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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파른 관음사탐방로를 다 오르자 백록담이 펼쳐졌다. 흰 구름이 푸른 백록담 곁에서 서서히 다가갔다. 구름이 흩어지며 푸른빛을 엷은 흰 막으로 가리는 신비한 광경에 넋을 빼앗겼다. 그 바람에 백록담 앞에 깔린 나무 데크에 있는 낮은 턱을 못 보고 발을 헛디뎠다. 순간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목이 긴 등산화 속에서 왼쪽 발목이 꺾이며 180도로 돌아가는 게 느껴졌다. 눈 한 번 깜박이는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사고는 언제나 그렇듯 불쑥 들이닥친다. 바로 발목이 부어올랐고, 바닥에 발을 딛자 통증이 몰려왔다. 나는 해발 1,900m가 넘는 곳에 있었다.

 

함께 간 친구들은 고대했던 백록담의 경이를 감상하는 시간을 포기했다. 정상석 앞에서 인증 사진 찍기도 포기했다. 나 때문이었다. 친구들은 내가 내려갈 방법을 찾느라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백록담을 등지고 머리를 모았다. 백록담 관리사무소에 근무하는 직원이 진통 소염제를 뿌리고 압박 붕대를 감아 응급처치를 해 주었다. 그는 2km 떨어진 진달래대피소로 330분까지 내려가면 그곳에 근무하는 직원이 도와줄 거라고 말했다. 악몽을 꾸고 있다고 믿고 싶었으나 내가 할 일은 따로 있었다. 현실을 부정하는 대신에 내 안에서 한꺼번에 솟아오르는 온갖 부정적 감정을 누르는 것이었다. 소멸하고 있는 긍정성을 쥐어짜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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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대피소가 있는 성판악탐방로에는 비정형의 현무암이 바닥을 덮고 있었다. 화산의 흔적을 드러내는 너덜길이었다. 발목을 움직이지 않고 디디면 통증을 그럭저럭 견딜 수 있었지만, 등산화 바닥이 제멋대로 생긴 울퉁불퉁한 돌에 닿으면 찌릿한 통증이 무릎까지 올라왔다. 발목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 겁도 났고, 내가 친구들의 소중한 시간을 망쳤다고 생각하면 증발하고 싶었다. 하지만 친구들의 도움 없이 혼자 너덜길을 2km나 내려가는 건 불가능했다.

 

우리 일행을 옆에서 지켜보던 두 사람이 상황을 알리기 위해 진달래대피소로 먼저 내려갔다. 등산할 때는 자신의 배낭 무게도 힘에 부친 법인데 한 친구가 내 배낭을 한쪽 어깨에 메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염치없지만 내 배낭을 친구의 어깨에 맡겼다. 통증 때문에 발걸음을 옮기는 속도가 더뎠다. 옆에서 지켜보던 한 친구가 등을 내밀며 업히라고 했다. 처음에는 망설였지만, 내 거절이 모두를 더 초조하게 할 터라 덜컥 업혔다. 이런 상황에서 미안하고, 고맙다는 진부한 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말은 때로는 마음을 하나도 담지 못할 정도로 무기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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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친구는 내게 등을 내준 친구의 배낭을 넘겨받았다. 나는 친구의 등에 업혔다가 내리기를 반복했고, 또 한 친구는 먼저 내려가서 앞으로 걸을 길의 상태를 자세히 알려주었다. 고생이 얼마나 계속될지 알기만 해도 견딜 힘을 얻는다. 이 알림은 뒤따라 내려가는 우리에게 순간적으로 힘을 치솟게 하는 스테로이드제였다. 그 순간 친구들의 고통이 내 고통보다 훨씬 더 컸을 것이다. 나는 내 발끝에만 집중하면 됐지만, 친구들은 자신의 발끝을 보며 내 걸음까지 챙겨야 했다. 모두 2인분의 짐을 기꺼이 떠맡았다. 먼저 진달래대피소로 간 사람들은 우리가 언제 도착할지 몰라 마음 죄며 기다림의 시간을 보냈다.

 

친구들의 체계적(?) 활약으로 시간 내에 진달래대피소까지 무사히 내려갔다. 모두에게 빚을 져서 어쩔 줄 모르는 내게 한 친구가 웃으며 말했다. “입 닦으면 안 돼요. 밥 사야 해요. 삼겹살이면 돼요그의 장난기 어린 말에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당연하죠! (밥을) 한 번만 사나요, 두 번, 세 번 사야죠.” 한 친구는 한라산 정상에 올랐다는 사실보다 함께 올라서 의미 있는 백록담이라는 말을 남겼다.

 

힘들고 고생스러운 상황은 사람에게 으로 다가가는 뜻밖의 감정을 선사하곤 한다. 발목 인대는 끊어졌지만,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사람들에게로 이어졌다.

 

50+에세이작가단 김남금(nemones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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