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극작가이자 시인이었던 벤 존슨은 "참다운 행복을 만드는 것은 수많은 친구가 아니라 훌륭히 선택된 친구다"라고 했으며, 고대 로마의 그리스인 철학자인 플루타르코스는 "인생에 우정보다 고귀한 쾌락은 없다"고 강조했다.
나는 이들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훌륭히 선택된 친구, 그리고 그 친구와 고귀한 쾌락의 우정을 나누는 일. 평생을 함께할 수 있는 이런 친구가 곁에 있다면 그 삶은 이미 성공한 인생이지 않을까. 친구여도 좋고 반려자면 더욱 좋을 것도 같다.
윤정희, 백건우 부부 (사진 출처 : 허핑턴포스트)
함께하는 친구가 나의 취미나 일과 관련이 있다면 그 사귐에 서로의 지지가 되어줄 수도 있으니 향기로운 관계라고 할 것이다. 배우 윤정희 씨와 피아니스트 백건우 씨의 생활을 지면이나 방송을 통해 접할 때마다 그들 부부의 관계가 그렇지 않았을까 싶다. 부부이면서 친구 같고 연인 같은 서로에게 고귀한 우정의 쾌락을 주는 관계.
피아니스트이면서 영화를 좋아하는 남편, 배우면서 클래식 마니아인 아내. 배우자의 일을 좋아하니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도 빠르다. 감성적인 삶을 살아온 분들이기에 그것이 가능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서로 손잡고 거니는 것을 좋아해 시간이 나면 함께 걷는 것을 즐긴다. 당연히 서로의 일에 대한 대화를 주고받으며 생각을 나누기도 했을 것이다.
어느 지면에선가는 그들 부부가 하나의 휴대폰을 사용해 한 사람이 들고 나가면 다른 사람과는 연락할 방법이 없다며 웃으며 털어놓는 것을 봤다. 사생활을 엄격하게 존중하는 부부에 견주자면 불편해서 어떻게 사냐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분들이 또 그만큼 서로 가깝게 의지하고 지지하며 평생을 살아온 까닭이지 않을까 싶다.
인생이 하나의 여행이라면 이들 부부처럼 여행하고 싶다는 것은 비단 나만의 감상은 아닐 것이다. 내 경험의 부족을 채워줄 수 있는 혹은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미련을 떨쳐낼 수 있게 해주는 친구다. 과거의 시간을 함께 했거나 현재의 시간에 머물러 있거나 미래의 시간을 함께 할 친구.
반려자만한 친구가 어디에 있을까 싶음에도 현실의 부부들은 서로의 가치를, 서로의 소중함을 등한시하는 경우를 종종 접한다. 로또처럼 영 맞지 않는다고 불평을 하기도 하고 서로의 관계를 이어가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기도 한다.
혼자로 살아가는 이들은 평생의 친구나 마음의 자리를 굳힐 수 있는 반려자를 만날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렇다고 한다면 자신의 곁에 있는 반려자와 가까운 친구들에 대해 좀 더 많은 관심과 아량을 베풀어야하지 않을까. 훌륭히 선택된 사람이며 고귀한 쾌락을 나눌 수 있는 관계가 생긴 것에 대해 고마운 마음을 가져야 될 것 같다.
나는 가끔, 자주 만나는 친구가 있냐는 물음을 받는다. 타인의 사생활에 대해 궁금해 하지 않는, 알고 싶어도 묻지 않는 시대를 살고 있음에야 이런 물음들은 나에 대한 지극히 사적인 관심이거나 홀로 지내는 시간이 많은 나에 대한 측은지심의 발로다.
몇 명의 친구를 곁에 두어야 우리는 자신의 삶이 외롭지 않고 윤택하게 굴러가고 있다고 여길 수 있을까. 혹자는 술친구, 취미친구, 업무친구, 상담친구 등등 상황에 따라 필요한 친구를 선택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반려자에게는 할 수 없는 말이 다른 사람 앞에서는 술술 잘도 나온다. 인생을 함께 살아가자고 약속했으면서 반려자를 친구로 여기지 않게 된 이유가 뭔지 못내 궁금하다. 반려자만큼 우정을 나누기 좋은 이도 없을 것 같은데 말이다.
