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야 보이는 것이 있다. 제주도 오름이 그렇다. 제주도에는 360개가 넘는 오름이 있다. 오름을 알기 전에는 보고도 몰랐다. 제주 4.3 사건을 다루는 영화 『지슬』에서 눈 덮인 용눈이오름이 배경으로 나온다. 순박한 청춘들이 서로 다른, 실체 없는 허상인 이념 때문에 눈부신 하얀 아름다운 능선에서 이슬로 사라지는 장면을 수채화처럼 담았다. 영화를 본 후 용눈이오름에 갔다가 오름 능선만이 간직한 곡선의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 후 ‘오름 앓이’를 하고 있다.
오름은 제주 방언으로 화산 또는 봉우리를 일컫는 데 영주산은 무슨 까닭인지 산으로 불린다. 아무튼 영주산은 성읍민속마을에서 3km 남짓 떨어진 곳에 있다. 성읍민속마을을 지나간 적 있다면 영주산을 본 적 있을 것이다. 그 주변에서 조금 높게 솟은 봉우리가 바로 영주산이다. 별러서 영주산에 갔던 날, 안개를 품은 가느다란 빗줄기가 흩뿌렸다. 추적거리는 날씨 덕분에 친구들과 내가 영주산을 접수(!)한 줄 알았다. 입구 계단을 오른 지 얼마 안 돼 우리보다 먼저 영주산을 접수한 소 떼를 만났다. 가까이서 본 소는 동공이 확장될 정도로 우람했다. 무리 지은 소들은 큰 눈망울을 이리저리 굴리며 풀을 씹다가 우리와 눈이 마주쳤다. 예의 바른 우리는 거리를 두고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 음~메. 음~메! 소들과 인사했다고 말하지만, 실은 불청객으로 난장(?)을 피운 후 ‘천국의 계단’이라고 불리는 계단을 올라갔다. 곳곳에 소의 건강한 흔적이 있었다. 발밑은 지뢰밭으로 자칫 한눈팔면 옹근 소똥에 빠지기 쉬웠다.
계단을 따라 피어있는 색색의 산수국이 안개비에 온전히 얼굴을 내주었다. 산수국 기세에 질세라 우리는 알록달록한 우산으로 무장했지만, 이따금 부는 바람에 실린 빗줄기에 얼굴과 머리칼을 내주었다. 정상에 올라 앞을 내려다보았다. 흐릿했다.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는 것처럼.
내려갈 때는 올라왔던 길과 반대쪽으로 갔다. 양옆에 울타리가 세워져 있고 가운데 야자 매트가 깔린 좁은 산책로가 있었다. 조금 내려가자 소 두 마리가 길을 꽉 채우고 있었다. 순식간에 소와 대치 상황이 벌어졌다. 왔던 길로 돌아가기에는 우리는 너무 멀리 왔다. 타들어 가는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들은 그 자리에 화석처럼 버텼다. 한 친구가 즉석에서 소몰이 재능을 계발하느라 열심이었다. 소리 내어 몰면 소들은 조금 앞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곧 멈추었다. 이런 식으로 한참 동안 소들과 기 싸움했다. 어느 지점에 이르자 소들은 그마저도 더는 내려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난감했다. 얘들이 우리를 이겨 먹으려고 그러나. 윽박도 질러보고, 애원도 해 보았다. 우리 내려가야 해. 비켜줄래, 응? 소들은 꿈쩍 않고 끔벅끔벅 우리를 바라보는 것으로 응답했다.
이렇게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다가 소 한 마리가 갑자기 산책로 옆에 세워진 울타리를 넘어서 왔던 길로 올라갔다. 그제야 이 길은 소들이 다니는 길이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미쳤다. 이번에는 소를 몰아내는 대신 우리가 길을 내주었다. 멀찌감치 서서 소가 지나가길 기다렸다. 오 분쯤 후에 두 마리 모두 내려왔던 길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소가 다니지 않는 길로 몰아댔던 게 아닐까. 얼마나 무서웠을까. 난데없이 나타나서 길이 아닌 곳으로 가라고 깽판 부리는 사람들이라니.
우리 갈 길에만 정신이 팔려 소의 마음을 읽지 못했다. 너는 내가 아니다. 같은 것도 서로 다른 생각으로 바라보곤 한다. 소통은 서로 다른 마음을 읽는 것이고, 서로 다른 마음을 주고받는 것이다. 하지만 종종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은 뒷전이고, 내 마음대로 추측하고 행동한다. 상대가 예상대로 반응하지 않으면 탐정이 되어 파헤치고 왜곡한다. 심증만 가지고 단서를 찾아서 제멋대로 해석해 버리고는 상대를 몰아세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50+에세이작가단 김남금(nemoness@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