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제의 나를 뒤집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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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사태로 그 전과 후가 달라진다며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지에 대한 말들이 무성하다.

어릴 때는 먼 우주의 얘기로만 들리던 서기 2020 속에 나를 담그고 있는 지금, 기술의 발달로 속도 개념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가 되면서 무엇이든 짧게 잘리고, 그것들이 다시 모아지면서 오랜 시간이 지났다는 생각에 이어, 아주 오래 살았다는 느낌이 종종 든다.

 

 

 

 

나이가 든다는 건 물리적으로 노쇠해 가는 일이기도 하지만, 마음에 쌓인 기억들이 많아 이용할 자원이 많아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자기 안의 자원을 모르면서 나이 들다 보면 속도를 못 따라가는 노년이 초라하다는 느낌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앞으로는 스펙이나 학력보다 콘텐츠가 곧 실력이 된다고 한다. 기술이 어느 때보다 발달한 터라 콘텐츠라는 소프트웨어가 중요해졌다는 말이다.

 

 

고령 사회에 진입한 우리 사회는 이제 8090 세대까지, 함께하는 층이 더욱 두터워졌고, 50대인 내 안에도 여러 개의 층이 쌓여 있다.

필자의 20대 시절, 아날로그라는 이름도 없던 1980년대는 아직 타자기로 문서를 만들고 워드프로세서로 타이핑 연습을 하던 때로 민주화의 열망이 거세던 시기였다.

중요한 건 인간이었고, 인간끼리의 관계로 일을 만들어 가는 것이 중요했다. 일이 되게 하려면 사람끼리 으쌰으쌰 하던 때여서, 그래도 낭만이라 할 만한 게 어디에나 흔적을 남겼다. 그런 것이 아날로그 방식이었다. 당시에 디지털이란 말은 먼 옛날 <오디세이아> 고전을 바라볼 때만큼의 거리가 있는 먼 훗날의 얘기였다.

민주화를 어느 정도 달성하자(?) 박정희 식 경제성장과는 다른 자본주의를 겪었고 한참 뒤 IMF시대를 지나 88만원 세대를 운운하는가 싶더니 그것도 훌쩍 지났고, 어느새 2000년대도 20년이나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잘못 번역된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의 원래 뜻인 “오래 살다보니 이런 날도 오는구나.”라는 묘비명을 생각하게 될 정도로, 필자는 여러 개의 층위에서 사는 느낌이다.

 

 

 

 

이제는 몇 살부터 노인이라 할지, 정년은 언제일지, 노인연금은 언제부터 받게 될지 같은 것들이 100세 시대를 기준으로 다시금 정의되는 듯하다.

필자처럼, 한 개인 안에 깃든 다양한 시간의 지층들은 그대로 남아 있는데, 쓰지는 않고 계속 쌓기만 하는 동안 아예 못 쓰게 될지도 모르는데, 이 시점에 비대면 방식의 만남이 급부상 중이다.

그러면서 4차 산업혁명의 사회에 맞춰 배워야 한다며, 새로운 교육 프로그램이 쉴 새 없이 소개되고 있다. 새로 배울 것들로는 아마도 코딩, 드론, 영상촬영기법 같은 것이 포함될 거란다.

 

예전부터 국가 차원에서의 사회 구성원 교육은 늘 있어 왔다.

하지만 모두를 위한 교육이 누구에게나 효과적인 건 아니다. 문제는 나 자신이다. 나는 왜 배우는가, 무엇을 배우려고 하는가에 대해 우선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트렌드에 맞게, 혹은 트렌드를 만드는 교육은 앞으로도 지속될 텐데, 통계 속의 추상적 개인과 일상 속의 구체적 개인 간 거리를 모르는 채, 자기 존재의 GPS를 파악하지 못한 채로는 제대로 배울 수 없다.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모르면서 열심히 배운다 한들 그것을 얼마나 활용할 수 있겠는가?

 

곁에 있는 누군가가 열광하면 일단 따라가고 보던 일상. 하지만 비대면의 일상, 디지털 시대의 한복판에서는 점차 구경하기 힘들어질 풍경이다.

그렇다면? 밖으로 나가는 일이 자유롭지 못하다면 한 번쯤 내 안으로 들어가 보는 건 어떨까?

이참에 내 안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살펴보고, 쓸 만한 게 있는지 뒤져보고, 자꾸 새것을 탐하면서 새것만 배우려 들기보다 내 자원을 활용하는 법에 대해 골똘히 궁리해 보는 건 어떨까?

 

현재 우리는 생산-소비를 부추기는 사회에 살고 있다.

회사‧공장은 생산에, 개인은 소비에 강하다. 새것이 나오면 열광하는 우리가 이런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지구 차원에서 볼 때 공평한 일이 아니다.

공존의 시대에는 지구촌의 모든 존재가 더불어 잘 살 수 있어야 한다. 지구에는 인간만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도 그에 대한 반격을 가한 결과라고들 하지 않던가. 이제는 그동안 모아 두기만 했던 것들을 풀어헤쳐 보이고 나누고 활용할 때다.

 

50+ 세대는 지금껏 아끼고 모으면서 경제성장을 일구고 그 과실을 먹고 살아온 ‘아날로그적’ 사람들의 집합이므로, 변화된 디지털 사회에서 일하려면 새로이 배울 것이 많다. 그래서 배움은 끝이 없다고들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어떤 방식의 배움이어야 하는가가 핵심이기 때문.

배운다는 건 지금의 나를 건강하게 하고, 현재를 유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자기 매뉴얼을 만든다는 말이다.

이쯤 되니 누구의 말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배운다는 것은 어제의 나를 뒤집는 일”이라는 금언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배움은 쉽지 않지만, 제대로 배웠다면 내가 바뀔 수밖에 없다는 의미에서 100% 공감되는 말이다.

 

필자가 생각하는 배움이란 이렇다.

쌓기도 하고, (아까워하지 않고) 부수기도 하면서 상황 속에서 내 존재의 GPS를 파악하려는 활동이자 놀이.

어디에서 무엇을 배울까? 그동안은 내가 좋아하는 것만 좇았다. 일종의 쾌락 추구를 배움으로 착각했다.

우리 개별 존재는 자기가 좋아하는 모습과 그렇지 않은 모습 모두가 합쳐진 결과물이다. 그런데도 좋아하는 모습, 이상적인 모습만 자기라고 여긴다. 배운다는 것은 지금의 내가 균형 잡힌 모습으로 변한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배움이란 일종의 수련이다.

 

 

 

제대로 배우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와 다르게, 거꾸로 하기가 필요해 보인다.

좋아서 했던 일 대신 회피했던 일, 그동안의 골칫거리 모두를 리스트업해 보자. 회피하지 않을 때 내 마음은 두려움 대신 본능적으로 나를 구하기 위해 전격 가동한다. 해결 능력이 생기는 것이다.

마침내 지푸라기 하나가 보인다. 크게 변할 건 없다. 다만 그것을 프레임 안으로 받아들였을 때 나만의 디자인이 가능해지는 법이다.

깊은 배움에는 깨달음이 있다. 깨달음은 고통과 골칫거리 없이 얻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라는 말이 있나 보다.

배움이란 이런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