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퇴직 후의 ‘제2의 인생’을 예로 여가 생활 즐기기, 귀농, 재취업 등을 이야기한다. 거기서 벗어나 사회적 과제 해결에 눈을 돌린 시니어가 있다.
유아의 옷 갈아입히기를 배우는 남성들
후루쿠보(66세) 씨는 남녀 공동참여와 차세대 육성지원을 활동 목표로 하는 NPO 법인 ‘에가리테 오테마에’의 대표다. 회원은 주부, 회사원, 의사, 사회복지사, 공인회계사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활동 내용은 전국 각지에서 열리는 할아버지의 손자 키우기 강좌를 운영하고, 차세대 육성지원 달성도에 대한 지방자치단체의 순위를 작성하여 공표하는 등 다채롭다.
현역시절에는 오로지 회사 일밖에 모르던 종합상사 직원으로서 맹활약했으나 지금은 180도 다른 ‘인생 2막’을 살고 있다. 어떤 계기가 있었을까?
일만 알았던 현역 시절
그는 1978년 대학을 졸업하고 종합상사에 취직했다. 그 당시 여성 사원도 입사했지만, 남성 사원의 보조 역할에 그쳤다. 성별 역할분담이 고정된 이런 상태에 대해 아무런 의문도 품지 않고 당연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회사 동료인 지금의 아내와 결혼하여 딸 하나를 낳았다. 가사와 육아는 전적으로 아내의 몫. 본인은 거의 매일 전철 막차가 끊어져 택시로 귀가하고 명절이나 휴가 기간에도 가족들은 남겨둔 채 해외 출장을 떠나기 일쑤였다. 한 마디로 남편과 아빠로서는 빵점이었다.
50세를 앞두고 회사에서 3조 원 가까이 손실이 발생한 불상사가 있었다. 평소에는 친하던 사원들끼리 서로 책임을 전가하는 모습을 보고는 그만 회사생활을 접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회사원에서 NPO 활동가로 변신
조기 퇴직하고 앞으로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지를 고민하고 있을 바로 그 무렵, 남녀공학이었던 고교의 동창 20여 명과 만나는 모임이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 서로의 근황을 묻자, 남자들은 대부분 민간 기업에서 현역으로 뛰고 있었고, 여자 동창 10여 명은 모두 젊은 시절 직장 생활을 하다가 결혼과 동시에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그만두고 평생을 전업주부로 살아왔다. 그때 대학에 다니던 외동딸이 생각났다. “내 딸도 여자라는 이유로 능력이 있어도 승진도 못 하고 그만두어야 하는 삶을 살아야 하면 어떡하나?”
기업 사회에 대해서는 더 미련을 갖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여성의 지위 향상에 관련된 일을 하면서 제2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이 번개처럼 머리를 스쳐 갔다.
남성 위주의 사회에 의문을 품지 않고 살아온 것에 대한 속죄 의식, 자녀와 손자는 다른 가치관의 사회를 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동창들에게 이야기하고 공감을 얻어냈다. 2004년 봄, 동창들과 함께 NPO 법인 ‘에가리테 오테마에’를 설립했다. ‘에가리테’는 프랑스말로 ‘평등’을 의미하고 ‘오테마에’는 남녀공학인 모교 이름이다. 말하자면 남녀평등을 지향한다는 의미를 담았다.
지방자치제 순위 매기기
법인의 활동 목표로 ‘남녀 공동참여’, ‘차세대육성지원’을 내걸었지만, 처음엔 “무엇을 하면 좋을지 전혀 감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때 생각난 것이 법인설립 전년도인 2003년에 성립한 ‘차세대육성지원대책추진법’이었다. 이 법에 따라 지방자치단체는 일과 육아가 양립할 수 있는 환경 만들기 행동계획을 작성해 후생노동성에 제출하고, 각각의 홈페이지에 계획의 내용과 달성 상황을 공표하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우선 3,000개에 달하는 모든 지자체의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행동계획을 분담하여 읽어보기로 했다.
모두 읽어본 결과, 남의 것을 베낀 똑같은 문서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나름대로 독자적인 계획을 세운 지자체도 있었다. 이렇게 제대로 노력하는 지자체를 널리 알려 차세대육성지원의 분위기를 조성하자는 생각에서 여러 항목에 대해 점수를 매겨 지자체의 순위 매기기 작업에 착수했다.
2006년 주요 도시 100여 곳을 대상으로 처음 실행한 순위 조사 결과를 공표한 이래 매년 발표하여 언론에서도 관심 있게 기사화해주고, 육아하기 쉬운 도시가 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상담해 오는 지자체가 있을 정도가 되었다.
할아버지와 아빠에 대한 육아 강좌
‘할아버지•아빠 육아 전문가 강좌’도 인기 사업의 하나이다. 이 사업의 계기는 처음 순위 조사를 공표했을 때 품었던 “육아 과제 해결을 지자체에 맡기기만 하면 될까?”라는 의문이었다. 그래서 아기 목욕법, 이유식 만드는 법, 함께 놀아주는 법 등에 관한 교육을 아빠와 할아버지에게 가르쳐주는 강좌를 시작하기로 했다. 지금 50개 이상의 지자체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이 NPO 법인의 운영 수입의 대부분은 이 강의 사업에서 나온다.
딸은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고 부부가 맞벌이하고 있다. 후루쿠보 씨는 매일 저녁 어린이집에 가서 손주 둘을 데려오는 일을 하고 있다.
앞으로는 또 ‘여성활약추진법’에 따라 기업을 대상으로 ‘여성 활약도 순위 조사’를 하여 발표함으로써 현재 일본 상장기업에서 전체 임원의 1%에도 못 미치는 여성 임원의 수를 끌어올리는 데 도움이 되고자 한다. “조금이라도 더 여성과 다음 세대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나의 목표다”라고 말하는 후루쿠보 씨의 표정은 빛난다.
참고 사이트 https://www.egalite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