서로에게 말 못할 비밀이 생겨서일까. 상대에 대한 자격지심이 생겨서일까. 서로를 배려해주지 않아서일까. 자기중심적인 관계를 만들어서일까. 서로의 삶에 물질적이든 정서적이든 윤택함을 지워줄 수 있는 밀착된 친구이지 않은가. 그럼에도 부부가 된 그들의 우정은, 친구는 반려자의 외부에 있기 쉬워 안타깝다.
혼자인 나는 가끔 진지하게 자문해본다. 내 삶에서 친구라고 말할 수 있는 범위는 대체 어디까지일까. 친구 중에서도 친한 친구를 따로 묻기도 하니 '친구'는 실로 다양한 범위로 확대된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때때로 만나서 차를 같이 마실 수 있으면 친구인가. 일 년에 한번을 만나더라도 내 속내를 훤히 꿰뚫어 헤아려주는 친구가 진짜 아닌가.
솔직히 어디까지를 친구라고 말할 수 있는지 자신은 없다. 다만, 플루타르코스가 말하는 고귀한 쾌락의 우정을 나누는 친구의 관계는 단순히 안부를 챙기고 어려움을 알은체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듯싶다.
친구가 많다고 하는 이들일수록 진정한 친구가 몇 명이냐고 되물으면 대답이 쉽게 나오지 않는다. 이렇듯 친구가 몇 명이야, 라는 말 앞에 '진정한'이 붙으면 다들 고개를 갸웃거린다. 의미를 되새기다보면 자신이 말한 친구의 숫자에 점점 자신을 잃는다. 나 자신이 불행에 처했을 때, 손 내밀어 도와줄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함께 들기 때문이다. 결국엔 친구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며 쓴웃음을 짓기도 한다.
폭넓은 인간관계를 자산으로 여겨 각 분야의 많은 친구들을 두고 수시로 만남을 가졌던 어떤 이의 고백이다. 사는 곳을 옮기면서 만나는 친구를 다섯 명으로 제한을 했단다. 그리고 깨달았다고 한다. 그동안 왜 그토록 많은 친구들을 만나면서 자신의 시간을 쓸데없이 허비했는지 모르겠다고 말이다.
자신을 단련시키고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은 친구의 숫자에 달려있지 않다. 스스로의 성장에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을 쏟고 관여했는가에 있다. 영국의 비평가인 존 철튼 콜린스는 "풍요 속에서는 친구가 나를 알고 역경 속에서는 내가 친구를 알게 된다"고 했다.
나의 말을 진정으로 들어주는 단 한 명의 친구만 있어도 우리는 죽음을 피해갈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반려자는 나의 생활 전반을 함께할 수밖에 없는 친구다. 운명공동체로 엮여 있어서 불행도 행복도 함께 지고 가야하는 친구인 셈이다. 나의 식성과 성격을 알고 싫어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을 알며 하루 스물네 시간 언제든 대화의 문을 두드릴 수 있는 친구다. 훌륭히 선택된 친구가 반려자가 아니면 또 누구란 것인지 진실로 묻고 싶다.
러시아의 소설가이자 사상가인 도스토옙스키는 "세상에는 기묘한 우정이 존재한다. 서로 잡아먹을 듯이 으르렁거리면서도 헤어지지 못하고 평생을 그대로 살아가는 인간들이 있다"며 부부관계를 꼬집기도 했다.
학창시절에만 친구를 잘 사귀어야하는 건 아니다. 학창시절엔 친구를 잘못 둬서 샛길로 빠졌다고 핑계라도 댈 수 있지만 나이가 든다는 것은 다르다. 부부관계도 친구관계도 사회적 관계도 자신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인품과 격을 갖춘 성숙된 관계에 더욱 신경을 써야한다.
아랑의 말을 빌리자면 "우정은 자신에 대하여 행하는 행복한 자유 약속이다. 그것은 자연의 공감을 불변의 친화로 바꾼다. 그것은 정념이나 이해관계나 경쟁심이나 우연을 미리 초월하고 있다"고 한다.
인생을 함께 걸어온 반려자야말로 이런 모든 것을 초월한 관계가 아닐까 한다. 우리는 관계를 맺는데 성실해야 한다. 헤프게 맺지 말아야한다. 진정성 있는 관계의 시간 투자를 해야 된다는 것을 이제는 알만한 나이가 되지 않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