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목차를 보면 우리들의 관심이 가는 분야가 다양하게 포진되어 있다.

짜임새가 있는 구성이다. 그 중에서 착한 소비, 그리고 인공지능 AI에 대하여 나는 더욱 시선이 끌린다.

 

 

경제가 어려워질수록 착한 소비가 늘어난다고 하는데, 사람들은 왜 착한 것에 돈을 쓸까요?

 

사람들은 의외의 질문을 받으면 당황하게 된다. 이런 질문을 받으면 첫마디는 “글쎄”가 대부분일 것이다.

이처럼 사람을 당황하게 하면서 호기심을 자극한다면 일단은 책으로서는 성공한 것이다. 소설책을 읽듯이 그 내용에 빠져 들 것이다. 결국에는 알맹이가 없는 이야기가 될지라도 말이다.

 

독자도 궁금하다.

 

필자는 경제가 나쁠 때 착한 소비의 패턴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그래프가 있다고 한다. 전 세계의 공정무역의 매출액은 지난 2004년 이래 꾸준히 증가해 왔는데 특히 2008년 이후 금융위기의 여파로 세계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로 돌아섰을 때 놀랍게도 공정무역의 매출액은 오히려 증가 추세를 보였다.

우리나라도 공정무역 매출액은 2008년에서 2009년까지 1년 사이 무려 210퍼센트나 증가했다. 경제가 안 좋을 때 타인을 생각하는 착한소비가 오히려 늘어나는 이상한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왜일까?

 

착한 소비가 오늘날 세계적인 트랜드 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것이 반짝 유행에 그치지는 않을지 , 과연 언제까지 지속될지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동안 경제학에서는 합리적인 선택을 하는 것, 즉 자신에게 가장 이익이 되는 쪽을 선택하는 것이 ‘호모 에쿠노미쿠스’인 인간의 본성이라 여겨 왔다.

 

경제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애덤 스미스는 역시 1776년 발간한 「국부론」에서 우리가 저녁식사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정육점 주인이나 양조업자 , 제빵업자의 자비심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자기 이익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경제활동의 바탕에는 인간의 이기심이 자리 잡고 있으며 우리 사회의 발전도 이기심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고 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착한 소비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행동이다.

 

애덤 스미스의 다른 저서 「도덕 감정론」에서 인간에게 이기적인 본성이 있지만 그와 반대로 상반된 속성도 존재한다.

지금까지는 최소 비용으로 최대 만족을 얻으려 하고 이기심을 가진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여겼지만 , 인간은 때로 이익을 포기하더라도 공정함을 기준으로 행동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지금 세계 곳곳에서 나타나는 착한소비 움직임은 그동안의 이기적 선택에 대한 반성과 함께 이타심이라는 인간 본성이 발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제가 어려울수록 착한 소비가 더욱 확산되는 이유 역시 여기서 찾을 수 있다 라고 한다.

그런데 착한 소비를 인간이 이익을 포기하는 공정함을 기준으로만 설명한 것인데 뭔가 부족하다. 나는 착한 소비는 기업하는 사람들이 불경기를 타파하기 위한 새로운 활로 개척이며, 새로운 투자 방법이라고 본다.

너무 세속적인 판단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전 세계가 불황이니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현재 경기가 안 좋을 때에는 그 경제 기반인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러면 이들이 경제의 선순환 기능을 할 것이다.

자금이 돌아야 생산을 할 수 있고 임금문제 등등 기업에 엮여있는 문제들이 해결된다. 지금 당장은 기부 혹은 착한 소비의 형태지만 이것이 결국은 투자이며 기업의 홍보이고 그래서 기업을 믿고 찾는 기업으로 단시간에 소비자에게 좋은 인식을 심어주는 효과를 내는 것이다.

이러한 뒷배경이 있는데 당장에 이익을 나눈다고 착한소비로 규정하는 것은 다른 의도를 가진 기업들의 등장을 간과하는 것이다.

 

연말에 정치인이 양로원을 찾아 쌀을 전달하며 사진을 열심히 찍는 것, 육군 장병 앞에서 라면 박스 놓고 사진 찍는 것을 보고 이들이 착한 소비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까. 절반은 맞을 수 있다.

양로원입장에서는 고맙다. 장병들도 고맙게 생각한다. 그러나 그 행위를 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홍보하기 위한 행동일 것이라는 것을 간과하지 말라는 것이다.

 

나는 경제를 살려서 토양을 비옥하게 만들어 그 속에서 나의 것을 보존 받으려는 인간의 심리도 들어있다고 본다. 이는 단순히 공정의 기준이 아닌, 이타심의 발로가 아닌, 자신의 자산 가치를 보존하려는 지극히 경제적 마인드에서 나온 것이라고 본다. 윤리적 관점으로만 보는 것은 순진한 기대 심리가 아닐까.

 

어차피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다른 이의 가치가 보호되어야 가능하다면 말이다.

 

 

인공지능과 함께할 미래

 

인공지능은 사람처럼 스스로 생각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말한다.

인공지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갑자기 똑똑해진 것은 불과 최근 몇 년사이 이다. 빅 테이터와 딥 러닝 이라는 두 날개 덕분이다.

 

빅 데이터를 분석해 인간의 생각과 행동 패턴을 예상하는 전문가도 미디어에 속속 등장한다.

빅테이터는 말 그대로 방대한 규모의 데이터이다. 디지털 세상이 되면서 매시간 매초 어마어마한 양의 데이터가 다양하게 쌓이고 있다. 인터넷과 모바일기기 사용이 보편화되면서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이 데이터화되고 있다.

한 사람이 하루를 어떻게 보내는지 알려면 인터넷 검색 기록, SNS, 이메일, CCTV 등 그가 남긴 데이터만 살펴봐도 충분하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양과 종류의 데이터가 있더라도 이를 수집 ,가공 ,분석화 하는 처리 능력이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처리 속도도 느리면 그 또한 무용지물이다.

