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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댓 살 무렵 나는 새로 이사 간 동네 골목 한쪽 모래 더미에서 놀고 있는 내 또래 여자아이를 보았다.

 

, 이름이 뭐야?”

, 윤정이야.”

? 나도 윤정인데!”

 

윤정은 세상에 나 혼자인 줄 알았는데, 또 다른 윤정이 있다는 상황이 이상하고 신기했던 감각이 지금도 느껴진다. 성은 다르지만 이름이 같았던 동네 친구 윤정이와는 같은 유치원과 초등학교에 다니며 친하게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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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들을 읽다가 내 이름에 대한 오래된 기억이 떠올랐다. 책을 쓴 작가의 이름은 박휼륭’. 본명이 훌륭하니(?) 이름에 관한 에세이를 쓸만하다 싶다. 작가는 마포구 공덕동 푸른 약국의 약사이자, 약국 안에서 아직 독립하지 못한 책방을 경영하는 책방주인으로 유명하다.

 

그는 특별한 이름의 무게를 견디며 사는 것이 때로는 힘들기도 하지만, 이름에 걸맞게 살고자 노력할 수 있었다고 회상한다. 이름은 우리가 인식하는 것보다 더 많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박휼륭 작가는 운동할 때 차는 모래주머니처럼 이름의 무게는 앞으로 그를 더 건강하고 올바르게 살도록 도와줄 것이라고 믿는다.

 

내가 입학한 고등학교에는 김 빛내리란 이름을 가진 유명한 고3 선배가 있었다. 워낙 똑똑하고 공부를 잘해 이름값을 한다’ ‘이름처럼 크게 될 사람이란 선생님의 칭찬이 자자했다. 그 뒤로 신문기사에서 유명한 생명과학자가 된 선배의 이름을 종종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노벨상 후보로도 거론되고 있으니 선배 또한 이름의 무게를 잘 견뎌낸 듯하다.

 

그에 비하면 내 이름은 지극히 평범하다. 다만 성()씨가 이다 보니, ‘씨보다 겸손하다는 농담을 듣곤 한다. 여러 명이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전윤정입니다하면 저는 윤정입니다로 알아듣고 성은 이요, 이름이 인줄 아는 사람도 많다.

 

성을 뺀 이름도 그리 흔하지 않아서 같은 반에 동명이인이 있거나 만나본 적도 거의 없다. 그런데 얼마 전 만난 분이 내 이름과 같았는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머니의 이름도 서로 같아 깜짝 놀랐다. 하지만 이름에 쓰는 한자는 서로 달랐다.

 

내 이름은 귀막이 구슬 윤()에 곧을 정()을 쓴다. 흔히 이름에는 진실로 윤()을 쓰지만, 나는 옥() 변이 붙은 윤()이다. ‘옥구슬 윤으로 알고 있었는데, 개정된 한자 사전을 찾아보니 귀막이 구슬 윤으로 나왔다.

 

사극에서 보면 조선 시대 왕이 중요한 의례가 있을 때 앞뒤로 구슬이 주렁주렁 달린 사각형 면류관을 머리에 쓴다. 그 면류관 안쪽에 귀밑으로 길게 늘어뜨린 줄이 있다. 그 끝에 옥구슬이 달려있는데 그것이 귀막이 구슬이다. 간신배들의 아첨하는 소리로부터 왕의 귀를 보호한다는 의미로 옥구슬을 달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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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임금님뿐일까. 나 같은 필부(匹婦)도 감언이설을 피할 수 있는 귀막이 구슬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나이를 먹으니 어려 보인다, 젊어 보인다는 말에 특히 마음이 약해지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알레르기 때문에 피부과에 갔다가 프락셀 레이저 등 이런저런 피부 시술을 권유받았다. “목소리가 이렇게 젊고 예쁘신데, 피부 결만 정리하셔도 전체적으로 훨씬 어려 보이실 거예요.” 설탕 발린 달콤한 말인 줄 알면서도 꼴깍 넘어갈 뻔했다.

 

주름이 펴진다는 화장품, 먹기만 하면 몸이 좋아진다는 영양제, 내 나이 또래지만 젊어 보이는 연예인이 걸쳤다는 옷과 액세서리……. 온갖 광고로부터 나도 귀막이 구슬을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50년간 불려왔지만, 지금에서야 알게 된 내 이름 속 귀한 뜻을 잊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철학자 마틴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다. 언어가 사물에 고유한 존재를 부여하는 역할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름 역시 존재의 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개 이름은 부모가 지어주지만, 수많은 사람이 불러주며 세월이 쌓인 내 이름 안에는 라는 고유한 정체성과 존재감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궁금해진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50+에세이작가단 전윤정(2unne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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