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지난(經) 역사(歷)인 경력(經歷) 하나를 보탰다.
은퇴 후 안 해본 것을 해보기로 했다. 사실 아직도 내가 무엇을 잘하는지를 모르겠다. 이번에는 시험 감독이다. 시험에 응시한 경험은 있어도 시험감독은 처음이다. ‘국가자격 필기시험 감독관’이란 거창한 타이틀로 참여하게 되어 수험생처럼 긴장되기도 하고 나들이 가는 것처럼 설레기도 했다.
감독관이란 전혀 다른 경험을 하게 되어 설렘이 더했다. 아침 8시 30분까지 고사장 감독관 대기실로 가야했다. 설레는 마음 반, 기대하는 마음 반으로 평상시보다 서둘러 일찍 차비하고 지하철을 탔다. 그러나 서두르면 무엇하리! 내가 탄 지하철은 반대로 가고 있었다. 그렇다. 반대 방향 전철을 탄 것이다. 그래도 너무 늦지 않게 알아차린 것이 나름 안심이 되었다. 내려서 다시 반대 방향으로 가는 지하철에 올라타고 여러 번 환승을 한 후에 가까스로 감독관 대기실에 도착하였다.
허겁지겁 자리를 찾아 앉으니 바로 감독관 주의사항 교육이 있었다. 커피 한 잔에 나눠 준 김밥을 우걱우걱 밀어 넣으며 안내사항을 익혔다. 그냥 피상적으로 생각했던 감독관의 일은 사뭇 달랐다.
시험 감독 실무는 2명이 한 조로 구성되며 나는 ‘감독관2’가 되었다. 같은 조의 ‘감독관1’은 40대 중반으로 시험 감독의 경험이 많은 듯 했다. 감독관1은 유의사항 안내, 휴대폰 전원차단 등 소지품 보관 안내, 시험시작 선언과 종료예고 및 종료선언을 감독관2는 공학용 전자계산기 리셋여부 공지, 수험자 신분확인, 응시현황서 작성 및 복도 감독관에게 인계 등 생각보다 제법 여러가지 임무가 주어졌다. 교육을 마친 후 시험지 박스를 들고 9시 20분에 제 9고사장으로 갔다.
1교시 시험 시작은 10시이지만, 09시 50분까지 응시자 교육이 있었다. 응시자 교육은 안내 방송으로 실시되었지만 중요한 사항은 감독관1이 다시 육성으로 안내했다. 혹시라도 잘못 알아들을 수 있기 때문이라 한다.
9시 20분.
감독관들은 뻘쭘하게 시험을 알리는 종소리를 기다리고 있고 수험생들은 초조한 듯 눈을 감고 연상하거나 기도하는 사람, 책을 피고 마지막 한 문제라도 더 풀어보는 사람 등 각양각색이었다. 내가 맡은 ‘9고사장’에는 69년생부터 99년생까지 있다는 수험생 구성이 매우 다양했다. 내 마음 속 한켠에서는 시험을 본다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운 마음이 들다가도 이들을 보고 있자니 “필요한 자격증 시험 준비를 해볼까?”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사실 최근에 운전면허증 갱신을 위한 필기시험을 보았다. 제때 갱신했더라면 시험 볼 필요가 없었는데, 계속하여 미루다가 운전면허가 말소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시험에 참여했다. 작년 운전면허 필기 고사장에 들렀을 때와 시험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우선 종이 시험지가 없고 컴퓨터 화면에 있는 동영상까지 출제되는 전자시험이었다. 그때도 많이 다르다는 것을 느꼈지만 이번에도 많이 다르다는 느낌이었다.
우선 고사장의 책상이 나무책상이 아니라 유리판이 깔려있는 깨끗한 1인용 철재책상이었다. 초등학교 때 2인용 나무책상은 서로의 구역을 정하하기 위해 칼로 파낸 가운데 금과 중·고등학교 때 시험보기 직전 나무책상에 빼곡히 예상되는 단어를 적어놨던 기억이 스쳐 갔다. 이제는 유리판 철재 책상이기 때문에 이러한 추억은 없을 것 같다.
9시 30분 쯤
핸드폰, 공학용 전자계산기 주의사항 공지하였다. 드디어 9시 50분 시험지와 답안지 배부 안내 방송이 나왔고 감독관1이 “시험지 내용은 미리 보지 마시고 10시 시험 시작 때 볼 수 있습니다”라고 주요 안내사항을 공지하면서 시험지를 배부하기 시작했다.
