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꽃잎 같은 안녕, 하이얀 우리 봄날의 클라이맥스(climax) 아, 얼마나 기쁜 일이야~♫”
라일락 향기가 묻어나올 것만 같은 가수의 노래다. 어느새 서른 살 문전에 선 그녀는, 지난 20대 시절을 아름답게 떠나보내고 싶은 마음으로 이 노랠 부른다고 한다. 보통은 ‘20대’란 영원히 붙잡고 싶은 시간일 텐데, 그 시절과 이별할 줄 아는 청춘이라니? 역시, 내가 아주 좋아하는 아티스트답다. 그런 그녀가 최근에 ‘130억’짜리 아파트를 샀다 해서 화제가 되었다. 나는 백삼십억이라는 액수에 한 번, 전액 현금으로 지불했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랐다. 물론 그 아파트 소재지가 청담동이란 사실에 빛의 속도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청담동이라면 그럴 만도 하겠다.
청담동 골목을 걷다
디○, 프○○, 루이비○ 등 해외 럭셔리 브랜드의 플래그십 가게들이 즐비한 명품거리. 한강을 따라 줄지어 선 고급 아파트들. 늘 대기자 넘치는 식당들. 셀럽들의 아지트. 그래서 평범한 중년이 기웃거리기엔 조금 불편하고 부담스러운 곳이 바로 청담동이다.
결혼 후 강북에 정착하면서 잊어버렸던 내 유년의 고향 청담동을 다시 찾아간 것은 순전히 큰아들 덕분이다. 녀석은 ‘더는 혼전순결을 지킬 수 없다’라는 이유로 스물여섯의 나이에 결혼을 선택했다. 결혼식 전날, 예비부부는 웨딩드레스를 가봉하러 청담동 어느 웨딩숍으로 향했다. 나는 어쩌다 동행자가 되었고, 28년 만에 또 하나의 고향과 마주하게 되었다. 아들 커플이 그들의 일에 몰두하는 동안, 나는 복잡한 골목으로 들어섰다. 멋진 카페에서 더 멋진 차림새의 젊은이들을 보니 왠지 모를 위화감이 들었다. 그리 유쾌하지 못한 기분과는 달리, 내 발걸음은 유려하게 골목들 사이를 누비고 다녔다. 한때 유명세를 떨쳤던 장OO라는 사기꾼의 저택이 높은 빌딩 위로 오버랩됐다. 세련된 건물들 위로 상아네, 경희 언니네 집도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아! 그래 저기에는 민들레 유치원이 있었어.
혜화동에서 여덟 살 초등학생의 인생을 막 시작하려는 그때, 우리 가족은 이사해야 했다. 목적지는 ‘영동 7단지’. ‘영등포의 동쪽’이라서 영동이라 불린 그 동네, 바로 청담동이었다. 엄마는 들떠있었다. 녹색 지붕의 이층 양옥집에다 용변도 앉아서 봐야 한다고 했다. 나 역시, 동화책 속 궁전 같은 집을 상상하며 이사 날짜만 손꼽아 기다렸다. 막상 영동 7단지로 들어서자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우리 집은 공사판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한참 주택단지 개발에 정신이 없는 곳이었다. 그날의 막막함이란…
다행스럽게도 시간이 지나면서 한 집, 두 집 세워지고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골목에 출현했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술래잡기’, ‘사방치기’ 등 골목에서 할 수 있는 모든 놀이를 하며 새로운 우정을 쌓았다. 해를 넘기자 집들이 더 들어서고 골목도 깨끗하게 포장되면서 우리의 활동무대는 넓어졌다. 본래 주민들이 사는 8단지로 몰려갔다. 그 동네 입구엔 우물이 있었다.
옛 우물가에서
난생처음 본 우물에 우리는 모두 흥분했다. 우물가 기둥엔 도르래가 달려있었다. 난 냅다 도르래에 달린 바가지를 우물 안에 던져 넣었다. 철썩 소릴 내며 물에 닿았다. 새로운 놀이에 신이 났다. 물을 길어 올리려 했지만, 요령이 없어 계속 허탕을 쳤다. 몇 번을 시도한 끝에 곧 능숙하게 물을 퍼 올릴 수 있었다. 아직 쌀쌀한 봄날이었지만 우리는 춥거나 말거나 물놀이에 열중했다. 그때였다. 난데없는 욕지거리가 날아들었다. (다음 편에 계속)
⁺신스팝 : 신디사이저를 중심으로 한 전자음악의 한 갈래로 친숙한 멜로디를 앞세워 대중적인 음악을 추구한다
50+에세이작가단 정호정(jhongj2@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