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초의 왕릉은 어디일까. 조선 건국 후 처음으로 조영된 왕릉이 정릉(貞陵)이다.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안식처로 서울시 성북구 아리랑로 19길 116에 위치한다. 왕릉 주변은 아름다운 둘레길로 조성돼 있다. 1시간이면 족히 걸을 수 있는 한적한 산책로다. 능은 왕릉으로서는 초라하다. 병풍석도, 난간석도 없다. 석물도 단출하다. 여느 왕릉과는 달리 위엄이나 경건함보다는 포근한 느낌이 드는 이유다. 그러나 정릉의 역사는 아늑함과는 거리가 멀다. 정릉에는 슬픔과 분노와 체념이 세월 속에 켜켜이 스며 있다.

 

신덕왕후는 조선 건국 5년 만인 태조 5년(1396) 8월 11일(음력)에 유명을 달리한다. 왕후를 잃은 태조는 큰 슬픔에 빠져 들었다. 태조는 왕후의 유택을 궁궐에서 바라볼 수 있는 도성 안 황화방 북쪽 언덕에 마련했다. 지금의 서울시 중구 정동 영국대사관 인근이다. 그러나 태조 승하 이듬해인 태종 9년(1409) 2월에 능은 현재의 위치인 도성 밖 양주 사을한록으로 천장 된다. 왕위를 이은 태종이 신덕왕후를 후궁의 지위로 격하시키고 능을 옮긴 것이다.

 

정릉 제향일은 9월 23일이다. 이 무렵에는 유난히 하늘이 맑고, 주변의 초목은 단풍으로 물든다. <출처: 문화재청>

 

태종은 태조의 첫 부인인 신의왕후의 5남이다.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는 무안대군(방번)과 의안대군(방석)을 두었다. 태조는 후계자로 의안대군을 지명했다. 이에 태종은 신덕왕후로 인해 세자위를 이복동생인 의안대군에게 빼앗겼다고 원망했다. 결국 정변이 일어나 무안대군과 의안대군이 숨진 데 이어 신덕왕후의 능이 철훼됐다. 능이 옮겨진지 한 달 만에 정자각도 헐렸다. 설상가상으로 목재는 태평관을 짓는 데 쓰이고, 십이지신상 등의 석물은 홍수로 무너진 광통교로 옮겨졌다.

 

정릉에서는 나라의 제사가 끊겼다. 옛 정릉 터는 황폐해졌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을한록의 정릉도 잊혀져 갔다. 정릉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천장 172년만인 1581년(선조 14) 11월이다. 덕원에 사는 강순일이 임금이 행차하는 수레 앞에 나아가 격쟁한 것이다.

 

“저는 판삼사사 강윤성의 후손입니다. 지금 군역에 배정되어 있으니 국묘를 봉사하는 사람들은 군역을 면제하는 전례에 따라주소서.”<연려실기술>

 

신덕왕후 오빠의 후손인 강순일은 조정에 군역 면제를 요청했다. 당시 왕가의 묘를 관리하는 국묘봉사자(國墓奉祠者)는 군역이 면제됐다. 이를 계기로 정릉 위치 찾기가 시작됐다. 율곡 이이가 나섰다. “신덕왕후는 태조와 같이 모셔야 할 분이다. 마땅히 존숭하여야 한다.”

 

조정에서는 능 찾기에 나섰다. 신덕왕후 외손인 문관 이창이 아차산을 조사했으나 실패했고, 변계량이 태종 때 하늘에 제사 지낸 제문(祭文)에서 국도 동북(國都 東北)을 근거로 능의 위치를 어렴풋이 짐작하게 됐다. 나라에서 심혈을 기울여도 찾지 못하던 정릉은 광평대군 후손의 늙은 종에 의해 세상에 드러난다.

 

신덕왕후를 모신 정릉은 단릉이다. <출처: 문화재청>

 

1669년(현종 10) 2월 3일, 송준길은 신덕왕후의 종묘 부묘 절차와 정릉의 정자각 중건에 대한 의견을 아뢰면서 광평대군 집의 문헌을 이야기 했다. 광평대군가에서 정릉에 제사를 지낸 내용이다. 광평대군은 세종의 5남이다. 신덕왕후와 광평대군은 어떤 사연이 있을까.

 

신덕왕후에게 광평대군은 종증손이다. 세종은 삼촌인 무안대군이 어린 나이에 후사 없이 변을 당한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이에 다섯째 왕자인 광평대군을 후사로 임명했다. 1437년(세종 19) 6월 3일로 무안대군이 피살된 지 39년 만이다. 세종은 입후(入後) 교문에서 안타까움을 밝혔다.

 

“은혜와 친함은 이미 두텁고, 예절은 후사를 세우는 게 가장 큽니다. 존귀한 종친인데 불행히도 후사가 없습니다. 외로운 혼백이 어디에서 의탁 하시겠습니까. 측은히 여기는 마음을 헤아려 주십시오. 옛 제도를 살펴 읍호를 추증하고 광평대군으로 하여금 후사를 정했습니다.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받들고, 특례를 베푸오니 바로 영령이 오신 듯 합니다. 영원토록 제사를 받으시옵소서.”

