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현궁과 흥선대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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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파정에 이어 흥선대원군의 발자취를 찾아 운현궁에 왔다. 19세기 말 최고의 기술력을 동원해 건립한 고종의 사가이자 대원군의 사택으로, 종로구 운니동에 있다. 궁은 왕이 되기 전에 살던 곳이다. 고종이 왕이 되기 전에 살았고 흥선대원군이 1898년 79세로 사망할 때까지 이곳에서 생활했다. 현재는 2,000여 평 규모로 축소되었지만, 원래는 일본문화원에서 교동초등학교까지 포함할 정도로 넓었다(약 10,000평). 지금의 기상대에 해당하는 서운각 앞고개에 있다는 의미로 운현궁으로 불렸다.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있어 대원군이 궁궐에 출입하기 쉬웠다. 대원군의 둘째 아들 이명복이 12살에 왕이 된 후 새로 지었다. 대원군은 이곳에서 정치 실세로서의 영광을 경험하고 권력 상실로 유배와 감금을 당하는 굴욕을 겪었다. 재기를 도모하다 죽음을 맞이했다. 앞마당에 서 있는 오래된 느티나무가 산 증인이다. 운현궁은 흥선 대원군, 이재면, 이준용, 이우, 이청으로 5대를 이어 가다가 재정난으로 1972년 서울시에 매각됐다.
〈운현궁 정문〉
〈수직사〉
정문을 들어서면 큰 앞마당이 보인다. 원래 정문은 창덕궁 쪽에 있었으나 규모가 축소되면서 현재의 위치로 바뀌었다. 오래된 느티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수직사-노안당-노락당-이로당-유물전시실의 순서로 관람한다. 건물을 보면 주인을 알 수 있다. 예술적 기질을 지닌 대원군의 취향을 반영하여 품격있게 건축되었다. 느리게 찬찬히 보면 한옥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수직사는 궁을 지키는 군사들의 막사이다. 대원군이 권좌에 있을 때 파견된 군사와 관리가 많아 규모가 상당했다.
〈솟을 대문〉
〈노안당〉
솟을 대문을 들어가면 노안당이 있다. 대원군이 주로 기거하던 사랑채다. 현판은 추사 김정희 글씨를 집자(가져다 붙인 글자) 했다. 노인을 편하게 하는 집이라는 의미이다. 사람들과 교류하고 정책을 논의한 곳이다. 한창때는 100여 명의 식객이 머물렀다고 한다. 여기서 고종 초기 10년간의 중요한 정책 초안을 만들었다. 틈틈이 난초를 그리며 붓글씨를 쓰고 책을 읽은 장소이기도 하다. 대원군이 난초를 그리는 모형을 방에 전시했다. 석파는 서화에 능통한 예술가였다. 난초를 잘 그리는 것으로 손에 꼽혔고 추사 김정희의 제자로 붓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난초 그림은 중국인이나 일본인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1883년 임오군란으로 청나라로 잡혀갔을 때 거기서 난초 그림을 요청받았을 정도였다.
〈노락당〉
노락당은 안채로 가장 크다. 현판 글씨는 강화도조약 체결 대표인 신현의 작품이다. 노인을 즐겁게 하는 집이라는 의미이다. 여자들만의 공간으로 □구조이다. 기둥머리에 굴도리(원기둥)나 납도리(사각기둥)로 하지 않고 익공(새 날개 모양으로 뾰족하게 생긴 공포의 일종)이라는 전통적 기법을 사용했다. 복도각을 통해 이로당으로 연결된다. 여기서 1866년 고종과 민비의 가례가 행해졌고 민비가 왕비 수업을 받았다. 왕의 결혼식은 궁궐에서 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예외적이다. 외척의 세도정치를 막으려는 대원군의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이로당〉
이로당에 붙어 있는 동행각을 지나가면 한적한 뒤뜰이 나온다. 뒤뜰에는 경송비(고종이 어릴 때 오르내리며 놀던 소나무를 기리는 비석이다. 정2품의 벼슬을 내렸는데 벼락으로 소실)와 생활에 필요한 물을 긷던 우물, 무승대(대원군이 좋아하는 난을 밤에 올려놓았던 곳)가 나타난다. 뜰을 지나 이어지는 이로당은 두 노인이 사는 집이라는 뜻으로 대원군과 부대부인 여흥민씨를 가리킨다. 노락당이 고종과 민비가 가례를 올려 사용하지 못하게 되자 노안당, 노락당 보다 4년 늦게 1869년에 지어 대원군 부부의 안채로 사용했다. 앞에 운하연지(붓글씨를 쓰기 위해 먹을 갈 때 물을 떠 오던 곳)와 해시계를 올려놓던 일영대가 있다. 이로당을 지나 유물전시관에 가면 운현궁 유물과 유품을 볼 수 있다.
