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징크스가 있다. 몸이 몹시도 힘든 날,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고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은 날, 내처 잠이나 자고 싶은 날, 그런 날에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사람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을 받는 것이다. 오늘이 그랬다. 먹고사니즘에 치여 심신이 극도로 지쳐있던 차였다. 그래도 7년 만에 만나자는 친구의 말을 어떻게 뿌리칠 수 있겠는가.
친구는 생각보다 더 나이 들어 있었다. 세월의 무게만큼 늘어난 주름을 보며 그동안 어떤 시간을 건너온 것일까, 뒤늦게 안부가 궁금해졌다. 어색함도 잠시, 우리는 곧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장거리 시간여행을 떠났다.
얼마나 지났을까, 친구가 가방에서 봉투 몇 개를 꺼냈다. 익숙한 필체, 그것은 과거의 내가 과거의 그에게 보낸 편지였다. 편지를 썼던 사실도 받았던 기억도 까마득히 잊고 살았지만 꽃다운 스무 살 언저리 서로 다른 대학을 다니던 우리는 한동안 편지를 주고받았었다.
편지 안에는 당연하게도 설익은 스무 살의 우리가, 우리가 살았던 세상이 있었다. 세상의 온갖 고민을 짊어지고 어떻게 살아야 하나, 고뇌하는 청춘 말이다. 감정의 과잉과 젊은 날의 치기가 드러났고 잔뜩 멋 부린 문장은 보기에 민망했지만 풋풋했다. 생의 의지가, 진심이 읽혔다. 그리고 친구에게 한없이 다정했다.
고맙게도 친구는 편지를 간직하고 있는데, 아쉽게도 내겐 보관하고 있는 편지가 없다. 언젠가 나는 날 온통 부정했고 편지니 일기니 심지어 사진까지 태워버렸었다. 그러면 과거의 내가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잊히기라도 할 것처럼,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것처럼.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따로일 수 없음을, 오늘은 현전하는 과거임을 그때라고 몰랐을까, 그저 한순간의 객기 같은 것이었을 게다.
그때 나는 자의식과잉의 미성숙한 어린애와 같았다. 내 안에 숨겨놓은 저열한 욕망과 천박한 속물근성이 부끄러웠고 아닌 척 가식적인 자신이 역겨웠다. 언젠가는 그 정도가 지독하게 심해져 스스로 상처 내고 단죄했다. 추억에서조차 나를 도려낸 채 기억하는 몹쓸 버릇까지 생겼었다. 내 욕망의 뿌리를 이해하고 다독이고 경계하면서 조금씩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할 뿐이라는 걸 그때는 몰랐다. 그런 내게 친구가 가져온 편지는, 그 속에는 내가 생각했던 나와 사뭇 다른 모습의 내가 있었다.
젊은 날의 흔적들을, 그때의 기록들을 태우지 않고 남겨뒀더라면, 그래서 한참 시간이 지난 어느 날에 다시 꺼내봤더라면 어땠을까? 과거로부터 도망치는 대신 누구나 거치는 통과의례임을 자각하고 조금은 담담할 수 있었을까? 잡을 수 없는 것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내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었을까? 그래서 자신을 조금 더 사랑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었을까?
친구는, 그리고 친구가 가져온 편지는 기대하지 못한 선물이었다. 한때 친구를 위로했을 그 편지가 세월을 돌고 돌아 묘하게도 내게 위안을 주었다. 아, 삶이란 얼마나 기적 같은지. 일상 곳곳에 아무렇지도 않게 생의 환희 숨겨두고 이렇듯 예기치 않은 순간 불쑥 내미는, 이토록이나 놀랍고 찬란한 삶이라니. 친구에게 편지를 돌려주며 여러 감정이 교차했다.
친구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시야가 흐렸던 이유를 나는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이전보다 조금은 더 자신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나는, 내가 아는 나보다 괜찮은 사람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왜 아니랴, 당신 또한 그러하지 않겠는가.
- 친구의 부음을 들었다. 할 수 있을 때 더 자주 연락할 걸 그랬다. 무소식이 희소식이 아님을 알면서도 마음 쓰는 일에 왜 이리 인색할까. 후회는 언제나 너무 늦고 아프다. 친구와 내가 7년 만에 만났던 날 이 글을 썼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시간이다. 그를 애도할 시간, 그가 떠났음을 받아들일 시간.
50+에세이작가단 우윤정(abaxial@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