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어가는 가을 고궁 미술관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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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에서 만난 운보 김기창의 아내가 아닌 화가 박래현

'박래현 삼중통역자'展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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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삼중통역자인가

지난달 24일부터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탄생 100주년 기념: 박래현, 삼중통역자'전이 진행되었다. 20세기 한국 화단을 대표하는 미술가 박래현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마련한 이 자리는 운보 김기창의 아내가 아닌, 화가 박래현을 위한 전시회다. 박래현은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유학을 통해 일본화를 공부했다. 전시장 입구에 걸린 고운 색깔의 미인도 <단장>(1943)이 그 시절 그림이다. 해방과 6.25전쟁을 거치면서 박래향의 그림은 절제된 선으로 담대하고 새로워졌다. 서구 모더니즘을 동양화풍으로 해석한 <이른 아침>(1956)과 <노점>(1956)과 같은 대작으로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받게 된다.

 

 

 

출처: 국립현대미술관 홈페이지

 

 

 

그러나 박래현은 여전히 낯설다. 박래현이라는 이름 대신 ‘청각장애를 가진 천재화가 김기창의 아내’로 우리에게 더 익숙하다. 이번 전시의 제목은 “삼중통역자”이다. 박래현 스스로 붙인 명칭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미국 여행 중 여행가이드의 영어를 한국어로 해석하고 그것을 다시 구화로 김기창에게 설명해 주어서 3중 통역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박래현이 말한 ‘삼중통역자’는 영어, 한국어, 구화(수어)의 3중 언어 통역을 의미하지만, 이번 전시에서의 ‘삼중통역’은 회화, 태피스트리, 판화라는 세 가지 매체를 통해 자신이 예술 세계를 자유롭게 표현한 것으로 의미가 확장된다.

 

 

 

운보 김기창의 아내가 아닌 화가 박래현

내년 1월 3일까지 열리는 이번 전시에서 박래현의 작품 138점이 공개됐다. 회화 72점, 판화 39점, 태피스트리 12점, 도자기 10점, 드로잉 5점이다. 전시 공간은 4개로 나뉘었다. 각 전시 공간은 1부 '현대', 2부 '생활', 3부 '추상', 4부'기술의 키워드로 구성되었다.

 

 

 

단장(출처: '박래현 삼중통역자'展)

 

 

 

1부 한국화의 ‘현대’에서는 박래현이 일본에서 배운 일본화 대신 수묵과 담채로 ‘현대 한국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소개되었다. 이 공간에는 조선미전 총독상 수상작 <단장>, 국전 대통령상 수상작 <노점>, 대한미술협회전 대통령상 수상작 <이른 아침> 등 주로 대작이 전시되어 있다.

 

 

노점(출처: '박래현 삼중통역자'展)

 

 

 

 

2부 여성과 ‘생활’에서는 <여원>, <주간여성> 등 1960~70년대 여성지에 실린 박래현의 수필들을 볼 수 있고, 김기창의 아내로 네 아이의 어머니로, 생활과 예술 사이에서 번민했던 박래현을 볼 수 있다.

 

3부 세계 여행과 ‘추상’은 작가가 1960년대 세계 여러 나라를 여행하고 낯선 나라의 문화를 체험을 통해 얻은 영감을 추상화로 표현했다. 또한 여행지에서 만난 박물관의 고대 유물들을 그린 스케치북도 볼 수 있는데, 이를 통해 박래현이 자신만의 추상화를 어떻게 구현해 나갔는지 추적한다.

 

 

 

 

태피스트리 작품(출처: '박래현 삼중통역자'展)

 

 

 

 

4부 판화와 ‘기술’에는 1967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방문을 계기로 중남미를 여행한 뒤 뉴욕에 정착한 후, 판화와 태피스트리로 자신의 표현 영역을 확장했다. 박래현은 안타깝게도 1976년 1월 간암으로 이른 나이에 타계함으로써 그의 작품은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한 채 잊혀갔다. 이번 전시는 그런 의미에서 대중에게 화가 박래현을 새롭게 각인시키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한편 유튜브로도 박래현의 작품을 전문가의 해설과 함께 감상할 수 있다. 전시를 기획한 김예진 학예연구사가 약 40분간 유튜브로 중계한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미술관에 가기 전 전문가의 해설이 곁들여진 유튜브 해설을 듣고 간다면 전시 의도와 작가, 그리고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미술관 관람은 사전 예약을 해야 한다. 코로나19로 거리두기 관람을 실시하기 때문이다.

 유튜브 바로가기 

 

 

 

 

 

 

 

가을 오후의 고궁 뜰에 서서 선구자를 생각하다

‘눈 덮인 들판을 함부로 어지러이 걷지 마라. 오늘 걷는 나의 이 발자국은 뒤따라오는 이의 이정표가 되리니’. 서산대사가 남긴 것으로 추정되는 시다. 박래현이 살았던 시대, 사람들은 박래현을 이해하지 못했다. 여자, 아내, 엄마 그리고 예술가. 박래현은 이중삼중의 고뇌가 있었다. 생전에 그녀는 본인의 이름보다는 김기창의 아내로 불렸지만, 눈밭에 그가 앞서 남긴 발자국이 있기에 그의 뒤를 따르는 이들이 길을 잃지 않고 갈 수 있게 되었다. 가을, 고궁, 박래현 삼중조화전(三中調和展)이라고 할까. 박래현 그림 한 점을 마음에 간직하고 거니는 덕수궁의 가을은 조용히 깊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