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람이 나눔과 베품커뮤니티 회원 8명은 58(어버이날)

금년들 어 3번째 현장탐방을 가졌다. 탐방지는 대전 현충원,

옥천 육영수여사생가, 시인 정지용문학관과 생가를 하루에

돌아보는 촘촘한 일정이었다.

 

현충원 보람이 활동을 작년부터 하다 보니 서울현충원은 친숙(親熟)한데 대전현충원은 시스템은

비슷할텐데 어떤 모습일까 항상 궁금했다. 아침 8시 정각 한명도 지체없이 전원이 만남의집에 모여

출발했다. 소풍가는 모습으로 참여의 열기가 무척이나 뜨겁다. 오늘의 홍일점 김인화 총무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미투운동을 하니 아침부터 어르신이 하나도 없이 폭소(爆笑) 만발(滿發)이다.

 

국립대전현충원은 나라가 어려웠을 때 온 몸을 바쳐서 헌신하신 분들,,, 독립유공자님, 전몰·전상·

무공수훈 유공자님, 순직·공상 유공자님 등 12만위 이상이 모셔져 있는 국가 최고의 보훈의 성지(聖地),

민족의 성역(聖域)입니다.

 

79년 공사를 시작, 85년 준공하였고 국가보훈처가 2006년 소속 이관 받아 운영하고 있다.

조직은 원장(권율정)이하 관리과(관리팀, 행정팀), 현충과(전례팀, 현충팀, 선양팀)로 서울에 관리과 시설팀이

더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똑 같다. 묘소에는 84,000여위가 안장되어 있고 위패봉안이 41,000여위로 통합

125천여위를 모시고 있다. 서울보다 묘소안장이 30,000여위 더 많으나 전체는 서울이 18만여위이다.

 

국립대전현충원은 문필봉을 조종산(祖宗山)으로 옥녀봉을 주산(主山)으로 하고 있으며, 명산인 계룡산을

태조산(太祖山)으로 삼고 있다. 택리지에 의하면 태조산인 계룡산은 삼각산, 오대산, 구월산과 더불어 우리나라

4대의 역량 있는 큰 터 중 하나라고 한다.

 

현충문을 지나 현충탑에 일동은 분향(焚香), 참배(參拜)하였다. 위패봉안실 등도 서울과 같은 모습이다.

안장은 주말포함 매일 1회 오후2시 현충관에서 한다. 봉안관이 있는데 임시 안치하는 곳이다. 홍살문은 충절(忠節)

정절(貞節)을 상징하는 문으로 현충원 전역을 성지지역과 휴게지역으로 구분하여 참배객이 경건(敬虔)한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현충광장 중앙 호국분수탑은 그 위용을 더 하고 있습니다.

 

옥천으로 고속도로를 이용하여 이동합니다. 옥천은 금강과 대청호가 만들어내는 깨끗한 물의나라 고향입니다.

육영수여사생가, 정지용문학관과 생가, 장계관광지, 장령산휴양림, 용암사, 금강유원지, 옥천선사공원, 둔주봉

(한반도 모형) 등이 있습니다.

 

향수의 시인 정지용은 1950년 북한으로 가서 우리가 학교에 다닐 적에는 이름이 없었다그러다가 1988년 해금이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지용의 아명은 지용(池龍)이었다. 이 이름은 지용의 어머니가 연못에서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태몽을 꾼 데서 비롯되었으며,

본명도 이 음을 취해 지용(芝溶)으로 지었다는 것이다.

 

1996년 문을 연 정지용문학관. 이 문학관은 정지용 문학의 실체를 보고, 느끼고, 감상하고, 체험할 수 있도록 문학 전시실과

영상실, 문학교실 등이 마련되어 있다.

문학관을 들어서면 전시실로 들어가는 입구 로비에서 밀랍인형 정지용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벤치에 앉아있는 정지용과

기념촬영을 할 수 있는 포토존 이다. 올해 31회 지용제가 5.10-13 진행되는데 제30회 지용문학상은 한국문학계 거목이

수상하는 중량감 있는 문학상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문학관 여성 전문해설사의 깊이 있는 해설은 현충원해설사에게

많은 귀감(龜鑑)이 되었습니다.

 

육영수생가는 1974년 육 여사 서거 이후 관리가 소홀해지면서 생가는 폐가의 길을 걷는다. 육여사 서거 후 네 해째.

197910.26사건으로 박 전 대통령이 서거한 이후 방치되어 오다가 1999년 유족들이 건물을 완전 철거하면서 생가는

기단과 초석과 함께 터만 남게 된다. 이후 옥천군에서 20009, 육영수여사 생가 복원계획을 세우고, 민간이 주체가 된

육영수여사 생가복원추진위원회를 발족하여 육 여사의 회고에 근거하여 2002년 생가지 지표조사를 마친 다음 2003년부터

2010년까지 375천만 원을 들여 건물 13동을 복원했다. 청주대학교에 고증 조사를 용역 의뢰했습니다.

 

항상 50여명이 상근(常勤)하는 이집은 24시간 대문이 열려 있고 오는이 누구든 밥을 주고 초등학교 때 우리는 이집으로

소풍을 같던 추억도 있습니다. 뒤주, 방앗간, 큰 텃밭, 영사기, 암실, 자동차, 전화기, 차고, 연자방아, 해우소(解憂所),

사당(祠堂), 석빙고(石氷庫) 등이 있으니 가히 99칸 고택(古宅)입니다. 안채, 사랑채, 위채, 아래채, 연당사랑, 중문채, 곳간채,

문채 등이 주 건물입니다.

 

참가자의 적극적인 참가의지와 쾌청한 날씨 등으로 당일 촘촘한 여정(旅程)을 잘 마무리 한 듯 합니다.

기대치에 비해서도 가성비가 우수하다고 덕담(德談)이 넘치니 서로가 에너지가 배가되는 하루 현장탐방으로 기록(記錄)합니다.

모두 수고 하셨습니다.

 

2018.5.10.

보람이 나눔과 베품

회장 김홍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