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0서대문50플러스센터와 함께 한 이야기 공모전 수상작 중 일부를 일주일에 한 편씩 소개해드립니다.
작품 공개 순서는 순위와는 무관합니다.
정원의 꿈
글 사진 _ 정봉운
산책을 나갔다가 나비 한 마리를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사향제비 나비였다. 나비는 영롱한 자태를 나풀나풀 뽐내더니 이내 향기로운 화단 속으로 나를 이끌었다.
‘버베나 보나리엔시스’ 이 꽃을 처음 만난 곳은 서대문50플러스였다. 외래어인데다가 이름이 길어 익히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버베나의 귀여운 모습과 화려한 색이 아직도 생생히 떠오른다. 자잘하고 앙증맞은 꽃잎들이 여러 개 모여 한 꽃을 이루니 한눈에 보기에도 탐스럽고 이국적이었다. 하늘하늘한 줄기와 더불어 가을이 되도록 색을 잃지 않고 서 있는 모습은 마냥 사랑스러웠다. 당시 서대문50플러스 정원에는 이름만 들어도 생소한 백묘국, 아스틸베, 청하국, 우단동자, 에키네시아, 델피늄, 휴케라, 가우라등의 온갖 꽃들이 다투어 빛을 내고 있었다. 50을 넘으면서 휴식이 필요했던 나에게 그런 정원과 그린 코디네이터 활동 경험은 단비 같은 것이었다.
‘끼~~~익! 덜컹!’ 졸음에 쫓기던 나는 정신을 차리고 급히 버스에서 내렸다. 내가 내린 곳은 다름 아닌 유진상가 앞, 내리자마자 높다란 육교와 퇴색한 건물 하나가 나를 불러 세운다. 생각지도 못한 풍경 앞에서 잠시 멈칫하다 잰걸음으로 50+센터로 향했다. 그린 코디네이터 사회공헌활동가 OT가 시작되기 전 미리 옥상 정원을 둘러보았다. 기대했던 정원과는 달리 바닥은 시멘트요 이동식 화분으로 된 플랜트 박스 정원이었다. 그때만 해도 나무까지 앙상하게만 보였던 그야말로 무늬만 정원인 곳이었다. 이때 떠오른 생각은 이 정원에서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었다. 그러나 그 고민들은 금세 정원을 가꾸는 작은 일상들로 채워졌고 한 번이라도 일을 빠지게 되면 뭔가 허전하고 섭섭한 그런 심리상태에 도달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관수가 주된 업무였지만 일에 적응할수록 정원에서 하는 일들은 크게 몇 가지로 정리가 되었다. 식물의 특성을 파악하여 적절한 양의 물을 주고 일조량을 관리하는 일, 적절한 시기에 씨를 뿌리는 일, 미리 병충해를 방지하는 일, 전지를 통해 줄기나 잎의 생장을 돕는 일, 도구와 주변을 정돈하는 일, 이 밖에도 분갈이와 잡초를 제거하는 일 등, 어찌 보면 일이라기보다는 도리어 축복과도 같은 일상이었다. 생명을 돌보는 일은 항상 보람과 즐거움이 뒤따라왔다. 자녀를 키우는 일과도 닮아있어 소중한 깨달음도 얻게 되었다. 식물에 대해 해박한 동료와 함께해서 그런지 어렵다거나 힘들지도 않았다. 실수와 성공 두 과정에서 온 경험 모두 가드닝 초보자인 나에게 모두 좋은 가르침으로 돌아왔다.
일을 하다 보니 유진상가 주민들과도 종종 마주치게 되었다. 주민들이 가꿔놓은 화분을 보는 재미도 있었고 어려운 점도 서로 나눌 수 있었다. 어느 날 잡초를 뽑다가 그쪽에 있는 잡초까지 뽑아달라고 하셔서 날을 잡아 화단 전체 풀을 뽑아 준 적도 있었다. 주민 화단을 관리하는 아저씨부터 샤샤 할머니로 불리는 고양이 할머니, 집안에도 화분을 백여 개 이상 가지고 계시다는 화초 부자까지 자주 나오셔서 정원 작업에 대해 참견도 하시고 때론 분갈이를 도와 달라고 하셨다. 대부분 식물 재배에 대한 경험이 많으셔서 궁금한 점이 생기면 여쭤보기도 하였다. 가장 신기했던 것은 처음 보았던 것과는 달리 시간이 갈수록 꽃들도 많아지고 나뭇잎도 무성해지면서 나비와 벌 같은 곤충들로부터 박새와 직박구리 같은 새들까지 찾아든다는 점이었다. 이런 변화를 통해 생태계가 풍성해질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할 수 있어 가슴이 벅차오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가을이 되자 수업을 들은 학생들과 함께 첫 수확에 나섰다. 얼갈이와는 다르게 쪽파와 열무는 대견하게 잘 자라주었다. 수확한 채소와 함께 팜파티에 쓸 재료를 손질해 부침이나 샐러드로 멋진 식탁을 만들고 가을빛이 쏟아지는 오후 즐거운 담소도 즐겼다. 겨울이 되기 전 다음 해에 나올 알뿌리 식물들을 심고 한겨울 따뜻하게 지내라고 여러 가지 월동 준비도 해주었다.
활동이 다 끝날 즈음 이제까지 귀찮을 정도로 말을 붙이고 일거리를 만들어 주셨던 분이 조심스레 곶감 한 팩을 들고 찾아오셨다. 곶감을 열어보니 곶감에 핀 곰팡이가 하얗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분은 이 중에서 가장 깨끗한 곶감 하나를 쑥 내미시더니 먹어보라 하신다. 우물쭈물하다가 그 마음이 고맙게 느껴져 한입 베어 물었더니 곶감보다는 마음의 정이 더 찡하게 느껴졌다. 눈이 올 때면 가끔 그 곶감이 생각나기도 하고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도 피어오른다.
수업 시간 보조 선생님께 받았던 모진 꾸지람도 어느덧 정원의 꿈으로 다시 자라나 지금도 여전히 식물에 대해 배우고 있고 그 배움을 실천에 옮기고 있다. 언젠가 때가 되면 이런 정원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희망도 생겼다. 부르지 않아도 새들이 찾아오고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발길이 끊이지 않는 살아있는 정원은 생각만 해도 늘 가슴이 두근거린다.
삶과 일에 지친 나에게 자유와 날개를 주었던 서대문50플러스센터 정원과 사회공헌 활동을 결코 잊지 못할 것 같다.