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했던 어린 시절, 소년이 학교 갔다 돌아오면 집은 텅 비어있었다. 아버지는 일터로, 어머니는 시장에 장사하러 나가셨다. 해가 지면 식구들이 집으로 돌아오고, 비었던 집은 다시 북적이기 시작했다. 거기엔 예외가 있었다. 바로 비 오는 날이었다.

비가 내리면 시장에 나가셨던 어머니는 장사를 접고 일찍 집으로 돌아오셨다. 언제부터인가 비가 오면 어머니가 일찍 집으로 오신다는 것을 알았고, 그 날은 슬레이트 지붕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요란했다. 그때부터 소년에게 슬레이트 지붕 위의 빗소리는 어머니가 오는 반가운 소리였다.

소년은 어느덧 중년이 되었다. 이제 빗소리를 들으면 어린 시절 어머니를 기다렸던 그때가 생각난단다. 슬레이트 지붕에 떨어지는 빗소리는 소년의 가슴에 새겨진 어머니의 소리. 그 빗소리가 그리워 생뚱맞게 오디오 시스템이 아닌 슬레이트 지붕을 건물 옥상에 설치했다. 지독히 가난했던 어린 시절, 어머니의 추억을 간직하고 싶었던 것.

 

 

비의 감성과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을 오래도록 간직하고파서 슬레이트 지붕을 설치한 남자. 어릴 적 들었던 빗소리, 떨어지는 굵은 비를 바라보았던 순간순간들이 그 남자에게는 어머니와의 따뜻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그 추억이 지워지지 않는 것은 비와 함께 소년의 숱한 감성이 녹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의 감성이란 온몸에 새겨지는 것이다. 한결같은 자연이고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그 가운데 켜켜이 쌓인 경험들이 지금을 지배하고 있다. 현재의 우리는 과거의 자신과 함께 살고 있다. 과거의 흔적과 기억들이 뭉쳐져 몸 어딘가에서 반응하고 있다. 몸의 기억이 머리의 기억보다 더 강렬하고 오래 지속되나보다.

 

우리가 온몸으로 느꼈던 ‘비’를 다른 관점에서 경험하게 한 체험형 설치 작품이 있다. 2012년 영국 런던 바비칸 센터에서 처음 공개한 세계적인 미디어 아티스트 그룹 ‘랜덤 인터내셔널(Random International)’의 뉴미디어 설치 작품인 ‘레인룸(Rain Room)’이다. 한국에서는 부산현대미술관에서 2019년 8월 15일에서 2020년 1월 27일까지 전시되었다.

레인룸은 30평가량의 공간에서 10분간 체험할 수 있다. 레인룸 안으로 관람객이 들어서면 폭우가 쏟아지는 환경에 노출된다. 그 공간에 진입하기 전 복도에서부터 축축한 습도가 느껴진다. 귀가 먹먹할 정도의 세찬 빗소리와 강렬한 비 냄새. 그러나 눈앞에서 억수같이 내리는 비를 아무리 걸어 다녀도 맞지 않는 레인룸.

 


RANDOM INTERNATIONA, Rain Room, 2013, MoMA.  [사진: 부산현대미술관]
[출처: 중앙일보] 강렬하고 우아한 '첨단 폭우', 세계적 설치작품 '레인룸' 온다

 

레인룸에선 비를 맞지 않으면서도 자유롭게 비를 경험한다. 레인룸의 비는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었던 비와는 다르다. 우리는 비를 맞으면서 느끼고 경험하는 대상으로 생각했다. 우산이 없는데도 비를 맞지 않은 채, 보고 듣고 냄새로 비를 경험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게 아닌가? 얽히고 설켜지는 비에 대한 단상들. 그러나 나쁜 감정이라기보다는 낯선 감성으로 세팅되는 기분이다.

빗줄기를 눈앞에서 보며, 거센 빗소리를 들으며, 덥고 습한 물비린내까지 끼쳐오는 레인룸에서 젖지 않는 비를 체험한다. 기존의 자연 비에 대한 경험이나 기억과는 다른 이질적인 체험이다. 매체가 만들어 낸 젖지 않는 비를 체험하면서, 인간의 반응과 지각을 되돌아보게 한다.

경험으로 체득한 감성과 매체에 의해 길들어진 감성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테크놀로지가 인간의 감각, 의식, 사고를 확장시킬까 축소시킬까? 10분간의 체험으로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정체성, 자연과의 관계, 변화와 적응에 관해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젖지 않아 우산이 필요 없는 비, 빗소리를 들으며 바라보기만 하는 비, 이런 비가 단순히 신기한 것만은 아니다. ‘비’라는 자연 앞에서 인간은 때론 순수하고, 때론 나약하고, 때론 관조적이지 않았던가. 유일한 희망처럼 비를 기다리며, 운명처럼 비를 맞으며, 자연의 순리에 순응했던 인간의 지혜롭고 겸손한 삶이 무너질까 두려운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비에 대한 낯선 예술적 경험. 이런 낯설음이 이제 시작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두렵다. 얼마나 낯설어야 제대로 낯설다고 할 수 있는가? ‘재난’ ‘긴급’ ‘구호’라는 무겁고 긴박한 단어들이 생활 속에 밀착해서 다가온다. 어느새 감각적으로 익숙하게 느껴진다. 낯설음과 익숙함이 이렇게 가깝게 있었다니.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매체가 만든 레인룸을 걸어가듯,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현실 세계를 걸어가고 있는 지금이다. 분명한 건 우리는 낯선 세계를 익숙한 듯 살아야 하는 인간이라는 것. 생존을 핑계로 하든 그 어떤 이유에서든 인간의 본질만큼은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인간 자체가 낯설어지면, 그것은 대재앙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