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여행과 길의 미학
-
어느 날 독서 모임을 함께하는 친구가 보내준 문자에 이런 글이 있다.
“인생의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다. 냉철한 머리보다 따듯한 가슴이 더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하나의 가장 먼 여행은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이다. 발은 실천이고 현장이며 숲이기 때문이다” -출처: 처음처럼, 신영복-
나의 소소한 여행의 출발은 산책이다. 매일 걷는 길이지만 또 매일 다르다. 같은 주변 풍경이지만 어느 날은 볕이 가득하며 어느 날은 바람이 불고 또 어느 날은 비가 내린다. 어느 날은 꽃으로 가득하고 어느날은 단풍으로 화려하다.
어느 여행 작가는 이렇게 얘기한다. 내가 가는 나의 집은 여행길이 아니지만 벗의 집으로 가는 길은 여행이 될 수 있다고. 독일의 철학자 칸트의 일화에는 그가 걸었던 시각이 매우 규칙적이어서, 지역의 주민들은 그가 어느 지점에 나타난 것을 보고 몇 시인지를 알았다는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다. 그의 규칙적인 일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나는 그것을 ‘칸트의 소소한 여행’이라고 부른다. 그는 똑같은 길을 걸었지만 매일 다른 일상의 여행을 즐기고 있었을 것이다. 이건 순전히 나의 해석이지만 제법 그럴듯하다. 코로나로 인하여 먼 여행과 긴 여행을 꿈꾸는 많은 이들이 답답함을 토로한다. 랜선 여행으로는 만족을 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오죽하면 무착륙 국제 관광 여행이란 상품이 나왔을까. 그렇지만 멀리 떠나는 것만이 여행이 아니다.
자신의 일상을 작은 여행으로 만드는 이들이 있다. 마치 먼 나라의 여행 중 그 도시의 뒷골목을 걷는 재미를 아는 사람들은 남들이 다 찾는 여행지의 유명한 관광지를 찾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사진 촬영은 여행의 큰 재미중 하나이다. 여행 후 남는 건 사진 뿐 이라고 열심히 셔터를 눌러 댄다.
한양도성 장수마을 벽화
예전 우리 세대의 결혼 사진첩을 보면 똑 같은 연출의 똑같은 배경의 사진들을 만날 수 있다. 이 사진들의 프로듀서는 그 당시 여행지의 택시 기사다. 지금은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아직도 비슷한 유형을 많이 만난다. 자신의 여행이 아닌 남에게 보여 주는 여행, 그곳에 갔다 왔다는 인증샷의 여행인거다. 그러나 조금 일탈을 하면 여행의 결과는 달라진다. 내가 좋아하는 소소한 여행의 시작점이다. 약간의 벗어남이 전혀 다른 인상의 여행 기록을 남긴다. 호기심이다. 내가 걷던 평소의 길에서 잠시 우나 좌의 방향으로 눈을 돌려보면 전혀 다른 모습의 길을 발견할 수 있다. 그 길을 걸어보자. 그 곳에는 우물 있는 마당 넓은 집이 있고 파란 색의 대문이 있고 향기 좋은 패랭이 꽃이 피어 있다. 그 길의 담 넘어로는 듣지 못했던 피아노 소리가 들려오고 보지 못했던 예쁜 아이가 환하게 미소를 짓는다. 할머니들이 모여 정다운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을 만난다. 잠시의 방향 바꾸기로 세상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이 대목서 내가 좋아하는 노래 이야기 하나 안할 수가 없다. 윤종신이란 가수가 부른 노래 중 동네 한바퀴란 곡이 있다. 국문학을 전공한 친구이기도 하지만 가사가 와우다! 보통을 넘는다. 평범한 일상의 이야기들을 어떻게 노래에 녹여 내는지. 한 대목 소개한다. “계절의 냄새가 열린 창을 타고서 날 좁은 방에서 밀어냈어. 오랜만에 걷고 있는 우리 동네 이제 보니 추억 투성이(중략) 동네 한 바퀴만 걷다 올게요.“ 또 한 곡 소개한다. 이번에는 김동률이란 가수의 출발이란 노래다. 이 곡도 가사, 노래가 마음으로 훅 들어온다. 이 곡도 한 대목 적어본다. “작은 물병하나, 먼지 낀 카메라, 때 묻은 지도 가방 안에 넣고서 언덕을 넘어 숲길을 헤치고 가벼운 발걸음 닿는 대로 끝없이 이어진 길을 천천히 걸어가네” 이쯤 되면 걷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나는 강의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가끔 요청에 의해 작은 소그룹의 강의를 하는 경우 이 두 노래 중 그 날 컨텐츠에 맞는 한 곡을 인트로로 소개한다. “인생은 길이고 여행이다” 란 말을 시작으로 두 곡 중 한 곡을 선택하는 거지.
오늘 필자는 소소한 여행과 길의 미학을 이야기 했다. 그동안 내가 걸은 길은, 아니 우리 50+세대가 걸어온 길은 정형화되고 그렇게 해야만 하는 당위의 길이었다. 좀 먼 여행이고 계획된 여행이었다. 반드시 무엇에 의하여 필요하고 무엇을 얻기 위한 길이었다. 길의 목표가 반드시 있어야 하고 그 길에서 벗어나면 안되는 행보였다. 그런데 이제는 말이지. 꼭 목표를 갖지 말고 걸어보자. 가는 목적지가 정해져 있다 해도 잠시 다른 길로 걸어도 보자. 그곳에는 내가 보지 않은 장면이 있고 내가 보고 싶었던 광경이 나타나기도 한다. 똑바로 걸으면 보지 못했던 길을 뒷골목으로 향해 가다 만나보자. 이제 우리 나이가 그쯤은 되었다. 다시 처음처럼, 가장 먼 여행인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을 소소한 여행으로 걸어 보는 거다.
50+시민기자단 안종익 기자 (try37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