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의 미학
소설가 박완서(1931~2011)의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1991)’은 남편이 항암치료를 받으며 머리카락이 빠져 버리자 사별의 시간 앞에서 자식들이 사다 준 여덟 개의 모자를 씌워 주며 남편과의 추억과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낸 소설이다.
소설가 윤흥길(1942~)은 연작소설인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1977)’에서 파행적인 산업화가 초래한 사회적 모순을 비판하면서 소외와 갈등의 문제를 부각시켰다. 윤흥길의 ‘구두’는 박완서의 ‘모자’처럼 자기 정체성과 자존심의 상징이다.
▲ (좌) 티파니에서 아침을, (우) 인디아나 존스 포스터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오드리 햅번’이 커다란 블랙 카플린 모자를 쓴 귀엽고 매력적인 표정을 한 캐릭터로 각인되고, ‘인디아나 존스’에서 고고학자로서 보물 탐사와 모험을 즐기는 ‘해리슨 포드’가 중절모를 쓰고 종횡무진하는 모습에서 모자가 주는 상징과 의미를 새삼 되새기게 된다. 동화 속의 마녀, 광대, 산타클로스의 모자들 역시 저마다의 이야기로 어릴 적 추억 속 상상을 자극하는 모티프로 남아있다.
오늘날 모자는 주로 멋과 매력을 뽐내는 하이엔드 필수 아이템이지만 모자를 쓰지 않은 식당 셰프, 군인과 경찰관, 운동선수(특히 야구)를 상상할 수 없듯이 여전히 ‘머리에 착용하는 무엇’으로써 계급장, 안전 장구, 의식·의례용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모자가 상징하는 것
▲ 엘리자베스 여왕 왕관
영국 역사상 가장 오래 재위한 엘리자베스 2세(1926~2022)의 대관식은 1953년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거행되었는데 이때 썼던 왕관의 이름이 임페리얼 스테이트 크라운(Imperial State Crown)이다. 이 왕관은 1838년 빅토리아 여왕의 대관식을 위해 제작되었으며 2,868개의 다이아몬드와 17개의 사파이어, 11개의 에메랄드, 269개의 진주를 포함하여 아주 특별한 3개의 보석이 세팅되어 있고 무게는 1kg이 조금 넘는다고 한다. 이제 이 왕관(모자)의 주인공은 찰스 3세다.
한 나라의 왕이나 최고 통수권자가 권좌에 오를 때 대관식이나 즉위식이라는 표현을 쓴다. 기독교 문명이 근저에 있는 유럽은 왕, 또는 여왕이 즉위할 때 그의 머리 위에 사제가 왕관을 씌워 주는 전통이 있다. 그래서 왕관을 머리에 얹어 준다는 의미로 ‘Coronation’이라고 했고 한자로는 ‘대관식(戴冠式)’이라 했다. 반면 동양에서는 즉위식을 거행하는데, 유럽과 달리 왕이 왕관을 쓴 채로 스스로 최고의 자리인 왕좌에 앉음으로써 권위와 지배력을 과시한다. 유럽 왕국의 대관식은 화려하고 개방적인 반면,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 국가 군주들의 즉위식은 권위와 엄숙함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모자의 역사
인류가 장신구를 착용한 것은 수 만 년 전 구석기 시대부터라고 하는데 모자는 고대 그리스에서 여행자가 일광 가리개로 사용한 페타소스(Petasos)라는 크라운(모자를 썼을 때 정수리가 닿는 부분)이 낮고 챙이 넓은 모자가 시초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모자를 사용했는데, 머리를 보호하는 투구 형태 외에도 때와 장소, 연령, 신분을 나타내는 수단으로, 예를 갖추는 중요한 의관으로 조선시대 이후까지 사용되어 왔다. 당시 갓은 선비, 패랭이는 보부상의 상징이었다. 머리에 쓰는 의관의 하나인 ‘감투’ 역시 벼슬이나 직위를 속되게 이르는 말로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단순한 두건과 후드에서 시작한 모자는 중세를 거쳐 근대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크기는 점점 작아지고, 각자 기능에 맞게 다양한 형태로 디자인되어 현대인에게 필수적인 상품 아이템이 되었다.
▲ 평화시장 모자가게 모습
모자의 종류와 명칭
모자(帽子)는 햇빛 차단, 보온, 위생과 안전, 멋, 신분 표시 등의 목적으로 머리에 쓰는 물건이며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양한 특색을 가지고 있다.
모자는 형태적으로 크게 챙(brim)이 있는 모자를 ‘햇(hat)’, 챙이 없거나 눈 윗부분에만 달려 있는 모자를 ‘캡(cap)’으로 구분한다. 또 물리적 충격 흡수 등을 위해 오직 기능적으로만 착용하는 경우에는 ‘헤드기어(headgear)’라 부른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헬멧이지만, 권투 선수용 머리 보호장비, 레슬링 선수용 귀 보호장비, 심지어 의료용 보철기구도 헤드기어라 한다. 군인, 경찰관 등이 제복과 함께 착용하는 정모는 ‘햇’이고 ‘캡’이며 동시에 ‘헤드기어’이기도 하다.
