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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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엇을 잃어버렸을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도 한참 더 날이 가고 나서 유품을 정리할 때였다. 어머니가 간직해온 내밀한 것들, 무엇이 있을까? 비자금이 든 봉투나 통장 같은 것들이 나오지 않을까? 형제들은 농담 반 진담 반을 섞으며 어머니가 남겨둔 날개옷 주머니마다 손을 넣어보며, 평생을 들고 다니신 교회 가방을 열며, 미처 내지 못한 헌금 봉투가 있을지 몰라 허전한 마음을 농담으로 달랬다. 그러다 발견한 것은 뜻밖의 물건이었다. 어머니의 ‘다이어리’, 어느 해인가 우리가 쓰는 다이어리를 보시고 당신도 갖고 싶다 하셔서 해마다 한 권씩 사 드렸던 다이어리였다. 다이어리를 펼쳤다.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비어있는 날이 이어지다, ‘오늘 큰애가 왔다. 쇠고기를 사 와서 구워 먹었다’라는 메모가 몇 줄 나오고, 또 몇 장을 넘기니 ‘둘째가 손주를 보았다.’라는 어머니의 일기가 비뚤비뚤한 글씨로 다이어리에 적혀 있었다.
다이어리에 계획만 쓰는 나는 일기 쓰기를 잃어버리고 살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너무 바빠서, 할 일이 많아서, 일기 쓰기보다 중요한 일이 많아서, 다이어리에 적어놓지 않으면 잊을까봐, 실패할까봐, 전전긍긍하며 사느라 잃어버린 일기 쓰기를 어머니의 다이어리에서 찾았다. <잃어버린 것>, 숀탠은 언제나 그렇듯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와 각성을 툭 던지고 간다. 오늘 우리는 더 좋은 무엇을 가지려다 잃어버리면 안 될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고 사는 건 아닌지.
나를 돌보는 법을 배우다
코로나19로 모든 것이 정지된 듯한 시간이 있었다. 시간 강사인 나는 강의가 중단되면서 일없는 시간이 많아졌다. 한때는 간절히 바라던 시간이 손에 쥐어졌지만 그건 내가 쓸 수 있는 시간이 아닌 듯 했다. 무조건 나가서 걸어 다녔다. 하루는 한강으로, 다른 하루는 공원으로, 다른 하루는 앞산으로 또 다른 하루는 뒷산으로. 어느 날은 오전에, 또 어느 날은 해 질 녘에 하루도 쉬지 않고 걷고 또 걷느라 만보기에 2만 보가 찍히는 날이 많아졌다. 그러는 사이 4월이 지나고 5월이 갔지만, 코로나는 풀리지 않았다. 대신 다른 게 눈에 귀에 들어왔다. 강변이나 공원, 낮은 산을 걸으면서 그토록 여러 번 다녔어도 못 보고 못 들었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고 귀에 들렸다. 꽃들이었다. 그리고 지저귀는 새들! 스마트폰을 켜서 사진을 찍어 꽃의 이름을 알아가고 새들의 소리를 들으며 새 이름을 알아갔다. 이름을 아니 그들이 다른 존재가 되었다. 나는 시간을 찾은 듯했다. 또 다른 ⸀야생의 위로⸥가 나에게로 온 것이다. 꽃과 식물, 자연물에 관한 기록. ⸀야생의 위로⸥를 읽는 내내 작가와 강변과 공원과 낮은 산을 함께 걷는 듯했다. 강변과 공원과 낮은 산이 나의 것이 되었다. 나를 돌보는 방법을 이 책에서 배웠다.
세 분의 할머니에게 삶을 배우다
소설 ⸀체리토마토파이⸥를 읽었다. 소설이라는 것을 알고 읽으면서도 프랑스 외딴 시골의 사는 잔 할머니의 수필을 읽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아흔 살 잔 할머니의 일기 같은 소설. 명랑하고 유쾌한 잔 할머니의 수다를 듣는 것도 같고. 잔 할머니의 유쾌하다 못해 잔망스럽지 않을까 싶은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조금은 점잖고 외롭고 쓸쓸한 이옥남 할머니가 생각났다. 강원도 산골 마을에 살며 ⸀아흔일곱번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쓴 이옥남 할머니. 두 권의 책과 두 할머니의 삶이 자꾸 비교된다.
서울시50플러스재단에서 강의하다 만난 또 다른 할머니도 생각난다. 잔 할머니나 이옥남 할머니보다 20년은 젊은 할머니지만 학습장에 모인 어떤 학습자보다 연세가 많았다. 우리를 놀라게 한 것은 적지 않은 연세에 다녀온 어학연수 경험담이었다. 지중해에 있는 영국령 작은 섬으로 간 어학연수. 오전 공부하고 오후 해변을 산책하거나 기차 요금 정도인 항공 요금을 내고 지중해 연안의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다고 한다. 세상에, 그 연세에 그런 생각을 하고 생각했다고 그걸 실천하는 용기란! 영어 좀 하시느냐 물으니 못한다고, 그건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100세 시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 것인가. 잔 할머니, 이옥남 할머니, 그리고 서울시50플러스재단에서 만난 할머니. 그분들에게서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