딥 러닝 기술이 이를 해결한다. 딥 러닝은 인간의 뇌가 사물을 인식하는 과정을 모방하는 신기술이다. 말하자면 뇌 속에 뉴런 네트워크와 같다,.

 

 

그런데 그 데이터를 인공지능이 스스로 분석하기 시작한다면 어떨까?

 

상상만 해도 모골이 송연하다.

어쩌면 인간은 편해지기 위해서 만든 것에 의하여 지배당할 날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는 지도 모른다.

미래에 벌어지는 일들을 미래 사람들이 영화감독의 창작이라는 이름하에 만들어지는 영화를 통하여 우리 인류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지는 아닌 걸까.

개인적으로는 같은 인간을 지배하기 좋아하는 다른 인간에 의하여 탐욕스러운 인공지능이 출현 할 것이라고 본다. 인간을 지배하는 인공지능은 결국 지배욕이 강한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 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자리 문제는 어떠한가

 

2030년까지 일자리 20억 개가 사라진다.

미국의 산업용 로봇의 수는 지난 2000년 이후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

2000년 9만대에서 2014년 25만 대로 로봇이 3배 가까이 많아졌다.

그와 반대로 노동자의 숫자는 반비례하여 줄어들고 있다.

 

이는 비단 미국만의 일이 아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노동력을 로봇으로 대체하고 있는 나라는 어디일까? 놀랍게도 대한민국이다.

한국은 근로자 1만명당 약 400대의 로봇을 사용하고 있다.

이는 로봇강국인 일본, 제조업 강국인 독일, 세계경제대국인 미국보다도 더 높은 수치이다.

그리고 앞으로 한국은 로봇을 사용해 인건비를 가장 많이 줄이는 나라가 될 것이다.

실제로 미국에선 변호사들 가운데 상당수가 판례를 검색하고 정리하던 직원들을 해고했다.

퀴즈쇼에서 인간을 이겼던 왓슨이 판례를 찾는 속도가 첫해 근무하는 변호사들보다 빠르다. 도서관의 사서도 빠르게 사라지는 직업 가운데 하나이다.

엑스레이를 판독해 폐암인지 알아내는 능력도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월등하다.

 

<AP 통신> <LA 타임즈> 등의 유수의 언론들은 인공지능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단신기사를 작성하고 있는데 초당, 9.5개의 기사를 생산할 수 있다.

심지어 똑같은 내용의 스포츠기사를 각 펜의 시각에 따라 맞춤형으로 작성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한다.

현대인은 이미 인터넷이나 휴대전화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다.

문명의 혜택을 포기할 수 없다면 좋든 싫든 인공지능 시대를 살아가야 한다.

 

그런데 인공지능에는 마음이 없다는 것이 위안이 될 수 있을 까

인공지능은 단지 프로그램에 입력된 일만 수행하면서 인간의 흉내를 낼 뿐이다.

이것이 인공지능의 한계이다. 그러나 스티브 호킹의 말처럼 기술이 더 발달한 미래에 인공지능이 사람과 다른 판단을 내놓는다면 그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하는 문제는 남는다.

 

 

인공지능과 조화를 이루는 미래, 인간의 선한 의지에 달렸다.

 

일본에는 치매노인을 위한 로봇 파블로가 있는데 다양한 패턴으로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맞방구를 쳐주어 대화를 이끈다. 이렇게 일본에서는 복지로봇이 심각한 초고령 저출산의 시대에 해법으로 떠오른다.

중국에서는 국가적인 재난으로 떠오르는 대기오염을 완화하기 위하여 오염의 원인을 분석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인공지능시스템을 도입한다.

지난 2011년 후쿠시마 원전사고 때 발전소의 밸브하나를 로봇이 대신 잠글 수 있다면 어땠을까?

 

2015년 대한민국을 공포로 몰아넣은 메르스 사태 때 인공지능과 빅 데이터를 잘 활용해 메르스 공포를 조기에 차단했다면 어땠을까?

 

인공지능은 사람의 능력으로 불가능했던 일들을 가능하게 하고 기후변화 , 질병, 범죄, 재해 등 수많은 일들이 해결할 수 있다.

인류가 문명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연산과 같은 능력 때문이 아니라

희생, 양보, 사랑 등과 같은 인간 본연의 숭고한 정신이 그 바탕이었다.

기계들이 아무리 똑똑해진다 해도 인류가 고난과 좌절을 극복하고 획득한 자유, 인권, 민주주의를 이룰 수는 없다.

그러나 결국 인공지능이 인류문명과 아름답게 공존하는 미래를 만드는 열쇠는 인간의 손에 달려있다.

 

구구절절이 맞는 말이다. 인공지능은 우리에게 편안함을 준다. 그와 반대로 두려움에 대상이기도 하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기대감을 줌과 동시에 불안함도 같이 준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선한 인간에 의지한다면서 인간은 인간 스스로를 믿지 않는다. 그래서 선한 인간의 손에 달렸다는 말은 얼마나 모순된 말인가? 김정은 같은 부류의 인간이 인공지능을 어떻게 사용할지는 모르지 않는가?

그런데도 우리는 알면서도 그 길을 가야할 때가 있다. 결과가 보이는데도 가야할 때가 있다. 다른 방법이 없다. 이미 편안함에 젖어 있는 인간은 그 길을 벗어나서는 살 수가 없다.

 

 

영리한 인간이지만 나약한 동물이기도 한 인간이 AI(인공지능) 만들 당시의 초심,

“인류를 편안하게 살게 해주고 싶다는 마음”을 잃지 않는 것만이 미래의 불안을 해결하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