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계 책만 보면 머리가 지끈거리고 내용이 안들어와요’ 이 말의 뜻을 50이 넘어서야 이해하게 되었다.
책을 냈다는 저자의 말에 축하를 듬뿍담았다. 하지만 저자 사인이 담긴 책을 받고 3페이지를 넘기기도 전에 “잘 받을께” 라고 했던 나 자신을 후회했다. 아. 내가 변해도 너무 변했구나. 예전의 내가 아닌것을.. 50플러스는 이래서 한계인가 보다.
매력적인 제목이라 여겨졌던 ‘세상을 바꾸는 과학적 설문조사 방법’ 지금의 나에겐 너무 어울리지 않는가보다 좌절했다. ㅠㅠ
처음 책을 넘겼을때 들어온 오차계산과 수학 기호들..을 본 느낌은 솔직히 털어놓자면 그랬다.
그래도 한때 대학에서 방법론 강의까지 했던 사람으로서 자존심은 구겨지지만 머리는 하얗게 되는 느낌이랄까..
참 오랜만에 느껴보는 ‘지적 좌절이다’ (30대까지 간간히 이런 느낌을 받고 포기하던가 오기로 일어서던가 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다가 조금 여유를 갖고 한여름의 더위를 넘긴 이후 다시 책을 들었다.
'아하.. 그래 그래 .. 나도 역시 경험한 것들이야.' 이제서야 책이 읽혀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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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조사 활용법 : 이렇게 하면 세상도 바꿀 수 있을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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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를 불편하게 하는 수치들은 대략 생략해보자. 먼저 그 안에 담긴 저자의 의도를 읽고 싶어졌다. 꼭 대학에서 통계를 배우거나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활용하고 있는 수많은 조사에 이런 오류를 나도 모르게 저지르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 이렇게 하면 피할 수 있답니다. 라는 활용법 같았다.
저자가 20년전 한국의 조사회사에서 일하던 당시, 연구원들 사이에 공공연히 떠돌던 이야기가 목소리가 예쁜 20대 면접 조사원이 전화조사를 할 경우 남성의 학력 수준 통계가 높아진다는 것이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러한 현상은 학력을 중시하는 한국적 풍토에서 아름다운 목소리의 여성에게 더 나은 자아상을 표현하기 위해 자신의 학력을 부풀려 응답하는 경향으로 쉽게 이해 가능하다(본문 p. 55에서)
이 대목에서 빵 터졌다. 그래 그래..
표준화된 인터뷰란
1) 쓰여진 질문 그대로 읽기
2) 적절하지 않은 응답에 대해 간접 프로빙하기
3) 응답 그래도 기록하기
4) 응답 내용에 개인적 반응하지 않기
이런것들을 방법론 교과서에서 배웠을땐 1,2,3,4 넘버링해서 암기한 후 시험에 출제되면 그대로 답안지에 옮기는 요소들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그것이 어떤 오류를 범하는 것인지 그리고 그 말뜻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해주고 있다. '예', '아니오'의 단답형 프로빙이 아니라 '무슨뜻인가요?' '좀 더 말씀해주세요'라는 중립적인 프로빙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긍정 혹은 강화의 프로빙은 침묵의 프로빙도 활용할 수 있다. 이걸 보면서 면접원의 프로빙을 읽고 있는 것인지 일반적인 사람 사이의 소통에 관한 이야기인지 싶었다. 하지만 결국 면접이란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것이 아닌가. 의사소통에서 말하는 것과 다를 수 없는 일이다. 적절한 긍정적 피드백을 주고 침묵과 비언어적 메세지를 활용한다는 것은 결국 사람사이의 관계를 이어가는 방식으로 어떤 국면에서건 다르지 않은 것이다.
책을 읽어가면서 설문지를 구성하는 사람과 응답하는 이의 심리전을 보고 있는 것 같은 흥미진진함이 있다.
설문지 구성을 어떻게 하는지에 따라 응답이 달라지므로 응답자가 자신의 경로를 따라 예측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내용은 심리전의 백미같고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설문조사의 흡연율과 소변조사 흡연률의 차이는 사회적 바람직성이라는 요인을 고려할때 그럴거야 하게 되고 여고생의 경우 그 차이가 더 확연하다는 것을 보면 사회적 바람직성에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까지 더해진 이중 구속을 보는 것 같아 더욱 씁쓸하다. 하지만 이런 요인들을 알 고 있다면 좀 더 정확한 설문조사 기획이 가능하지 않을까?
덕분에 끄덕끄덕이면서 책을 어느덧 덮을 수 있었다.
과연 이 책을 누구에게 권할까?
대학원에서 공부할때 공부는 공부였다. 통계나 조사방법론은 철저히 도구라고 생각했고 이는 객관적이고 과학적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이 안에 숨어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보지 않으려 했고 실제 볼 수 없었던 것같다. 아마도 석박사 학생들이 이 책을 읽게 된다면 또 하나의 교재로서 받아들일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번은 보기를 권하고 싶다.
또한 소위 여론조사를 실시하는 사람들.. 여론이라는 이름으로 시민의 뜻 혹은 국민의 뜻이란 이름을 빌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필수일 것이다.
하지만 진짜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무엇이 우리를 호도하고 있는지 알고 싶은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나는 어떤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인지
깨어있기를 원한다면 이 책을 권하고 싶다.
내 얇은 지식이 온전히 내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이용당하는 것이 두려운 이라면 필독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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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너무 무지하다. 그래서 오해하기도 하고 이용당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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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박현주와 이승희 중 나와 인연이 있는 이는 박현주이다. 박현주는 조사업계에서 20년 종사한 설문지 개발 및 국제조사 전문가이다. RTI International 에서 마약 및 건강조사, 전국아동연구 등의 설문조사 방법론 연구자로 일했고 작년 귀국후 통계개발원, 통계교육원 및 각종 대학과 조사기관에 자문과 강의를 맡고 여전히 미국의 연구프로젝트를 계속하고 있는 진짜 통계전문가이다.
난 가끔 이런 통계 전문가들을 보면 참 부럽다.
어떻게 이런걸 그냥 한번에 척척해내지 신기하다.
거기에 그녀는 책까지 썼다.
참 대단한 후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