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태어나면서 저마다에게 주어진 생의 시간을 갖게 된다. 안타깝게도 짧은 생을 손에 쥔 이가 있는가 하면 또 누군가는 백수를 누리기도 한다. 확실한 것은 한 번 태어난 이상 한 번은 죽는다는 것이다. 또 하나 분명한 것은 재벌이라고 해서 하루에 다섯 끼를 먹거나 금밥을 먹으며 살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욕심은 괴이해서 한 번 부리기 시작하면 만족이란 것과는 멀어지게 된다. 만족은 비우고 내려놓는 곳에서 자라는 마음이다. 만족은 곧 나눔이라 할 수 있다.

대승불교도의 실천 덕목 중에 '무주상보시(無主相布施)'라는 것이 있다. '보시'는 타인에게 내 것을 베푼다는 것이며, '무주상'은 내 것을 누구에게 줬다는 생각조차 버리는 것이다. 자신의 나눔 행위를 통해 착한 일을 했다고 여기는 순간 자만심과 자긍심이 생겨 진정한 선행을 베풀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어떤 대가도 기대하지 않으며 자신의 행위에 대한 집착도 없이 베푸는 것이 진정한 보시이다. 나눔은 행위 자체로 끝인 그 무엇이 되어야 한다. 선한 행위에 생색을 곁들여서도 안 되거니와 우쭐하려는 마음 또한 경계해야한다.

순수한 나눔은 돈이 많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그렇다고 나눔이 가진 자들의 전유물만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지난해 가을, 수녀원에 계시는 고모님의 전화를 한 통 받았다. 성당을 지을 건축비를 모금 중이라며 기부를 좀 하면 좋겠다는 전갈이었다. 잘 팔리는 작가도 아니고 수입이 정기적으로 있지도 않았다. 빠듯한 생활에 언제 수입이 생길지 모르는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가족이 없다. 고모님의 제의가 나로선 당황스럽고 선뜻 그러겠다 말할 수 없어 죄송했다.

"생활의 여유가 있는 분에게 제의를 하면 어때요?"

그러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겠냐는 생각과 함께였다.

"있는 사람들보다 없는 사람들이 기부는 더 잘해."

"………."

나는 대답할 다른 말을 찾지 못했다.

있는 사람은 더 많은 것을 가지려 들고 없는 사람들은 기부를 좀 한다고 형편이 더 나아지는 것도 아니기에 나눔에 자발적이 되는 것인가.

고모님의 말을 듣고 나니 시치미를 뚝 떼고 있을 수가 없다. 그 무렵, 적은 액수나마 원고료가 입금됐다. 내 한 달 생활비에 가까운 금액을 기부계좌로 송금했다.

어떻게든 되겠지 싶었다. 글과 관계된 일로 산 입에 거미줄은 안치고 살았으니, 가족과 남에게 손 벌리지 않고 살았으니 스스로는 만족이었다. 없으면 없는 대로 안 쓰고 적게 쓰는 생활이라 굳이 일을 찾아 할 필요도 없었다.

평소에도 같은 물건이 두 개면 하나를 남 주는 성격이라 물건에 대한 욕심을 부리지도 않는다. 아무리 좋은 물건이 있어도 내게 소용없는 물건이면 군말 없이 필요한 이에게 내준다. 동시에 두 개를 쓸 수 없고 쓰이지 않으면 결국엔 쓰레기가 될 물건이지 않은가 말이다.

아무튼 기부라는 것을 한 지난해 나는 지인의 공장에서 한 달여의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글을 쓰기 못해 억울하다거나 괜한 기부로 고생한다는 생각보다는 새로운 세상을 누린 기분이었다. 나눔으로 인해 비워진 곳간이 새로운 경험들로 채워졌다. 마음이 있으면 없어도 충분히 나눌 수 있고 마음이 없다면 억만금을 쌓아놓고도 할 수 없는 일이 나눔이란 것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인간에게 있어 최고의 미덕은 자신의 것을 남에게 나눌 줄 아는 자비심이 있다는 것이다. 현시대의 인간은 동물의 세계처럼 약육강식이나 적자생존을 고집해서는 살아갈 수가 없다.

인간은 전 인류가 하나의 공동체가 되었다. 서로를 돌보지 않으면 모두가 함께 멸할 수밖에 없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가진 것이 없다고 나눌 것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나눌 수 있는 것들을 갖고 태어난다. 『잡보장경(雜寶藏經)』에 나오는 재물 없이 베푸는 일곱 가지 보시가 바로 그것이다.

부드러운 눈길로 상대방을 바라보는 안시(眼施). 미소 띤 얼굴로 대하는 화안시(和顔施). 공손하고 아름다운 말을 하는 언시(言施). 반갑게 일어나 맞아주는 신시(身施). 착하고 어진 마음으로 대하는 심시(心施). 노약자나 지치고 힘든 이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좌시(座施). 집에 찾아온 손님에게 최대의 편의를 제공해주는 찰시(察施).

이를 무재칠시(無財七施)라 한다. 재물이 줄어들지 않으면서 큰 복을 가져다주는 행위들이다. 보시는 남을 위한 것이지만 실상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남을 위해 뭔가를 베풀면 상대방보다 자기 자신이 얻는 기쁨이 더 크기 때문이다. 기쁨을 느꼈다면 이미 큰 공덕을 지은 것이고, 생색을 내게 되면 그 공덕을 깎아먹는 일이 되므로 ‘무주상(無住相)’의 보시를 강조하는 까닭이다. 또한 베푸는 자와 받는 자, 그리고 베푸는 물건은 모두 청정해야한다.

 

 

이렇듯 나눔은 물질에만 있지 않다. 누구나 금밥을 먹거나 하루 세끼 이상을 양을 먹지도 않는다. 다섯 끼를 먹더라도 적게 먹고 함께 나누는 삶이 훨씬 더 건강하고 풍요롭게 사는 방법이 될 것이다. 몸의 살을 찌우는 대신에 마음의 살을 찌우는 행위들 말이다.

아무리 가진 것이 없다고 해도 칠보시를 할 수 있으니 어찌 부유하지 않다고 말할 것인가. 마음먹기에 따라 천국과 지옥 중 한 곳을 선택할 수 있으니 어찌 행복을 마다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