과거 운현궁에 속했던 건물로 양관, 육사당, 명로당이 있다. 양관은 덕성여대 평생교육원에 있다. 장손 이준용이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고종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당을 헐고 지은 서양식 건물이다. 메이지 유신 최고의 건축가 가타야마 도쿠마의 작품으로 일제가 왕족을 회유할 목적으로 지었다. 1912년 세운 최초의 프랑스식 건물로 파티와 연회 장소로 사용했다. 바로크 양식으로 피라미드 지붕 2개와 중앙의 돔 지붕이 핵심이다. 고급 목재와 조명을 사용했다. 드라마 도깨비의 촬영 장소로 이용되었다.
〈양관〉
양관 부근에 있는 육사당은 육례(혼례)와 사례(관혼상제)를 했던 곳이다. 현재는 특강이나 명사들 강의 장소로 활용된다. 대원군 후손이 재정이 어려워 1946년 이 땅을 덕성여대에 매각했다. 1869년 이로당과 함께 지은 영로당은 이로당, 노안당과 복도로 연결되었다. 운현궁 일가의 진료를 맡은 김승현에게 사례로 주었다. ‘운니동 김승현 가옥’으로 불리며 이로당 뒤편으로 보인다. 대원군은 개혁정치로 찬사를 받고 쇄국정책(통상수교 거부정책)으로 비난을 한 몸에 받는다. 세도정치 종식, 비변사 철폐와 의정부와 삼군부의 부활, 과거제도 부활, 경복궁 중건, 대전회통과 육전조례 편수, 문란했던 삼정의 시정, 호포법과 사창제 시행, 서원 철폐는 시의적절한 정책이라 평가된다. 이 일을 한 배경에 대원군의 힘든 개인적인 경험이 있었다.
1800년 정조가 갑자기 사망한 후 60여 년간은 안동 김씨, 풍양 조씨의 세도정치로 왕권은 극도로 약화하고 국력은 악화했다. 왕족은 세도정치의 방해물이 되어 생명을 부지하기 힘들었다. 대원군도 살아남기 위해 파락호 행세를 하며 시정잡배와 어울리는 시절이 오래 지속되었다. 밑바닥 생활을 통해 백성의 바람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때를 기다렸다. 이때 만난 서출 무뢰한 천하장안(천희연, 하청일, 장순규, 안필주)은 심복이 되어 대원군이 하기 힘든 일을 도맡고 민심을 파악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사실 석파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공식적인 권력은 가지지 못했다. 참모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뿐이다. 왕족은 왕이 되지 않으면 직위나 직책이 없었다. 고종 초창기에는 조 대비의 수렴청정이 행해졌고 1866년부터는 고종의 친정이 이루어졌다. 왕이 되어 직접 일을 처리하는 것과 참모로 일을 하는 것은 천양지차이다. 공식적인 기구에서 수용하지 않으면 정책을 펼 수 없다. 국내정치는 준비가 되어 있어서 바람직한 정책을 실시하는 방향으로 이끌 수 있었다. 그러나 외교에 대한 준비나 식견이 부족했다. 국내문제를 해결하기에도 벅찬 상태에서 새로운 외교정책을 수립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쇄국정책은 조선사회의 일반적인 기조라 대원군이 책임을 질 문제는 아니다. 참모 역할 한계가 10년 만인 1873년에 드러나 고종, 민비와 사이가 돌이킬 수 없는 정도로 벌어졌다. 운현궁 유폐, 1881년 대원군 서자 이재선의 역모 사건, 1882년 임오군란과 대원군의 청나라 유배, 1895년 을미사변이 연속적으로 일어나며 조선 멸망이 앞당겨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품격 있는 운현궁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한옥건축에 대한 이해를 필요하다고 느꼈다. 아는 만큼 보인다. 노안당, 노락당, 이로당에 늙은 노가 들어간다. 흥선대원군은 노년에 행복하기를 바랐지만 안타깝게도 힘든 노년을 보냈다. 권력욕이 너무 강했나 백성을 위한 개혁을 마무리 짓고 싶은 열망이 컸나.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대원군을 재평가할 시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