10시 정각이 되자 감독관1의 “시험이 시작되었습니다.”라는 선언이 울린다. 정적과 함께 이따금 감기에 걸린 수험생의 훌쩍이는 콧소리와 시험지 넘기는 소리만 들릴 뿐이다. 정적과 고요 때문이었을까? 한참이 흘렀다고 생각되었는데, 고작 10분밖에 지나지 않았다. 기다림의 시작이었다.
지루함을 느낄 때 쯤 수험생 신분 확인과 확인 결과를 OCR 답안지 감독관 확인란에 사인을 하기 시작했다. 신분확인하면서 제일 어려운 것이 여성분들의 얼굴 확인이다. 주민등록증에 발급 당시에 있는 앳된 모습, 응시표에 붙어있는 미장원 다녀오고 사진관에서 포토샵으로 다듬어진 얼굴, 오늘 아침 화장할 겨를도 없이 거의 민낯의 얼굴...남자인 나의 눈으로는 구별하는 것이 무척 힘들다. 모두 다 다른 얼굴로 보이는 여성 수험생의 정보가 유일하게 다르지 않은 것은 주민번호와 수험번호뿐인 것 같다.
거의 시험 시간 절반이 지났을 무렵, 복도에 있는 감독관에게 시험 응시 현황서를 건넸다. 응시자 30명 중 1명의 결시생이 있었다. 그 결시생은 시험보다 더 중요한 무슨 일이 있었을까? 아니면 시험 준비를 충분히 못해서 이번 시험을 포기한 걸까? 쓸데없는 걱정을 해본다.
이때쯤 계속 훌쩍이던 감기 걸린 남자 수험생이 콧물 닦을 휴지를 요구했다. 화장지도 함부로 들여 올 수 없기 때문에 복도 감독관에 연락해서 시험본부에서 허락한 화장지를 건네주었다. 그런 경우 여자라면 휴지를 미리 준비했을텐데... 보통의 남자들은 이렇듯 세심함이 떨어지고 건성건성이다.
수험생은 시간이 모자라 시계를 보지만 감독관은 지루해서 시계를 자꾸 들여다 본다. 이번 시험이 난이도가 있었던 모양이다. 시험시간 절반이 지나면 퇴실할 수 있는데 거의 모두가 끝날 때까지 책상에 앉아 있었다. 그 중에는 OCR답안지 작성 실수로 교체 요구한 사람이 4명이나 있었다.
처음으로 접했던 OCR답안지는 예비고사 때의 일이었다. 당시는 답안지에 전용 연필로 답의 상단과 하단을 잇는 방법이었는데, 지금은 전용 사인펜으로 답에 마킹하는 것으로 많이 발전했다. 당시에는 연필을 사용했기 때문에 오답을 고칠 때 지우개가 필요했지만, 지금은 잘못 표시하면 답안지를 얼마든지 교체해 준다. 처음 OCR을 도입 당시는 상당한 기술이었고 OCR 종이가 꽤 비쌌을 것이므로 답안지 종이를 바꿔준다는 것은 무리였을 것이다.
드디어 감독관1이 “1교시 시험 종료 5분 전입니다. 3분전입니다. 시험종료 되었습니다.”를 알리면서 시험이 모두 끝났다. 우두커니 서 있으면 될 줄 알았던 시험 감독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남이 하는 일은 쉬워 보인다. 오늘도 많이 배웠다. 또 한 가지는 안 해본 것을 새롭게 시도했다.
집에 도착하여 ‘시험감독 아르바이트’를 포털 사이트에 검색하여 물어보니 상당히 많다.
동무들아!
한번 시도해 보시라!
재미난 추억을 회상하면서 세상의 또 다른 면을 경험해 보시라!
추억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부추겨 그럴듯한 비즈니스가 될 수 있을지 누가 알랴!
그래서 오늘 지나(經)간 나의 역사(歷), 경력(經歷) 하나를 쌓았다.
앞으로 시험 감독관으로 누가 또 부를지 안 부를지 모르지만......
이제 또 다른 경험을 쌓아 가려한다.
다음은 '주례'다. 전에 주례부탁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손사래를 쳤다. 이제는 주례사도 준비했다. 그러나 아직 부르는 사람이 없다! 그때 손사래 친 것이 아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