현대인이 주로 쓰는 모자의 종류와 명칭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햇 중에서 ‘카플린(capeline)’은 크라운의 높이가 낮으면서 챙이 넓고 부드러운 여성스럽고 우아한 스타일의 모자로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오드리 햅번’이 쓴 모자다.
‘탑햇(top hat)’은 높고 편평한 크라운과 양옆으로 약간 휘어 올라간 좁은 브림의 남성용 모자로 정장을 입은 마술사들이 주로 쓴다.
‘페도라(fedora)’는 크라운 윗부분에 굴곡이 있는 중절모의 일종으로 남성들의 전유물이었으나 중성적이고 세련된 느낌 때문에 이제는 남녀노소에게 인기가 있다.
‘볼러(bowler)’는 동그란 그릇이 뒤집힌 모양에 위로 말려 올라간 짧은 챙이 있는 모자로 채플린 모자라고도 불린다.
‘베레모(beret)’는 역사적으로도 가장 오래된, 챙이 없고 둥근 형태의 모자로 주로 예술가들이 썼는데, 대량 생산이 쉽고 통신장비를 쓰기 편하다고 알려지면서 그린베레 등 군대로 확산됐다.
그 밖에 털모자라고 불리며 머리에 달라붙도록 쓰는 신축성 있는 니트 소재의 모자인 ‘비니(beanie)’, 위가 평평하고 얕은 원형에 브림 없는 모자로 재클린 케네디도 즐겨 썼던 ‘필 박스(pill box)’, 인도나 이슬람교도들이 머리에 둘러감는 천인 ‘터번(turban)’, 머리 전체를 덮어싸는 부드러운 모자인 ‘후드(hood)’ 등 수많은 햇(hat)이 있다.
캡(cap)은 야구모자, 운동모자 등 용도에 따라 이름을 붙이는데 기본적인 크라운과 앞 챙이 있는 머리에 꼭 맞는 모자를 말하며 누구나 하나씩은 갖고있는 필수품이다.
플랫 캡(flat cap)은 일명 일본 순사 모자, 속어로 ‘도리구찌’라고 하며 크라운이 낮고 앞쪽에만 짧게 챙이 있는 평평한 형태의 모자로 ‘헌팅캡’(일본식 영어)이라고도 한다. 베레모와 혼동되기도 하지만 베레모는 앞쪽에 챙이 없다.
뉴스보이 캡(newsboy cap)은 플랫 캡과 비슷하지만 좀 더 풍성한 느낌이 들도록 8개의 조각을 이어 붙이고 가운데에 단추를 달아 머리 윗부분을 만든 것이다.
▲ 선캡, 운동모자, 카우보이모자, 학사모
모자는 왜 쓰는가?
중년 이상의 남자들이 중절모나 플랫 캡, 운동모자를 비롯한 어떤 모자를 쓰고 있다면 탈모나 건강 이상으로 머리숱이 부족한 부분을 감추기 위한 경우가 많다. 이렇듯 모자는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패션으로도 기능하지만, 신체적 약점을 가리기 위한 수단으로도 큰 역할을 한다.
모자는 직사광과 자외선을 차단해 주고 추위로부터 보호해 준다. 모자를 쓰면 보온효과로 체온이 2~3도 올라가는가 하면 더우면 머리에서 땀이 나서 통기성을 해치고, 경우에 따라 두피에 압력을 주어 두피 건강에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모자는 과거에는 사회적 신분을 나타내고 종교 행사에서 의식(儀式)의 목적으로 특수한 도구 역할을 했지만, 이제는 운동과 등산 등을 위한 기능적인 목적과 생활 편의와 패션 등 장식적 목적으로 사용하면서 모자 그 이상의 역할을 하고 있다. 모자가 직업과 소속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개인의 아이덴티티, 인품을 연상할 만큼 일상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변화하고 발전을 거듭해 탄생한 수많은 모자 중 나에게 맞는 것은 어떤 것일까? 패션의 완성은 모자라는 말이 있다. 외출 시 옷차림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낄 때 모자로 코디네이팅하면 만족도를 크게 높일 수 있다. 모자의 종류는 쓰임새에 따라 천차만별이어서 나를 돋보이게 하는 보완재로써 적절히 활용한다면 개성 넘치는 나만의 패션스타일을 완성할 수 있지 않을까?
모자는 편안하거나, 불편하거나, 수줍거나, 거만하거나, 부끄럽거나, 외롭거나를 가리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게’ 나만의 취향과 존재감을 함축하여 드러내놓고 알려주는 ‘근거’이며 ‘기준’이다.
※추앙(推仰): 높이 받들어 우러르는 것
50+시민기자단 정종호 기자 (powerarcdong@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