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섬에서 보낸 하루, 송이도(松耳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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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적한 섬에서 고요했던 시간들
굴비의 짭짤한 내음이 풍기는 영광의 법성포 굴비 거리를 지나 향화도 선착장에서 배를 탄 것은 오후 두 시 반이었다. 송이도를 왕복하는 배는 하루 두 번 운행한다. 배에 오르니 가까운 바다에 드리운 양식장의 풍경이 가지런하다. 옆으로 배가 지나니, 물살이 잔잔히 흔들렸다. 배 안에는 송이도 섬 주민들이 생필품 등 잔뜩 장보기를 한 물건을 싣고 여기저기 흩어 앉아 있다. 바다 위로 갈매기가 날고 열린 문으로 들어온 갯내음 나는 바람이 시원하다. 그렇게 한 시간 반이 지나고 송이도 선착장에 도착했다.
송이도(松耳島), 소나무가 많아서 그리고 사람의 귀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숙소 앞으로 펼쳐진 바닷가엔 매끈하고 동글동글한 돌들이 가득하다. 송이도는 오랜 세월 파도와 함께 다듬어지고 만들어진 몽돌해변으로 잘 알려있다. 이제 비로소 마음껏 즐길 수 있다.
60여 가구가 살고 있다는 송이도엔 이동수단이 마땅치 않다. 민박집 주인께서 직접 운행해주시는 트럭을 타고 좁은 산길을 달려 바다로 갔다. 섬인지 숲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숲이 울창하다. 창밖으로 왕소사나무 군락지가 보였다. 산림유전자원 보호림으로 지정된 곳이다. 인적이 드문 원시의 숲 느낌 그대로다. 무엇이 먼저랄 것 없이 산과 바다가 함께 하는 자연 그대로의 섬은 더없이 아름답다.
트럭을 타고 넘어간 산 아래엔 또 다른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눈앞에 좌우로 안마도와 석만도가 바다 위에 오롯이 올라앉아 있었다. 민머리 갯벌의 물 빠진 바다에 맨발로 들어서니 부드러운 촉감이 피부를 감싼다. 그곳에 자연이 만들어준 해식동굴이 태고의 이야기를 품은 듯 기다린다. 어두운 동굴 안에서 바라다보는 천혜의 바다가 꿈결처럼 아른거린다. 철퍼덕거리며 장난스럽게 마구 걸어보니 천연머드의 고운 질감이 느껴진다. 갯벌 위를 걷는 것은 어린아이들만 즐거운 것이 아니었다. 끝없는 바다를 바라보며 맨발로 걷는 맛, 아... 행복하다.
걷다가 뽀글거리는 갯벌의 숨구멍을 파 보면 백합조개와 대맛조개가 올라온다. 이곳의 특산물로 아주 실하고 맛도 일품이라고 한다. 끌개로 갯벌 위를 밀면서 조개잡기를 하며 해가 저물도록 놀았다. 어릴 적 바다에서 놀았던 풍경과 다 큰 어른들이 노는 모습이 다를 게 없다.
물이 빠지면 각이도까지 약 7km의 길이 펼쳐지는 모세의 기적을 볼 수도 있다. 이곳은 백합과 맛조개도 많지만 백하 새우와 참새우의 산란장이기도 하다. 갯벌이 주는 것은 어패류 등의 쏠쏠한 먹거리 수입원뿐이 아니다. 여유로운 사색, 혼자만의 시간, 바닷바람에 날려버리는 헛된 잡념들... 썰물 때라서 마음껏 놀았던 바다.
저무는 해를 뒤로하고 숙소로 돌아와 내다보니 어둠이 내린 섬마을 풍경이 신비롭다. 주변에서 여행지의 밤을 즐기는 소리가 들려온다. 도란도란 나누는 대화, 술잔 부딪는 소리, 하얀 몽돌에 부딪는 파도 소리. 숙소 뜰에 앉아 조용히 어둔 밤바다를 바라보다가 들어와 꿈도 없이 잠들었다.
새벽의 바다는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바람이 제법 차서 겉옷을 껴입고 몽돌 위를 걸었다. 발밑으로 돌이 구르는 소리를 들으며 걷다가 해변에 앉으니 몽돌의 촉촉함이 느껴진다. 푸릇푸릇 풀냄새 날 듯한 산 아래 저편으로 캠핑하는 두 개의 텐트에서 비치는 불빛이 이쁘다. 파도소리 들으며 밤이슬 맞으며 잠들기. 부럽다.
조금씩 날이 밝아오자 마을산책을 나섰다. 길가 풀꽃과 나무의 아침이슬이 신선하다. 돌담 넘어 참깨꽃의 보송보송한 솜털에 맺힌 이슬방울이 영롱하게 반짝이고 수백 년을 지켜온 마을 입구의 느티나무가 든든하다. 담장 안의 새하얀 꽃이 눈에 들어와 나지막한 대문에 들어서고 싶게 한다. 어촌 주민들이 잠들어 있는 마을에 이방인이 어슬렁거리는 모양새다. 담 너머로 얼른 사진 몇 컷 찍고 돌아 나왔다.
이른 새벽에 어촌마을 산책하기, 이렇게 기분 좋은 산책을 해본 것이 얼마 만인지. 도시가 가까이 있지만 문명의 손길이 덜 탄 섬마을은 평온하다. 몽돌 해안가를 느릿느릿 산책하는 어르신, 새벽 바다를 사진으로 담아내는 여행자가 평화롭다. 혹시 다음에 또 온다면 삼각대와 ND 필터를 필히 지참할 일이다. 아침 산책길 앞에 산과 아득한 바다가 있다는 것, 자연 속의 송이도 사람들은 참 행복하겠다.
아침식사 후 떠나는 배를 타기 전 남은 짧은 시간을 이용해서 숙소 주인장께서 또 다른 구경을 시켜주겠다 해서 트럭에 올라타고 산길을 달렸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분이어서 해박한 설명을 해주셨는데, 유익했고 재밌었다. 자신의 수고로움으로 조금이라도 더 많은 것을 알려주고 싶어 하는 그분은 진정 송이도를 사랑하는 분인 듯싶다. 덕분에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동화 같은 이 섬에 다시 와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9시 50분 출항하는 배에 오르기 전까지 송이도를 바쁘게 즐겨봤다. 섬 입구에 세워둔 표지석의 글귀처럼 자연도 사람도 아름다운 섬이었다. 뭍으로 나를 데려갈 배가 송이도항에 입항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