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숙사에서 지내는 아들이 몇 달 만에 집으로 온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대학생이 되기 전까지는 나가라나가라 노래를 불러도 집안에서만 뒹굴던 ‘집돌이’ 아드님입니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집 좋아하는 아들을 딸보다 훨씬 어린 나이에 떼어놓게 되었습니다. 남들은 그 김에 팔자가 편 거라고 축하를 해주지만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내심 짠하고 서운한 건 또 어쩔 수 없는 어미만의 감정이지요.

 

그런 아들이 몇 달 만에 겨우 이박삼일 짬을 내서 집으로 올 수 있다는데 ‘오면 오는 거지’ 정도로 심드렁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곧바로 핸드폰에 담긴 스케줄부터 확인했어요. 마침 그 주말에 아무 일이 없어 얼마 전부터 혼자만의 여행을 벼르던 기간입니다. 아직 예약도 안했고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않았습니다. 임박할 때까지 별 일만 안 생기면 이번에야말로 기어이 떠나려고 즐거운 상상만 하고 있던 참이었죠. 아들의 전화 한 통으로 그 여행은 가볍게 물 건너갔습니다.

 

같이 사는 남편이나 딸이 섭섭하지 않을까 눈치를 보면서도, 무슨 큰 손님이나 맞이하는 사람처럼 저 혼자 수선을 떨었습니다. 일주일 전부터 오이소박이와 물김치를 담그고 시장에 가서 바리바리 먹을 것을 사다가 냉장고에도 쟁여두었습니다. 머리로는 이런 일들이 아무 소용도 없다는 걸 알고 있어요. 아이는 시간만 나면 제 방에 틀어박혀 자다가, 친구 만나기에만도 바쁘겠지요. 우리 네 식구 한 자리에 모여 겨우 한 끼니나 먹을 수 있으려나 싶긴 합니다. 그걸 알면서도 기어이 미련한 짓을 해요.

 

 

엄마 은퇴식까지 한 사람이 왜 그렇게 집안일에 안달이냐고 가끔은 주위에서도 놀립니다. 하지만 누구에겐가 나의 존재가 ‘집HOME’으로 기억되는 한, 되도록 그 감정을 누리게 해주고 싶은 소망이 있습니다. 그건 아무나 해줄 수 없는 특권에 속하니까요. 밖에서 지친 아들에게 아직은 네 어리광을 마음껏 부릴 곳이 건재하다는 사실을 확인시키는 것으로 이 엄마의 존재를 드러내고 싶은 겁니다.

 

그렇게 찾아온 주말, 아들과 오랜만에 마주 앉아 늦은 아침을 먹었습니다. 문득 친정 엄마 생각이 났어요. 보통 때 같으면 이 시간에 반찬거리를 사들고 찾아뵙는 터라 혹시 기다리시지나 않을까 싶었습니다. 아들에게 문안 전화 시키려다 말고 장난삼아 실험을 해보기로 했습니다.

 

“OO야, 퀴즈 하나 내볼게. 엄마가 지금 ‘평소 같으면 주말에 외할머니 뵈러 가는 날인데 오늘은 못 갔어. 할머니가 왜 안 오는지 궁금해 하시겠구나.’라고 말을 건네면 거기 숨어 있는 뜻이 뭐겠니? 여자와의 난이도 높은 대화법도 연습할 겸 한 번 풀어보려무나.”

 

아들은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입니다. 일단 왜 안 갔냐부터 묻습니다. ‘당연히 너 때문에 안 갔지’라고 하니 이 아이가 또 심각해집니다. 자기 일정 때문에 엄마의 스케줄이 바뀔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나요? 어이구 참. 그러면 외부 요인이 된 자기 방문을 비난하는 것인지, 혹은 가지 않기로 결정한 엄마의 내부적 자책감을 위로해달라는 것인지 그것이 또 헷갈린답니다. 이 아이, 참 쉬운 대화를 어렵게도 끌고 갑니다.