 

사을한록의 정릉에는 무안대군 부인인 삼한국대부인 왕씨와 세종의 5남인 광평대군이 매년 계절마다 제사를 드렸다. 광평대군이 숨진 뒤에는 아들 영순군과 손자 남천군 등 후손이 정릉을 찾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정릉에는 발길이 끊겼고, 능은 수풀 속에 가려졌다.

오랜 세월이 흘러 폐능이 된 정릉은 끝내 찾지 못하는 듯했다. 이때 예조판서 김첨경이 광평대군 후손인 유학(幼學) 이성장에게 들은 내용을 임금께 아뢴다.

 

“이성장은 전일에 낭청(郎廳)이 능을 봉심할 때, 비록 선대의 일이지만 문견이 넓지 못하여 상세하게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그 후 이성장에게 들은 바로는 무안대군 부인 왕씨가 기사년(1449년)에 73세로 죽었습니다. 왕씨는 동대문 밖 광평대군 집에 살면서 간혹 정릉에 가마를 타고 가 제사를 지냈습니다. 이는 이성장의 조부 때부터 전해 내려오는 말입니다. 또 광평대군의 손부인 남천군 부인 최씨는 기축년(1529년)에 죽었습니다. 최씨는 생시에 매년 속절(俗節)에 제사를 지냈습니다. 이로보아 현재 살아 있는 광평대군가의 늙은 종 가운데 정릉을 본 사람이 있습니다.” <연려실기술 태조고사말본>

 

제향 음식. 정자각에 마련된 제향 음식은 복지에 싸여 정갈함이 유지된다. 제향 때 제관이 복지를 벗긴다. <출처: 이상주>

 

나라에서는 광평대군 후손들과 정릉 찾기에 다시 박차를 가했다. 마침 광평대군가의 늙은 종이 옛 기억을 되살렸다. 어린 시절에 광평대군 후손이 정릉 옛터를 찾는 것을 본 덕분이다. 현재의 정릉은 광평대군가의 늙은 종의 기억력 덕분에 세상에 드러난 것이다.

 

신덕왕후 제사는 1593년(선조 26)부터 다시 지낸 데 이어 현종 때 정릉 위치를 완전히 확인하고 석물을 더하고, 주변 정비를 했다. 또 1669년(현종 10)에는 송시열의 계청으로 종묘의 태조실에 신주를 모셨다. 능 수리, 재실 중건, 수호군 지정, 능호 회복 등도 계속됐다.

 

신덕왕후는 판중추부사 송시열 등의 건의로 1669년(현종 10년) 10월 1일 종묘에 모셔진다. 이로써 신덕왕후는 승하 273년 만에 종묘에 부묘되고, 왕후의 대우를 받게 됐다. 현종은 신덕왕후의 종묘 부묘 축문에서 애달픔과 안타까움을 밝혔다.

 

“삼가 생각하옵니다. 대비께서는 태조의 왕후입니다. 연대는 비록 오래 되었으나, 아름다운 칭호는 계속 되었습니다. 종묘에 승부하는 예를 거행하지 못한 지 여러 해가 지났습니다. 소소(昭昭)하게 오르내리시는 영혼이 마치 강림하여 돌아보는 듯하니, 소자(小子)는 송구스러울 뿐입니다. (---).”

 

광평대군 묘역. 광평대군은 세종의 특명으로 무안대군의 제사를 모시고 있다. 이 연유로 광평대군 후손이 무안대군의 어머니인 신덕왕후를 모신 정릉 제향을 봉행하고 있다.

서울시 강남구 수서동에 있는 광평대군 묘역에는 무안대군 광평대군 영순군 등 700여 기의 묘가 있다. <출처: 이상주>

 

신덕왕후를 종묘에 배향하는 날 정릉에서 성대한 제사를 지냈다. 그날 한양에서 유독 정릉 일대에 많은 비가 쏟아졌다. 사람들이 이를 세원지우(洗寃之雨)라고 불렀다. 신덕왕후의 원한을 씻어주는 비라는 뜻이다.

 

나라에 의해 재개된 신덕왕후의 제향은 선조 때는 매년 한식에 한 번 지내는 것으로 결정됐다. 그러나 현종 때 신덕왕후의 승하일을 병자팔월무자삭무술(丙子八月戊子朔戊戌)로 상고했다. 병자년은 1396년이고 무술일은 11일이다. 따라서 나라에서는 8월 11일을 신덕왕후의 기일로 정했다. (八月十一日, 定貞陵忌辰) 현대에는 전주이씨대동종약원 정릉봉향회에서 신덕왕후 제향을 양력으로 환산해 매년 9월 23일 제향을 모신다. 정릉봉향회는 광평대군 후손들로 구성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