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자서전, 돌봄을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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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작년 가을 서울시50플러스 중부캠퍼스 ‘천 개의 스토리, 천 권의 자서전’이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그런데 내용을 잘못 알고 참여해 당황했다. 내 자서전이 아니고 부모의 자서전을 쓰는 것이었다.
구술해 줄 부모가 없으니 포기해야 할지 며칠 고민했다.
다시는 오지 않을 기회라 생각되어 어떻게든 써 보기로 마음먹었다.
내 나이 35세, 40세에 차례로 부모를 여의었다. 당시는 부모로부터 일방적으로 받기만 한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지 않았다.
비로소 50+ 세대가 되고야 알았다. 그것도 어머니의 자서전을 쓰려고 하면서 말이다.
어머니와 공유한 시간 찾기는 사진 속 어머니한테 일방적 묻기로 시작되었다.
결혼 이후 찍은 사진에서도 나는 시골집 마루에서 옥수수나 떡 등을 받아먹는 모습으로, 역시 받고 있었다.
하지만 사진에 얽힌 어머니의 이야기를 확인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가 외동딸인 데다 오빠도 저세상 사람이 되어서 허허벌판에 홀로 서 있는 듯했다.
왜 이렇게 기억이 희미해졌을까 곰곰 생각해 봤다.
30년도 더 된 일이긴 하지만 결혼 이후 친정에 자주 가지 못해 어머니와 함께 한 시간이 너무 적었던 이유가 있었다. 가슴이 더 아려왔다.
친정어머니는 아버지와 1950년에 결혼해서 부산에서 신접살림을 시작했다. 지금도 부산의 헌책방 거리가 있는 그곳에서 살았다고 들었다.
오래된 기억과 사진만으로 한 줄 두 줄 쓰다가 기가 막혀 혼자서 중얼거렸다. ‘무덤을 파고 어머니를 만나러 갈 수도 없고... .’
하필이면 어머니는 막내라서 어머니의 형제들도 다 저세상 사람이다.
어릴 적 이야기는 더더욱 막막했다. 아무리 애타게 찾아도 어머니 이야기를 들려줄 누구도 없었다.
그렇지만 중도 포기는 싫었다. 이것마저도 하지 않으면 우리 딸들은 외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지 않을까 싶었다.
완성 후, 12월 어느 날 A4 1/2 크기에 60페이지 소책자 어머니의 자서전 ‘목련꽃처럼“을 받았다.
아쉬움과 안도감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아쉬움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궁리 끝에 금년 1월 어머니가 결혼하기 전에 살았던 친정 동네를 찾았다. 거기서 어머니를 아는 누군가를 만날 수 있으리라 막연한 기대를 했다.
그런데 50년도 넘은 세월 탓에 외갓집은 온데간데없고 집터만 남아있었다. 몽돌이 깔려 있던 바다는 수심이 깊어져, 파도가 밀려오면서 몽돌에 부딪혀 짜락짜락 내는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어머니의 흔적을 찾기는 서울 천지에서 박 서방 찾기만큼 어려울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앞바다 수평선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묘안을 찾았다. 어머니 나이 또래가 있을 법한 경로당 간판을 보고 무조건 들어갔다. 먼저 내가 누구네 손녀고, 할아버지 성과 이름자, 어머니 이름까지 말했다.
어머니와 관련된 정보는 모두 꺼냈다. 어르신들의 말과 내 기억을 연결해 퍼즐을 맞추듯 어머니의 어린 시절을 더듬어 나갔다. 다행히 94세 어르신 한 사람이 외갓집 먼 친척이었다. 어머니보다 6세 위이지만 청력이 나쁘지 않아 소통하는 데 무리가 없었다.
또 한 사람은 어머니 이름을 기억하고 자기가 어머니 소꿉친구라고 자칭해서 기대되었다. 그런데 말하는 게 앞뒤가 맞지 않아 이상했는데, 나중에 친척 어르신께서 그분이 실은 치매 환자라고 알려주셨다.
경로당은 다섯 평 정도에 방 두 개, 부엌. 화장실. 거실까지 있어서 가정집 분위기였다.
30~40명 정도 되는 어르신들은 나이 80세 이상과 이하로 나눠 방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 어르신들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시간을 즐겁게 보낼 거리가 없으니 텔레비전을 물끄러미 보다 말다 하고, 한쪽에서는 화투 놀이를 했다.
일부 어르신들은 텔레비전 소리가 크네, 작네 유치원생들처럼 티격태격 싸우기도 했다.
음악이라도 틀어놓고 신나는 체조라도 같이하면 분위기가 밝아지지 않을까 싶었지만 마음뿐이었다.
하루에 두 번 다니는 버스가 올 시간이 몇 분 남지 않아서였다. 안타까워서 보건소에서 노래, 체조 가르치는 선생님 안 오냐고 물었더니 모른다고 했다. 도시 노인의 모습과 사뭇 달랐다.
내가 알기로 서울시에서는 경로당별로 여가 활용을 위한 강사비용은 물론, 대한노인회에서 노래, 춤, 체조, 미술치료, 동화 구연 등 다양한 강사를 뽑아 배정까지 한다.
평생 일만 하다가 이제 재미있게 놀 시간인데 방법을 모르니 누군가의 도움이 꼭 있어야겠구나 싶었다.
’07년 노인장기요양법이 제정되고 ‘08년 7월에 실시되면서 노인을 모신다는 말보다 돌본다는 말이 보편화되고 있다.
이미 우리나라는 노인 인구 비율이 14%가 넘으면서 고령사회에 접어들었고, 국가도 노인 돌봄 문제를 해결하려고 나섰다.
그러니까 50+세대는 노인 돌봄이 개인의 문제를 넘어 사회문제로 인식된 시대에 사는 것이다. 이에 돌봄이 전문적인 직업으로 굳혀졌다.
요즘 50+세대가 돌봄 전문 직업인 요양보호사로 적합하다고 평가되는 듯하다.
실제로 지난 6월 마포 소재 모 요양보호사교육원 원생 35명의 평균 나이가 57세라고 지인 교육생한테서 들었다.
서울시50플러스 중부캠퍼스에도 ’남성돌봄전문가‘ 과정을 ’18년부터 실시하고 있고, 50+ 보람일자리인 ‘어르신돌봄지원단’으로 노인시설에 배치되어 종이접기, 동화구연 이외 여러 활동을 한다고 한다.
돌봄은 사회 문제를 해결하고 경제적 가치도 있는 일이다. 초고령사회에서 ‘남성돌봄전문가’ 직종은 돌봄 인력으로서 국가의 버팀목이 될 것이며. 서로 돌봄 시대에는 두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현재도 ‘노노케어 사업(노인이 노인을 돌봄)’으로 노인복지관 등에서 실시하는 도시락 배달 사업이 있다. 어머니 친정 동네에서 만난 어르신들을 보면서 서울시50플러스 중부캠퍼스 ‘어르신돌봄지원단’이 하는 활동의 필요성을 새삼 확인했다.
그리고 서로 돌봄 시대에 대비해야 함도 알았다.
그리고 훗날 내 딸이 나를 주인공으로 ‘어머니 자서전’을 쓰고 싶을 때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져 쩔쩔매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서로 바쁘다고 자주 못 보는 딸에게 ‘시간 내서 밥 한번 먹자’ 문자 보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