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거리 두기? 관계의 수평 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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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들어 최소 두 계절 동안 사회적 거리 두기를 연습했고, 그러는 동안 자연스럽게 인간관계를 돌아보게 되었다. 물리적으로 거리를 두며 가까이 만나는 가족과 친구, 지인과의 심리적 거리를 되새기게 된 것이다. 사실, 호시절의 ‘선택’이라 할 만한 연인 관계일 때가 아니라면 인간관계는 가까울수록 삐거덕거린다. 그중 가장 쉽지 않은 관계가 가족이다. 좋거나 싫거나 상관없이 내 일부이기도 해서 ‘선택’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라 ‘필수’이고, 필수에는 부담이나 책임이 따라붙기 십상이니까.
가족 중에서도 특히 부부나 부모-자식 간에는 정도와 밀도 같은 디테일만 다를 뿐, 갈등과 고민이 있게 마련이다. 너무 가까운 거리에서 지냈던 탓이다. 게다가 개인화로 치달으면서부터 전통적 가치를 우선시했던 우리 사회에서는 옴짝달싹 못 하는 거리에서 갈등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누구의 문제일까?
한 사람 안에는 수많은 ‘권리’가 있다. 가장 기본적인 생명권이나 인권은 너무나 당연하다. 개인 간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순간에야 서로 다른 감정으로 보편과 통계를 바라본다. 숫자나 개념 같은 추상성 높은 말들은 일상적 ‘감정’과 층위가 다르다. 누구나 고개를 끄덕인다 해도 내 감정에서는 못 받아들이는 논리가 존재한다. 보편은 개별과 다른 방식으로, 이상과 실제는 평행선으로 있으면서 서로 합쳐지는 ‘그날’을 희망한다. 둘 간의 틈 때문에 목표가 생기고, 오늘을 견디는 건지도 모른다.
살면서 약자가 아닌 적이 있었던 사람이 있을까? 어느 곳에서든 약자의 모습이 보이고, 그 옆에는 늘 강자가 있다. 필자는 어려서부터 존재론적으로 약자라는 걸 감지했다. (지금은 다른 얘기가 되어버렸지만)50년 전, 가난한 집의 여성으로 태어난다는 건 축복받지 못할 일이고, 고단한 인생이 예고된 것이다. 뭔지 모르는 어린 시절이어도 자신이 사랑받는 존재인지 아닌지를 느낀다. 그렇게 해서 집안에서의 역할, 학교에서의 교육과 공부 성적, 사회생활과 결혼 등에서 다양한 위치를 경험한다고 해도 어느 날 문득 본능적으로 후천적 자아를 느끼는 순간, 기분은 꿀꿀해질 수밖에 없다.
인권이란 말이 근대 프랑스혁명 때의 이념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인 요즘, 우리는 공평하게 대우받고 평등하게 살아갈 권리가 있다는 걸 알지만 이상과 현실의 간극이 존재한다. 모든 게 ‘자기 할 탓’이라는 믿음으로 살았던 필자는 배우기 전의 무의식으로 배우고 나서의 이상향을 꿈꿔 왔다. 최근 들어 이 믿음에 구멍과 실금이 생겼다.
후배 중 남편과의 관계에서 오는 갈등이 결국 자식 문제로 이어지는 모습을 보았고, 그 모습에 돌연 필자의 과거의 소환됐던 것이다. 지난날을 잊고 살다가 난데없이 자신의 과거를 보게 되었다고나 할까? 사춘기 때 겪었던 갈등으로 아버지를 미워하게 된 나머지, 남자 일반에 대한 선입견이 생기는 옛 경험은 그 후배의 딸이 아빠와 겪는 갈등과 다를 게 없었다.
현대적인 의미에서 인권은 천부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라 해도, 가족 내 서열로 약자가 되어 버리면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기 일쑤다. 오랫동안 약자로 살아온 여성의 경우 대체로 자식을 키우면서 자연스럽게 에너지의 방향이 남편보다는 자식으로 향한다. 열 달 동안 직간접적으로 교감하다가 낳은 생명체인 만큼 보살피고 책임져야 한다는 의식은 (남편도 그래야 한다는 당위는 논외로 하고) 당연해 보인다. 물론 원하지 않는 임신은 해당되지 않는다. 여성은 남성과는 다른 방식으로 자식과의 관계를 만들어 간다. 후배의 경우, 남편보다는 자식 키우는 데 극진했고, 가정적이지 않은 천성의 남편은 밖으로 나돌았다. 자식이 장성하자 부녀지간의 소통은 거의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관계라는 건 저절로 맺어지지 않는다. 농경사회에서는 자연이 매개된 관계여서 ‘순리’에 따르면 그만이었다. 그만큼 단순할뿐더러 순서와 서열대로 따르면 되었다. 하지만 지금 같은 정보사회, 4차 산업혁명 사회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수직보다는 수평을 논하고, 점차로 혈연·지연·학연 관계에서 벗어나면서 돈/자본이 ‘자연’ 역할을 하는 중이다. 그러니 직업이나 직장이 돈을 매개로 서열화할 수밖에 없고, 민주적인 수평 구조를 말하면서도 돈에 따른 위계화가 한창이다.
가족은 더 이상 나를 보호해 주는 ‘울타리’가 아닐지 모른다.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내가 역할을 못 하면 나를 옭죄고 구속하는 ‘통제소’가 되기 때문이다. 가족으로 함께하려면 소통의 시간도 필요하고, 방식에 대한 교육도 필요하다. 서로 존중하지 않는다면 한자리에 있을 수 없고, 그럴 이유도 없어졌다.
우리 안에는, 그동안 의식하지 못했던 수많은 일들이 흔적으로 새겨져 있다. 45억 년 나이의 지구에서 20만 년 전부터 나타난 현생 인류 초창기에는 개인의식이 없었고 그저 무리로 살아가는 데 급급했지만, 이제는 개인의 세분화에 이어, 인간을 뛰어넘는 다른 종의 출현까지 예상하는 시점이다. 이런 때 ‘가족’을 말하는 것은 뒤떨어진 ‘사고’일 수 있다 해도, 첫 인간관계를 배우는 현장이라는 점에서 가족은 아직 우리의 근본으로 ‘존재’한다.
우리는 자신의 다양한 권리 중에서 어떤 것을 끄집어내느냐에 따라 다른 사람이 되기도 한다. 선택은 자신의 인식력과 통찰력과 관련이 있다. 필자는 (모든 사람이 그럴 테지만) 약자로 살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강자가 되고 싶지도 않다. 두 관계는 상대적이기에 이름을 달리하여 갑-을 관계로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분법적인 관계를 대신하는 소통의 개념을 떠올리고 싶다.
손을 맞잡을 수 있는 거리(distance)에서 함께하기. 상처가 아닌 추억을 나누면서 그것을 경험으로 기억하기. 기술 우위, 효율 중심의 사회에서 생각과 마음을 나누는 관계 일구기. 저마다 꿈꾸는 미래는 상상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시작할 수 있으면 된다. 그러면 미래를 꿈꿀 필요가 없다. 이미 거기에 와 있는 거니까. 지금 자리만 잘 가꿔도 우리는 풍요로워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