서 가족 간의 단란함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그만큼 가족의 지지를 받는 일도 어렵다.
「어느 가족」은 피가 아닌 서로의 선택으로 이뤄진 불량 가족의 이야기이지만 가족의 의미를 진정으로 반추하게 만드는 영화다 (사진 출처 : 다음영화 스틸 컷)
가족이 한집에 살아도 고립된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이 적지 않다. 생활을 위한 환경의 변화도 있겠으나 가족이 개인의 삶에 말로나마 지원군이 되어주지 못하는 일면도 있는 것이다. 일본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가족을 "둘도 없이 소중하지만 성가신 관계"라고 사유한다. 빈곤의 상황에서 개인의 욕망이 더 크게 작용하게 되면 가족은 성가신 존재로 전락하기 쉽다. 단순히 피를 나눴다고 해서 가족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피가 이어지지 않아서 더 좋은 점도 있잖아."
"괜한 기대를 안 하게 되는 건 좋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어느 가족」에서 할머니 하츠에와 노부요가 주워온 쇼타와 린을 보며 나누는 얘기다.
여섯 명의 가족이 할머니의 연금과 도둑질로 생활을 이어가지만, 그들은 피로 맺어진 가족이 아니다. 상처 입은 사람들이 모여 한집에 살고 그 안에서 서로의 보살핌을 받는다. 우연히 가족 구성원이 된 그들은 서로에게 기대를 씌우지도 않는다. 존재의 소중함을 알고 좋아하는 것 그것이 전부다.
"집에 돌아간다고 말할 줄 알았는데……."
"선택받은 건가, 우리가?"
"보통은 부모를 선택할 수는 없으니까. 그런데 스스로를 선택하는 쪽이 더 강하지 않겠어?"
"뭐가 강해?"
"유대. 정 같은 거. 나도 널 선택했지."
할머니 하츠에와 노부요의 대화에서 보듯이 그들은 서로의 닮은 상처를 찾아 유대하고 생활 동반자 관계의 가족으로 사는 것이다. 미국의 지역 파트너십이나 독일의 생활 동반자, 프랑스의 팍스(PACS) 등처럼 말이다. 이는 혼인이나 혈연의 관계를 떠나 내 자신이 생활 동반자를 정하는 일이다.
영화 「어느 가족」은 암암리에 그런 관계로 만들어진 가족이다. 개인 간의 계약으로 얼마든지 피가 아닌 유대로 새로운 가족을 이룰 수 있지 않을까.
부담만 안기는 결혼생활과 가족관계보다는 서로에 대해 기대를 할 수 없어 유대하고 협력하기 위해 노력하는 대안 가족이 개인의 삶에 또 다른 지원군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팔에 난 서로의 닮은 상처로 유대감을 느끼는 노부요와 린 (사진 출처 : 다음영화 스틸 컷)
머물 공간이 없는 이들은 거주지 동반자가 되어 살아갈 수도 있고 공통된 취미나 일을 갖고 있다면 그것으로 가족이 되어 매일 공통의 관심사를 더 깊이 이야기하며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외로움 때문이라면 그 외로움을 해소해줄 친구와 사는 것도 좋고 나를 이해해주고 알아주는 이와 함께 살아도 좋다.
결혼이나 핏줄로 맺어진 가족이 아니더라도, 기대로 원망이 축적되는 관계보다는 으쌰으쌰한 인생을 위해 자신에게 맞은 대안의 가족을 꾸릴 수 있다면 얼마나 환상적인가 말이다. 선택과 유대로 맺어진 가족이기에 함께여서 그냥 좋고 성가심 없이 서로를 응원할 수 있지 않을까.
이혼을 떠올린 나의 지인에게 권위적인 부부관계의 생활을 청산해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다. 삼십여 년을 자식도 없이 남편의 부양자로 살아왔으면 이제는 위로받는 새로운 삶을 살아봐도 되지 않을까. 굳이 이혼하지 않더라도 삶을 보다 윤택하고 풍요롭게 만들 대안 가족을 몇 달 만이라도 권해보고 싶은 생각이 드는 건 나만의 욕심일까.
바다로 여행을 떠난 그들은 누가 봐도 진짜 가족이다 (사진 출처 : 다음영화 스틸 컷)
"아빠는 이제 아저씨로 돌아갈 거야."
영화 「어느 가족」의 오사무는 재회한 아들 쇼타에게 말한다.
핏줄로 맺어진 가족일지라도 오사무처럼 융통성을 발휘해야 하는 시대가 우리 가까이 와있을지도 모르겠다. 소중한 존재가 성가신 존재로 전락하기 전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