 

할머니에게 전화해보라는 소리라고 하니 아들이 펄쩍 뜁니다. 간단하게 전화하라고 하면 되지 왜 그렇게 비비 꼬아서 말하느냐고요. 모자가 옥신각신 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머지 식구도 아침을 먹으러 하나둘 식탁으로 나왔습니다. 자기 생각에 동조할 사람을 구해보려고 우리는 남편과 딸에게 열심히 자초지종을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웬 걸. 50대 50 무승부입니다. 딸은 예상대로 정확하게 답을 맞혔는데, 남편은 아들과 똑같이 볼멘소리를 합니다. 누가 그런 숨은 의도를 알 수 있겠냐며 말도 안 되는 소리래요.

 

어쩌면 이런 남자들과 한 집에서 삼십년간 살아왔다는 게 기적인 것만 같습니다. 반은 그냥저냥 무슨 소리인지 서로 알아듣지도 못하고 지나쳐버렸을 테니까요. 아들은 신세대라 조금은 나을 줄 알았는데 실망입니다. 정말 제 화법이 그렇게 이상한 걸까요? 남편은 그간 쌓인 억울함에서였는지, 쉬운 말을 두고 어렵게 말하는 아내를 마치 악당처럼 몰아갑니다. 관계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늘 이런 식으로 에둘러 말해 듣는 사람을 수렁에 빠뜨린다면서요.

 

하긴 좀 그런 면이 있었습니다. 관계에 대한 집착까지는 아니었지만 서로 기분상하지 않기 위해 이런 식으로 많이 이야기했던 것 같습니다. 제 딴에는 배려하는 마음에서 나온 우회적 부탁이었어요. 강제 조항이 많아지면 집이 군대나 직장처럼 될까봐서요. 그런 충정을 몰라주고 에둘러 말하는 표현 방법이 문제였다니 뭔지 모르게 한참 억울했습니다. 그간의 정신노동이 물거품이 된 것처럼 허무해지더군요. 4인 가족 난상 토론은 이 날도 역시 결론 없이 말만 무성한 채 유야무야 그렇게 끝이 났습니다. 아들도 꿈에 본듯 그렇게 휘딱 왔다가 또 바람처럼 사라져버렸구요.

 

그런 주말이 지난 다음에 오십대 아줌마들끼리 만나는 모임이 있었습니다. 취직 못해 죽상인 아들, 애 키우기 힘들어서 우울한 딸, 아프고 외롭다는 부모들의 하소연으로 얼룩진 갱년기 여성들입니다. 우리들 이야기는 알고 보면 대개 거기서 거기입니다. 가족에게 더 이상 도움이 안 되는 것 같으니 허전하고, 도울 일이 많아지면 화가 나고, 도우려다 보니 힘에 부쳐 여기저기 아프다는 소리지요. 이젠 다들 자기 코가 석자에요. 그러면서도 집(HOME)이 되어주지 못하는 마음에 쓸쓸해지는 겁니다. 마주앉아 서로 ‘이제 고마 해, 너나 챙겨!’를 후렴구로 넣어가며 실컷 떠들어댔습니다. 후련해요. 하긴 이제 정말 자기 자신부터 잘 돌봐야하는 나이이긴 합니다.

 

가족 기분을 살피며 전전긍긍하던 감정노동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헛수고라는 걸 깨달아가는 요즘, 저도 될수록 명료한 명령어로 의사소통을 하고자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몇 월 몇 일 몇 시까지 이 임무를 정확하게 완수하시오!”라는 식으로 대화법이지요. 해보니 재미가 쏠쏠합니다. 애매한 화법으로 생길 수 있는 오해도 많이 줄어든 것 같아요. 그 대신 느슨했던 가정 대화가 조금씩 경직되어간다는 느낌은 어쩔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남편은 저를 요새 ‘장군님’이라고 부릅니다. 여성다움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나요? 사려 깊게 두루뭉수리 신경을 쓰니 애매하대고, 명료하게 소통하려니 이게 영 딱딱하답니다. 아니, 그럼 도대체 절더러 어쩌란 소리랍니까? 이런이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